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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96화 (94/120)

96화

공작의 첫 노래 그리고

가문, 외모, 능력, 재력, 성품까지 어디 한군데 빠지는 곳 없는 잘난 남자,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공작.

안타깝게도 저주에 걸려 그 빛나는 면모가 가려지고 잊혔으나 이제 어찌어찌 저주도 떨어져 나간 것 같고, 제국 전역에서 평판이 치솟고 있는 인기남이여.

그 완벽한 피조물이 그 듣기 좋은 음성으로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준다면? 천사가 지상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될까.

비록 그의 청혼도 그의 옆자리도 가질 순 없지만, 심지어 그가 바치는 세레나데조차 내 것일 수 없지만, 노래하는 그의 음성과 모습만은 갖고 싶었다.

‘그 정도는 나도 가질 수 있잖아?’

이런 짓궂은 반항심으로 알레스는 공작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리 이기적인 주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뭐든 잘하는 공작은 목소리마저 좋으니 노래도 완벽하게 잘 부를 게 뻔하고, 결국 자신의 재능을 하나 더 세상에 알리는 기회가 될 테니까.

“노래 말입니까?”

“네, 저를 위해 노래 한 곡 불러 주세요, 카이트. 어려운 부탁 아니죠?”

“노래라면 어떤 노래를….”

“아무 노래라도 좋아요. 원래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여야겠지만 우린 그런 걸 따질 필욘 없으니까. 카이트가 좋아하는 노래면 돼요.”

“듣고 싶습니까?”

“네.”

공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듯 보이는 건 왜일까.

“알레스가 원한다면 부르겠습니다.”

“원한다니까요.”

공작은 그러고도 한참을 주저하더니 겨우 결심한 듯 나름 무대로 정한 지점으로 가서 섰다.

아무래도 노래 부르는 데 조금 쑥스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하긴 금욕주의자 공작이 평소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치열한 전장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좀 무서운 느낌이고.

알레스는 물론이고 매일같이 노래와 춤을 혹독하게 연습하고 있는 꽃미남 마부들도 공작의 노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는 무대에 선 모습도 아름다웠다. 꽃미남 마부들은 저 모습을 모델로 삼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공작의 목울대가 울리며 입술이 열렸다.

“나의 아름다운 앤은 좋아했지, 내가 만든 푸딩을. 하루에 세 개씩 먹었지만 만들 줄은 몰랐다네.”

공작이 노래를 부르자 다섯 명의 청중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석상처럼 굳었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했지. 나를? 아니면 푸딩을?”

공작은 두 손을 아랫배 앞에 모아 쥐고 상기된 얼굴로 열창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만든 푸딩을 질투하네.”

공작의 노래가 끝나자 원래도 고요하던 곳에 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청중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고뇌의 흔적이 남았다.

노래가 끝나고 수분이 흐른 후에야 정신을 챙긴 꽃미남 마부들이 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공작의 얼굴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해 귀와 목까지 발개졌다.

알레스는 여전히 굳어진 채 생각했다.

공작도 못하는 게 있었어!

그는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지독한 음치였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다.

저 외모에 저 목소리로 어떻게 노래를 저렇게 못 부를 수가 있지?

알레스는 방금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고결한 공작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노래를 부른 사람보다 시킨 사람이 몸 둘 바를 모르게 된 상황.

노래 실력은 그렇다 치고 선곡은 또 뭔가.

자신도 당연히 푸딩을 사랑하고, 노래 속에 나오는 앤이라는 여자에게 무척이나 동질감을 느끼지만, 대체 골라도 어디서 저런 노래를 골랐는지.

알레스는 겨우 입을 떼고 물었다.

“카이트,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재밌는 노래네요. 그런 노래는 어디서 배웠어요?”

빈말이라도 차마 잘 불렀다고는 말 못 하겠다.

공작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노래를 알고 있어 다행입니다.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노래거든요. 청매단 단장인 패트릭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라.”

“청매단이요?”

“메르세데스의 정보 조직입니다.”

보통 정보 조직의 수장 하면 냉철하고 치밀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푸딩 노래를 부르는 청매단의 단장이라.

알레스의 의문에 답하듯 공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패트릭은 메르세데스로 오기 전 남부에서 정보 길드원으로 활동하며 푸딩 가게를 했습니다. 그가 만든 푸딩이 꽤 인기가 좋았다고 해요. 지금도 가끔 솜씨를 발휘하는데 아주 맛있습니다.”

“푸딩 맛이 저도 궁금하네요.”

“원한다면 언제든 함께 메르세데스로 갑시다.”

치킨에 이어 푸딩으로 작업 당하는 알레스였다.

“그런데 아는 노래가 푸딩 노래 하나라고요?”

“아, 사실 북부 사람들은 쑥스러움을 잘 타서요. 얼핏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은 부끄러움이 많은 겁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요. 남부 출신인 패트릭 단장은 메르세데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푸딩 노래구나.

알레스가 보기에 메르세데스 영지민에겐 1인 1치킨보다 노래 보급이 더 시급해 보였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영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공작은 타고난 음치인 데다 아는 노래도 하나밖에 없다는 건데.

남부 출신의 전직 푸딩 가게 주인, 현직 정보 조직 단장밖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 불모지에서 후천적으로 노래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얄팍한 욕심을 들어주기 위해 망신살을 감수하고 그리 열심히 노래하다니.

당신 정말….

공작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여전히 두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알레스는 그런 공작에게 바짝 다가섰다.

귀여워 미치겠어!

그러곤 정말로 살짝 미쳤는지 까치발을 하고 공작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촉, 소리와 함께 들어 올렸던 뒤꿈치를 내리니 잠시 숨 쉬는 걸 잊은 듯한 공작의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붉게 상기된 그 얼굴이 약간 불쾌한 듯 보여 알레스는 횡설수설 사과했다.

“미안해요. 노래가 너무 감동적이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

알레스의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작은 평소답지 않게 성급하고 거칠게 다가와 알레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알레스의 도발이야말로 귀여운 수준이라는 듯 그는 한 가닥의 숨도 흘려보낼 수 없다는 기세로 알레스의 입술을 봉인해 버렸다.

뜨거웠다. 그는 불꽃이 맞았다.

영혼까지 집어 삼킬 듯한 화염을 견디지 못한 알레스가 뒷걸음질 치려 하자 그는 단단한 팔로 알레스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감쌌다.

키스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알레스는 그제야 반성했다.

생각해 보니 이쪽저쪽 세상을 통틀어 첫 키스였다.

이토록 수많은 감정과 감각의 격렬한 충돌인 줄 미처 몰랐다.

이에 비하면 지난 축제 때 접촉사고는 사고 축에도 끼지 않을 듯했다.

왜, 겁도 없이, 덤볐을까.

숨도 막히고 후진도 막힌 알레스가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는 듯한 소리를 흘리자 공작은 그제야 숨 쉴 틈을 허락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알레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인 채 어깨와 가슴을 들썩거렸다.

알레스가 또 아까와 같은 허접한 변명을 늘어놓으면 가만 두지 않을 기세였다.

입술이 화끈거리는 게 정말로 덴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너무해요.”

알레스가 동정심에 호소해 보았다.

“너무한 건 알레스 당신입니다.”

공작이 냉정하게 잘라내더니 억울함을 담뿍 담은 눈으로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색인 파랑은 매우 다양한 감정의 결을 담아내곤 했다.

파랑은 보는 사람의 감정이나 욕망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색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지금 공작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간절하고 애틋한 빛은 바로 내 마음속에 일고 있는 감정인 걸까.

알레스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손을 뻗어 공작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공작은 그 손을 다시 제 손으로 감싸더니 알레스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서 손목, 팔을 따라 움직이던 공작의 입술은 결국 다시 알레스의 입술에 안착했다.

그래도 동정심에 호소한 것이 조금은 먹혔는지, 공작의 움직임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번엔 불꽃만 느낀 것이 아니라 물기도 느껴졌으니까.

부드러워졌다고 가벼워질 것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었다.

그는 더욱 농밀하게 입술을 맞물려 왔다.

공작은 오직 노래만 못하는 것이 확실했다.

뜨거운 입술이 알레스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이번엔 이마에 내려앉았다. 이마 위에도 열꽃이 피었다.

“푸딩 노래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 그토록 뜨거웠냐는 듯, 이번에 그는 아기에게 하듯 이마에 가볍고 다정하게 몇 차례 입을 맞췄다.

“제가 원래 단 걸 좋아하잖아요.”

“사랑의 세레나데가 비장의 무기라더니, 정말 강력한 무기가 맞군요.”

알레스가 손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오해하지 마세요. 청혼을 받아들인 건 아니에요.”

공작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오해하고 싶군요. 청혼은 거절하고 입술은 훔쳐 가는 겁니까?”

“아까 상상 댄스를 출 때 카이트도 내 이마에 입을 맞췄잖아요. 칭찬이라면서. 저도 카이트의 노래를 칭찬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당신 입술을 훔쳤다고 말하기엔 내가 더 호되게 당한 것 같은데요….

“입술에 하는 건 칭찬이 아닙니다.”

“제 맘이죠!”

“책임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프러포즈 패키지를 반값에 할인해 드리죠.”

“그럼 또 알레스와 이곳에 오게 되겠군요.”

“…….”

“좋군요, 그런 것도.”

그사이 어감이 많이 달라진 ‘좋군요’였다.

아까부터 감히 침도 삼키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꽃미남 마부들은 알레스와 공작의 종잡을 수 없는 연극을 관전하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알 수도 없고 생각대로 흘러가지도 않는 오묘한 것이 인생임을.

오늘만 해도 두 분이 커플 댄스를 춘다고 하시기에 열심히 플로어를 준비했는데, 눈을 비비고 봐도 춤사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세상 다 가진 남자가 노래를 부른다기에 한껏 기대했는데, 끔찍한 푸딩 노래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마님이 음치를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더더욱 몰랐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취향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늦은 시각까지 여태 프러포즈 패키지를 진행했지만 청혼이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도 반전이었다.

공작 전하 퇴짜 맞으셨구나 생각한 순간 진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두 분이 맺어지시는구나 생각한 순간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

대체 두 분은 결혼을 하시는 건지 마시는 건지.

연애는 매우 피곤한 일이라는 걸 꽃미남 마부들은 알게 되었다.

앞으로 일과 학습과 연습에만 매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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