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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95화 (93/120)

95화

알레스의 첫 춤

춤! 춤이라는 거대한 난관이 있었지!

공유 마차를 마정석 연료 없이 마법식으로 운행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공작과 브린 황자가 돕기로 했고, 공작은 그 대가로 알레스의 첫 커플 댄스를 자신과 함께할 것을 요청했다.

말하기도 민망한 대가이지만.

문제는 알레스의 춤 실력이 그보다 더 민망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쪽저쪽 세상 할 것 없이 모두 살벌한 몸치 통나무라니.

카이트,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러는 건 아니죠?

알레스는 공작이 내민 손을 마지못해 잡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공터로 나갔다.

알레스와 공작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꽃미남 마부들은 착실하게 움직여서 어느 틈엔가 작은 플로어를 꾸며 놓았다.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공터에 조명을 달고 축음 마도구까지 준비해 둔 것이다.

세공사들이 음악을 입력한 마정석을 축음기에 넣으면 음악이 재생되는 방식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라면…. 알레스는 눈물을 머금었다.

어쩌면 보는 눈이 많고 환한 무도회장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이곳처럼 인적이 드문 어두컴컴한 언덕에서 망신을 당하는 편이 나을지도.

공작의 눈과 저 네 쌍의 눈만 감당하면 되잖아.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꽃미남 마부들이 마치 들짐승처럼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춤과 노래, 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매일같이 윽박지르던 마님은 과연 춤 실력이 얼마나 되실지.

알레스의 눈엔 그들이 자신의 춤 실력을 비웃고 물어뜯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레스가 인사도 잊은 채 목석처럼 뻣뻣하게 서 있자 공작이 한 발 다가섰다.

그는 알레스의 한쪽 손을 조심스레 이끌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어 깍지를 꼈다.

알레스는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것 같아서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공작은 자신의 남은 한 손을 알레스의 허리에 둘렀다. 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지고 맞잡은 손에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용기를 내 공작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시린 별 같은 눈동자가 알레스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 춤을 잘 추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냥 보통 사람들만큼만 출 수 있어도 좋을 텐데.

이토록 아름다운 첫 춤을 나처럼 처참하게 망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알레스는 아까운 마음에 얕게 한숨을 쉬었다.

쏟아지는 별빛과 저 멀리 도시의 불빛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플로어에 마침내 춤을 위한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음악마저 무척이나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이제 첫발을 떼야 하겠지? 움직이자마자 공작의 발을 짓뭉개는 건 아닐까? 알레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를 두드릴 뿐,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도 아무것도 움직이는 기미가 없었다.

불쌍한 나를 위해 시간이 멈춘 것도 아닐 텐데?

알레스는 감았던 눈을 살그머니 뜨고 동정을 살폈다.

공작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아직 전주 구간 같은 건가? 대체 춤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공작이 움직이면 눈치껏 움직이면 되겠지?

알레스는 공작과 손을 맞잡은 채로 서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첫발의 타이밍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공작의 가슴을 노려보며.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춤은 시작되지 않았다. 알레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춤은 보통 언제 시작되는 건가요?”

공작이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춤은 이미 시작되었는데요.”

“네? 어떻게요?”

“방금처럼 눈을 감고 음악을 느끼면서 머릿속에 춤추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알레스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공작이 속삭이듯 답했다.

“알레스와 첫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안 어울리게 장난치지 마시고요.”

어둠 속에 빛나는 네 쌍의 눈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제가 아무리 춤을 몰라도 이렇게 추지 않는다는 거쯤은 알고 있다고요. 그리고 지난번에 이미 경고 드렸지만 제 춤 실력은 형편없어요. 각오하세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군요?”

“실은 지난번 황궁 무도회 때 알레스가 여러 레이디들과 함께 춤추는 걸 봤습니다.”

“그걸! 보셨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내 첫 춤 신청이 알레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고 난처한 요구인지를.”

하지만 그때 춤은 매우 양호한 축에 드는데? 나 그날은 좀 추지 않았나? 거기 분위기를 휘어잡았고 말이야. 그 정도면 거의 춤신, 춤왕 분위기였는데?

공작의 다정한 이해심에 알레스는 살짝 빈정이 상하려고 했다.

“그래서 춤추는 걸 면제해 주시겠단 건가요? 제 뻣뻣한 몸을 동정하셔서요?”

“아니요, 그렇게 하면 알레스가 또 부담을 가질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대가를 치르겠다고 고집을 부릴 테고.”

아닌데요, 면제해 주시면 입 싹 닦을 건데요.

“그래서 대가는 그대로 첫 춤으로 하되 춤의 종류를 바꾸어 보았습니다.”

“소용없으세요. 아무리 쉬운 율동도 저한테는 고난도 댄스니까요.”

“알레스가 자신 있을 만한 춤을 찾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춤이 있을지….”

공작이 고개를 기울여 알레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상의 댄스.”

“상상의 댄스?”

“지금처럼 파트너와 몸을 맞댄 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겁니다. 음악에 맞춰 함께 춤추는 모습을.”

알레스도 까치발을 하고 공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뭐예요, 대체.”

공작이 낮게 웃으며 다시 알레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레스는 상상력이 뛰어나잖아요. 이 춤만큼은 알레스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알레스가 공작의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놀리시는 건가요?”

공작의 숨결이 알레스의 귀에 닿았다.

“날 믿어 봐요. 눈을 감고 음악에 몸을 맡겨 보세요.”

그래, 통나무 같은 몸을 우스꽝스럽게 삐걱거리지 않아도 되니 이게 확실히 더 낫긴 하지.

알레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공작이 말한 대로 상상 댄스의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 알레스는 우아한 나비가 되어 나풀나풀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곧게 잘 빠진 몸이 곧 안무요 춤 실력인 공작이 근사하게 춤을 춘 건 말할 것도 없고.

귓가엔 아름다운 선율이, 코끝엔 삼나무향이 은은하게 스쳤다.

상상 댄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알레스의 얼굴에도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공작에게 속성으로 사교댄스를 가르치느라 며칠에 걸쳐 생고생을 하고 성 정체성의 혼란마저 느껴야 했던 브린 황자가 이 모습을 봤다면 피를 토했겠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꽃미남 마부들의 눈동자도 혼란으로 마구 흔들렸다.

두 분이 하시려던 것은 커플 댄스가 아니라 얼싸안고 함께 음악 듣기였나?

이렇게 남 보기엔 이상한 짓, 나에게는 로맨틱한 시간이 흘렀다.

신기한 건 상상 댄스를 추면 출수록 정말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빙글빙글 돌고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

‘와, 나 상상력이 진짜 좋긴 한가 보다.’

알레스는 공작과 함께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자 스스로의 상상 댄스 실력에 감탄했다.

그래서 공작의 귀에 대고 자랑을 좀 했다.

“상상 속에선 제가 춤을 꽤 춰요. 진정한 제 적성을 찾았네요.”

대꾸 대신 공작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마에 뜨겁고 촉촉하고 간질간질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응?’

알레스는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내려앉은 감촉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알레스는 눈을 반짝 떴다.

뭐예요? 살짝 흔들리는 공작의 눈동자를 향해 입모양으로 물었다.

“칭찬?”

공작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레스는 그제야 목덜미까지 달아올랐다.

‘후아…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잖아.’

알레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다 비로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발이 공중에 살짝 떠 있는 게 아닌가.

미풍을 타고 살랑살랑 공중을 떠다니는 꽃잎처럼 공작과 알레스 두 사람은 잔잔한 바람의 스텝 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지금껏 상상 댄스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뛰어난 상상력이 아닌 뛰어난 마력의 산물이었던 것!

알레스는 공작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마력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낭비라니요. 금욕주의자로 유명한 내겐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알레스와 함께할 때만 쓰는 마력 구두쇠한테 말입니다.”

“그런 이상한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예요?”

알레스는 기가 차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공작이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아니 의외로 너무나 어울리게.

이제 저렇게 느끼한 말도 하고 스스로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공작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 알레스는 그것만큼은 마음이 놓였다.

너무 자유로워진 나머지 제국 최고의 자유로운 영혼인 카르티에처럼 되면 곤란하지만.

자신에게 계속 청혼하겠다는 무모한 고집만 버리면 공작이 행복해지는 일도 머지않은 것 같았다.

알레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축음기의 음악이 멎었다.

그들의 첫 커플 댄스도 무사히 막을 내렸다.

“즐거웠습니다.”

공작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알레스도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어찌됐든 첫 춤을 함께한다는 공작과의 약속을 지켰다… 고 하기엔 뭔가 많이 찜찜했지만, 한고비는 넘겼다며 알레스는 안도했다.

기분 상으로는 이제부터 맥주를 들이켜야 할 것 같았다. 고된 노동 후의 위로 한 모금?

“시간이 꽤 늦은 것 같군요.”

식탁으로 돌아온 후 공작이 말했다.

“아쉽지만 이제 슬슬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알레스도 조금 지쳐 보이고요.”

긴장이 풀려서인지 알레스는 의자에 기대 앉아 조금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그래야겠죠.”

“오늘 즐거웠습니다. 페레티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를 이용하고도 청혼에 실패한 매우 흔치 않은 예로 기록되겠지만.”

공작이 조금 짓궂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 끝난 것 같잖아요.”

알레스가 회심의 미소를 숨기며 말했다.

“예?”

“제가 알기로는, 프러포즈 패키지의 순서 중에 아직 남은 게 있는데요?”

“그렇습니까.”

“그 순서가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청혼을 거절해 놓고 이걸 공작에게 꼭 시켜 보고 싶은 고약한 심보는 무엇인지.

이건 벌이라고 해두자.

이루어질 수 없는 청혼을 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한 죄.

하필 몸치에게 첫 춤이라는 대가를 요구해 마음고생 시킨 죄.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춤을 즐길 수도 없는데 괴롭도록 가슴 설레게 한 죄.

그리고 너무 아름답게 웃은 죄.

죄 많은 자에게 이것으로 벌을 주겠어요.

“남아 있는 순서는 사랑의 세레나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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