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무조건 성공할 청혼
고소한 맛과 냄새로 무장한 치킨 앞에서 침샘이 폭발한 게 아니라 영지민 생각에 눈물샘이 터진… 은 좀 과장이고 눈시울을 붉히는(이마저도 과장) 영주라.
우리 영지민들이 기름진 음식을 차암 좋아하는데, 하면서.
월급날 통닭 사 오시던 그 시절 아부지도 아니고.
“설마 1인 1치킨이라도 쏘시게요?”
알레스는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북부에 가서 치킨집을 열어 돈을 쓸어 담아야겠….
아니, 아니지. 지금 이렇게 말려들 일이 아니잖아.
맛있는 치킨을 먹으며 생각나는 사람이 영지민입니까?
아무리 그 동네가 영주랑 영지민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지만….
오 세상에. 아이쿠 놀래라.
공작의 마음속에 계신 그분, 아직은 서로 허락하지 않았지만 곧 공작의 고백을 받고 웬만하면 허락하시게 될 그분, 곧 페레티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를 경험하게 될 그분, 부디 마음 단단히 먹으소서.
“1인 1치킨 가능하겠습니까?”
공작이 반색을 하며 알레스에게 물었다.
그걸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으십니까?
“물론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날, 영지 전체가 기뻐할 만큼 경사스러운 날에 1인 1치킨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방금 궁서체로 말했어. 공작은 이 일에 진심인 거다.
모든 영지민을 대상으로 1인 1치킨 지급 정책이라니.
제국 역사상, 아니 저쪽 세상까지 통틀어도 전례에 없던 일이 될 거야.
튀김용 닭 수급에는 문제가 없을까?
치킨은 식기 전에 바삭하게 먹어야 하니까 동네 단위로 튀김 본부를 설치해 즉석에서 튀겨 주어야 하나?
아, 나도 참. 이걸 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알레스는 이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가능한 일 아닌가? 꼭 안 된다고 할 순 없지 않나? 잘하면 괜찮은 장사 같기도 한데?
훌륭한 사업가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도전하는 사람 아닌가!
“저, 카이트, 대체 언제 나눠 주고 싶은 건데요? 1인 1치킨을 돌릴 만큼 경사스런 일이 뭔데요?”
어느 새 말려든 알레스가 흥미를 보이자 공작도 눈을 빛내더니 엉뚱한 걸 물었다.
“알레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인가요?”
“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야 빵이랑 과자랑 달달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치킨도 좋아하는 음식 중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하죠.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게다가 맥주라는 가벼운 술과 어울리니 경축일에 매우 적합한 음식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렇긴 하죠. 기쁜 일엔 치킨 파티! 좋네요. 앞으로 홍보 문구로 써야겠어요. 그런데 제 식성은 왜요?”
알레스의 질문에 공작의 눈빛이 뭔가 각오한 듯 결연해졌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매우 기쁘고 특별한 일이란, 결혼식입니다.”
“…….”
결혼식? 그녀와의 결혼식?
영지민에서 시작해 돌고 돌아 결국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나지?
알레스는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영지민에게 치킨을 돌리시겠다 이 말씀?
그만큼 일생일대의 경사란 말이렷다!
영지민 시월드여, 제발 나의 사랑스런 아내를 예쁘게 봐 주오, 뭐 이런 뇌물인가?
공작이 사랑하는 신부를 맞아 입이 찢어질 때, 나는 어두컴컴한 주방에서 기름 냄새를 뒤집어쓴 채 수백수천 마리 치킨을 튀겨야 한단 말인가!
먹을 줄만 알았지, 지금껏 한 번도 직접 튀겨 본 적 없으면서 알레스가 분개했다.
“물론 결혼식 이전에 청혼을 하고 결혼 승낙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뭐, 저희 페레티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를 이용하시면 되겠네요.”
알레스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럴까 합니다.”
공작이 넙죽 받아 챙겼다.
알레스 자신이 권했고, 상단에도 좋은 일이고, 따지고 보면 무엇 하나 잘못된 것 없는 합리적 의사결정인데.
덥석 받아먹는 공작이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모르겠다.
“오늘 분위기 좋았잖아요? 이 정도면 문제없이 청혼에 성공하실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공작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알레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오늘 사전 답사차 오신 거군요.
행여나 청혼에 실패하면 아주 나를 잡아 잡수시겠어요.
“네, 자신 있어요! 청혼에 성공하실 거라 장담합니다.”
이럴 땐 무조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고객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알레스가 큰소리 뻥뻥 치자, 공작의 얼굴에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미소가 지나갔다.
“알레스.”
공작의 중저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을 때, 알레스는 그의 심해 같은 눈에 자신이 비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댕딩댕딩댕댕딩.
귓가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꽃미남 마부들이 은종을 들고 혼신을 다해 흔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청혼자가 청혼의 말을 건네는 순간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프러포즈 패키지의 클라이맥스였다.
“네…에?”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댕딩댕딩댕댕딩.
저놈의 종소리 빼 버려야 할까 보다.
“잠깐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레스에게 청혼했습니다.”
“치킨 먹다 갑자기요?”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분위기도 좋았고 무조건 청혼에 성공할 거라고 장담하는 말도 들었거든요.”
“…….”
“알레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는 다시 한번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심해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말도 안 되잖아요.”
“청혼이 말입니까?”
“청혼도 그렇고, 청혼 상대도 그렇고. 설마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혹시나 대리 연습?”
“그럴 리가.”
하긴, 청혼으로 장난을 친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가만두지 않겠지만.
나에게 청혼한대도 가만두지 않을 거고, 남에게 청혼한다면 더더욱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아, 카이트 왜 나에게 청혼한 거예요?
당신을 좋아하기에, 정말로 좋아하기에 너무나 괴로워요.
수많은 감정과 변명과 핑계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내가 줄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알레스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차마 공작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실망하고 있을까?
꽃미남 마부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세상에 가득하던 축복의 소리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방이 정적에 잠긴 듯했다.
공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알레스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누가 봐도 카이트와 저는 어울리지 않잖아요.”
“내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얘기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아아니, 카이트가 부족하긴 뭐가 부족하겠어요. 누가 봐도 내가 부족하지. 카이트에게 좀 더 어울리는 훌륭한 영애와 결혼하셔야죠.”
“내게 어울리는 훌륭한 여자? 그걸 누가 판단하죠?”
“아이 참, 귀족은 짊어져야 할 의무라는 게 있잖아요. 특히나 대 메르세데스의 공작이라면 더더욱. 책임져야 할 가문과 영지가 있고 당신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 빛나는 자리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에요.”
“내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당신이 그 자리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지민들도 분명 당신을 좋아할 겁니다. 물론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서 당신에게 청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알레스가 공작의 말을 끊었다.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전 몰락한 가문의 이혼녀예요. 많고 많은 레이디 중에 굳이 그런 여자와 결혼하실 필요 없잖아요. 한미한 가문이나 이혼녀란 점을 제외하더라도 저에겐 결점이 많아요.”
“필요 때문에 결혼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결점은 내게도 많아요.”
“괜히 맞춰 주지 않으셔도 돼요. 카이트가 무슨 결점이 많다고….”
“저주에 걸린 건 매우 큰 결점이 아닌가요? 뻣뻣하고 고지식한 데다 재미없는 책을 쓰지요.”
“이제 저주마저도 풀렸잖아요. 앞으로는 행복해지도록 하세요.”
“행복해지려는 겁니다. 그러려고 당신에게 청혼한 겁니다.”
알레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트의 마음은 알아요. 오래전 제 부모님이 당신에게 자그마한 선의를 베푸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은인의 딸이라서 챙겨 주고 싶은 마음, 선의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모두 이해해요. 카이트처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 하지만….”
선대 페레티 백작이 베푼 선의가 이런 식으로 돌아온 거라면, 그거야말로 공정하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누릴 행운이 아니었다. 자신은 진짜 페레티 영애도 아니니까.
이번엔 공작이 알레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선대 페레티 백작 부처께 보은하고 싶고 그분들의 선의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건 모두 내 진심입니다. 그분들의 영애인 당신을 각별하게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런 이유로 당신에게 청혼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주제넘고 무례한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왜 나에게?
“어쨌든 제가 받을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분수는 좀 안답니다.”
“그래서 당신의 대답은 거절입니까?”
“거절이라는 말도 적합지 않네요. 제겐 당신을 거절할 자격도 없어요. 거절이라기보다 당신이 잘못된 청혼을 거두어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공작의 심해안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정하면서도 조금 쓸쓸한 듯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첫 청혼은 거절당할 각오를 했습니다.”
첫 청혼이라니요? 그다음 청혼이라도 있다는 듯한?
“반드시 성공할 거라던 말에 솔직히 조금 기대하기도 했지만.”
큰소리 땅땅 쳤던 게 떠올라 알레스는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알레스, 거절하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싫으면 그냥 거절하면 돼요.”
싫은 게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내 모든 결심이 흔들려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알면서, 그 청혼이 다른 사람을 향한다면 그 또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알레스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못된 년은 될지언정 못난 년은 되지 말자 다짐했거늘.
두려움에 떠는 알레스에게 공작은 평소답지 않게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번엔 더 잘해 보겠습니다.”
“네? 무엇을?”
“청혼이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거절해도 좋습니다. 인생은 여러 번 청혼할 만큼은 충분히 기니까요.”
몇 번이고 퇴짜를 맞는다 해도 당신에게 했던 모든 청혼은 고약하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청혼을 거절당한 내 아픈 마음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으로 달래야겠군요.”
그가 알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