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당신의 살 취향은?
“이옷오오옷!”
알레스가 괴성을 질렀다.
아무래도 깜빡 공작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나와 너, 치킨뿐. 어떠한 찬미도 부끄럽지 않아!
프러포즈를 받는 레이디들이 전부 알레스 같은 먹보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지글지글 기름 소리를 내며 치킨이, 뽀글뽀글 기포 소리를 내며 맥주가 식탁에 등장했다.
사람 잡을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카이트랑 꼭 함께 먹고 싶었어요.”
알레스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혼자서도 환장을 하고 잘만 먹었겠지만.
치킨과 맥주는 원래 힘 쓴 후 먹으면 더욱 맛있게 흡수되는 법.
아까 3차 급정차 구간에서 몸을 많이 썼으니까.
“이 요리가 제국을 휩쓴 화제의 주인공 치킨이군요. 맥주의 친구라던.”
공작이 식탁 위에 놓인 황금빛 찬란한 음식들을 보며 말했다.
얼핏 생각하면 하필 저돌적으로 뜯고 들이켜야 하는 치맥이 프러포즈 자리에 어울리나 싶지만, 지금 제국에서 치맥은 가장 핫하고 힙한 트렌드였다.
지난 축제 이후로 제국 전체에 치킨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페레티 공유 마차에서 먹을 수 있는 치킨엔 ‘원조’라는 말이 붙었다.
같은 치킨이라도 꼭 여기서 먹고 싶다며 긴 줄이 생겨나곤 했다.
그러므로 콧대 높은 레이디에게 프러포즈를 한다면서 요즘 최고로 핫한 명품 요리를, 그것도 원조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청혼자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카이트, 마음에 드는 부위를 골라 보세요.”
공작은 과연 야들야들한 살을 좋아할 것인가, 퍽퍽 살을 좋아할 것인가.
알레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함께 치킨을 먹을 때 그 살 궁합은 매우 중요했다.
한 사람은 다리나 날개 같은 촉촉 살을, 한 사람은 가슴 같은 퍽퍽 살을 좋아할 때 가장 유쾌하고 조화롭게 치킨을 즐길 수 있었다.
둘 다 촉촉 살을 좋아하는데 한 사람이 눈치 없이 다리 두 개를 먹어치운 바람에 헤어진 커플도 있다지 않은가.
알레스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각했다. 그 커플은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길 잘했다고.
그건 배려의 문제이지 않은가?
원래 촉촉 살이 나의 취향이더라도 상대방 역시 촉촉 살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챈 순간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여겼던 내 취향마저 슬그머니 퍽퍽 살인 척 바꾸는 것.
그래서 애정하는 닭다리 두 개를 모두 상대방에게 밀어주면서도, 좋아하지도 않는 퍽퍽 살을 입에 욱여넣으면서도 기꺼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냐고!
물론 이보다 더 좋은 건 서로의 살 취향이 반대라서 누구 하나 희생하지 않아도 모두 즐겁게 치킨을 먹는 것이겠지만.
이런 걸 두고 치킨 궁합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공작과 나의 치킨 궁합은 어떠할 것인가. 둘이 사랑할 건 아니지만. 그냥 재밌잖아?
연예인 오빠랑 궁합 같은 건 괜히 왜 보겠어? 가능성 없어도 궁금하니까!
참고로 알레스의 살 취향은 불도저 대식가답게 퍽퍽 살이다.
알레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공작의 선택을 기다렸다.
공작은 처음으로 실물 영접한 치킨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부위를 포크로 콕 찍었다.
치킨은 김이 펄펄 나는 걸 손으로 들고 뜯어야 제맛인데, 여기 귀족들에게 그것까진 무리일 것 같아 포크로 먹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알레스는 이 점이 매우 유감스러웠다.
공작이 고른 부위는 일단 촉촉 살.
알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어 매야 했을 만큼 괜히 흐뭇했다.
치킨을 처음 접한 공작이 자신의 살 취향에 제대로 눈을 떴을까마는, 어쨌든 퍽퍽 단단한 살코기보다는 야들야들한 살결에 본능적으로 더 끌린다는 거 아니겠는가.
어, 그런데 잠깐. 공작이 고른 것은 촉촉 살 중에서도 작고 앙증맞은 윙.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알레스는 저쪽 세상에서라면 식상하다고 면박당할 농담을 시도했다.
“어머나, 카이트. 닭 날개를 고른 거예요? 저런저런.”
알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잘못 고른 겁니까?”
“아니요, 잘못 골랐다기보다는…. 진짜 프러포즈 자리라면 곤란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네요.”
공작의 얼굴이 살짝 긴장되는 걸 보고 알레스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닭 날개를 먹으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다른 때야 크게 상관없겠지만 다음에 정말로 프러포즈하실 땐 주의하세요.”
“이유가 뭡니까?”
공작이 미간까지 좁히며 엄숙하게 묻자 알레스는 멈칫했다.
또또또, 웃자고 한 말을 죽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네.
“이유라면 아무래도… 날개니까 훌쩍 날아가 버리는 게 연상돼서 그런 것 아닐까요. 이 여자 저 여자한테로 팔랑팔랑 옮겨 다니는 거죠.”
“조금 억울한 이유로군요. 살이 적은 만큼 바삭해 보여서 골랐는데. 작아서 먹기도 편할 것 같고요.”
굳이 해명을 늘어놓는 공작의 모습에 알레스는 다시 한번 입꼬리에 힘을 줬다.
“닭 날개처럼 야들야들한 살엔 지방이 적당히 섞여 있어 먹으면 실제로 피부가 야들야들해지고 윤기가 돌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피부 미용에 좋은 날개를 먹고 피부가 환해지면 주변에 이성이 모여들게 된다는 뜻 아닐까요?”
“닭에는 날개가 두 개 있으니까 연인끼리 하나씩 나누어 먹으면 되겠군요. 같이 먹고 같이 피부가 환해지면 서로에게 반하게 되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래요, 그래. 알았다고요. 열심히 궁리하셨네요.
알레스가 이제 그만 공작을 놀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공작이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연 것은.
“또한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바람이라는 건 서로 허락한 연인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것 아닙니까? 저에게는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예에, 예에, 알겠고요.
당신이 도덕책 공작에 잔소리 오라버니라는 걸 잠시 잊었네요.
그런데 당신의 그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 놀려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어쩌죠?
알레스가 속으로 짓궂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지금 연인이 없으시니까 닭 날개를 마구 드시고 여러 레이디에게 둘러싸여 희희낙락하셔도 바람둥이는 아니다, 그 말씀이신가요?”
역시 예상대로 공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알레스의 말엔 여러모로 어폐가 있군요. 우선 여러 레이디에게 둘러싸여 희희낙락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날개를 좋아하면 바람둥이라는 말에도 논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고.”
또…, 하며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알레스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지금 연인이 없다는 말이 틀렸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알레스는 공작의 폭탄선언에 할 말을 잊었다.
연인이 있다고?
“물론 서로 허락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애석하지만 말입니다.”
“…그건, 카이트 혼자 마음에 품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고백은 해 보셨나요? 실은 상대방도 카이트를 좋아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좋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누군가 카이트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고백을 해 보려고 합니다.”
“결심하셨군요.”
“알레스가 말했잖아요. 행복해지라고.”
그랬지. 내가 그런 주접을 떨었지. 기분이 왠지 묘하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었는데 왜 더 불안하고 초조한 걸까요? 욕심이 지나쳐서일까요? 물론 이 불안감이 꼭 싫지만은 않습니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조금 낯설 뿐이지요.”
알레스는 치킨을 앞에 두고 갑자기 훅 들어온 공작의 연애담에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런, 수다 떨다 치킨이 다 식겠어요. 일단 그 날개 맛부터 보세요. 너무 황홀해서 바람 타고 날아가 버리실 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알레스 본인도 치킨을 향해 달려들었다.
취향인 가슴살을 결대로 주욱 찢어 입에다 양껏 쑤셔 넣었다.
“맛있어!”
호들갑스럽게 감탄도 했다.
그러나 사실 알레스는 속으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치킨이 별로 맛있지가 않았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었다.
몸이 바뀌면서 입맛이 바뀐 걸까? 취향이 바뀐 걸까?
하지만 지난번에 먹었을 때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스러운 맛이었는데?
알레스는 기계적으로 입을 오물거리면서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우리 건배해요, 카이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축하할 일이잖아요!”
그야말로 고장 난 로봇처럼 허우적거렸다.
공작은 얼결에 같이 잔을 들면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알레스를 보았다.
“조금만 드시는 겁니다. 지난번처럼 무리하면 곤란합니다.”
지난번에? 맞아, 소로 부부가 만든 맥주를 시음하고 고꾸라지는 추태를 보였지.
알레스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는 좀 피곤해서 그랬어요. 평소엔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알레스가 부득부득 우기자 공작이 빙긋 웃었다.
“치킨과 맥주는 친구라더니, 알레스 말대로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치킨은 맛이 어떠셨어요?”
“놀라운 맛이었습니다. 고소하고 담백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금과 양념들이 맛을 섬세하게 잡아 주고 있는 느낌? 내가 알고 있는 닭요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군요.”
공작은 치킨을 맛본 소감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입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사실 맛이 없을 수 없지만.”
이 치킨에 이 맥주, 이 조명과 야경이면 끝인 거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이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자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군요.”
공작이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구? 그 좋아한다는 여자?
하긴 맛있는 걸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긴 하겠지.
그 사람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고.
나로서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일이지만, 이해의 폭을 넓혀 보면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이지.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입이 쓰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알레스는 씁쓸함을 삼키며 공작에게 물었다.
“누가 생각나시는데요?”
그럼, 페레티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를 이용하세요.
공작님껜 특별히 프리미엄을 붙여서 비싸게 받을게요.
“카이트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저희가 잘 준비해 드릴게요. 말씀해 보세요.”
“잘해 주실 건가요?”
“네, 그럼요.”
걱정 붙들어 매시라니깐.
“이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보고 있으니 메르세데스의 영지민들이 생각납니다. 성에 계신 제 스승과 기사단장도 떠오르고 가신들도 떠오르고요. 나에겐 가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알레스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시다시피 메르세데스의 겨울은 매섭습니다. 그래서 추워지면 기름진 음식이 당깁니다. 영지민들이 이 치킨을 맛보면 얼마나 신기해하고 또 좋아할지. 남녀노소 행복한 얼굴로 먹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갑자기 분위기가 매우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