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영육의 연금술
퍽.
알레스는 양손으로 공작의 넓은 가슴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러곤 공작이 미처 어떠한 반항을 하기도 전에 그 가슴에 얼굴을 사정없이 묻었다.
“아아… 하아아….”
혼미한 정신으로 신음을 내뱉고 보니 자신의 숨결이 닿는 곳에 공작의 쇄골로 짐작되는 것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올라탄 딴딴한 것은… 공작의 허벅지?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알레스는 마차의 좌석에서 튕겨 나와 그대로 맞은편에 앉은 공작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살짝 날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 멀쩡하게 있다가 왜 날았느냐? 마차가 급정차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급정차한 이유는 도로에 이상이 있거나 앞에 무언가 나타났거나 차체에 문제가 생기는 등 돌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꽃미남 마부들이 척척척 눈빛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마차를 세운 것이다.
그것도 수개월 갈고닦은 실력으로 관성의 법칙이 최대로 작용할 수 있도록.
“아악!”
알레스가 비명을 내지른 것은 이미 몸이 멋대로 움직인 후였다.
방금 전 콰르토가 보낸 의미심장한 눈빛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에는 특별히 ‘영육의 연금술’이라 이름 붙인 급정차 구간이 있다는 사실도.
알레스는 한발 늦게 깨닫고 떠올렸다.
즉 이 급정거는 사고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를 설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카르티에 공작이었다.
「남녀 관계엔 스킨십이 반드시 필요하죠. 잔잔한 호감을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소용돌이로 바꾸어 놓는 연금술이랄까.」
공유 마차의 동업자이자 홍보 모델이면서 종신 VIP 고객인 카르티에 공작은 비릿하게 웃으며 이와 같이 조언했다.
처음 프러포즈 패키지를 기획하면서 페레티 상단은 난감한 벽에 부딪혔다.
상단주와 직원 모두 연애 세포 결핍인 데다 제대로 된 실전 경험 한번 없다는 것.
그래서 남녀 관계 전문가인 카르티에 공작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가요? 몸 좀 닿는다고 그런 이상 반응이 일어난다고요?」
「후후, 레이디, 몸정 맘정이란 말이 왜 있겠습니까. 스킨십을 우습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연인이 실제로 겪는 일이니까요.」
꼭 저 같은 생각이로군.
알레스는 당시 이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일단 전문가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페레티 공유 마차의 프러포즈 패키지에 마련된 ‘영육의 연금술’ 급정차 구간은 이처럼 인간의 심리에 기초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물이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공작의 가슴에 폭력적으로 얼굴을 처박고 하체를 무자비하게 짓뭉갠 알레스는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겨우 이런 말만 냅다 질러 놓았을 뿐이지만.
지난번 비탈에서 구르다 접촉사고를 일으켰을 때도 하필 자신이 공작 위에 있었기 때문에 괜히 억울했던 기억이 있었다.
공작이 일방적으로 당한(?) 모양새가 됐으니까.
그게 늘 마음에 걸렸던 알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잘못하면 상습범으로 오해받을 수 있잖아? 걸핏하면 사고를 가장해 스킨십을 시도하는 음흉한 여자로.
“재차 말하지만 오해 안 합니다.”
갑자기 봉변을 당한 데다 알레스가 신경질적으로 윽박지르기까지 하자 아무리 돌부처 같은 공작이라도 분했던 걸까.
그의 숨소리가 불안정하고 목소리가 전에 없이 떨렸다.
“그보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괜찮아요?”
금세 또 이렇게 다정한 천성이 비집고 나왔지만.
“죄송해요, 카이트야말로 놀라셨죠? 정말로 일부러 이런 건 아니거든요. 제가 피할 수 있었으면 어떻게든 피했을 텐데.”
알레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핫 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정신을 차렸으면 공작의 무릎 위에서 냉큼 내려오기부터 할 일이지 뭘 어물거리고 있는 거야?
공작은 공작대로 알레스가 소스라치는 걸 느끼고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안 좋습니까?”
알레스는 공작의 걱정 어린 눈빛을 외면하며 원래 앉았던 자리로 호다닥 돌아왔다.
겨우 한숨 돌리며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히려는 찰나.
알레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사무치게 절감하고 말았다.
“아악!”
이번에도 몸이 멋대로 나간 후에야 내지른 소리였다.
이번에도 한발 늦게 기억이 떠올랐다.
‘영육의 연금술’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끽끽끽, 3회 1세트.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카르티에의 조언에 따라 마의 급정차 구간을 총 세 군데로 준비했다.
절제력이 강한 사람의 경우 한 번의 접촉으로 극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나기는 어렵다는 게 카르티에의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첫 급정차 이후 이어지는 다음 급정차의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너무 곧장 이어져도 안 되고 간격이 너무 길어져도 안 됐다.
첫 번째 급정차 이후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로 돌아가 한숨 돌리려는 순간 생각지 못한 2차 급정차.
처음보다 더 당황해 허둥지둥할 때 2차 때보다 시간 간격을 좁혀 휘몰아치듯 3차 급정차.
매우 세심한 연구와 수차례의 임상실험(?)을 거쳐 완성된 3단 급정차의 과학이었다.
이런 교묘한 세 번의 대형 접촉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게 카르티에 남녀 관계 전문가의 호언장담이었다.
물론 이 과학의 실험쥐가 되어 호되게 당하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알레스였지만.
“아흐흑.”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자가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 공작의 목덜미와 가슴께를 적셨다.
그래도 불쾌해진 공작이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채 내던지지 않은 게 어디냐며 다행스럽게 생각해 보는 알레스였다.
그럼 공작은 상습 더듬녀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대신 뭘 하고 있을까?
알레스는 공작의 손길을 느껴 보았다.
공작은 한 손으로 알레스의 등을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알레스의 뒤통수를 포옥 감싸고 있었다.
마치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잘생긴 아기 아빠 같았다.
알레스는 가슴이 요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게 카르티에가 말한 화학반응, 호감이 욕망의 소용돌이로 변하는 연금술인 걸까?
알레스는 얼른 공작에게서 몸을 떼어내 제자리로 가려다 멈칫했다.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면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하는 팔푼이가 되는 것이지.
알레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공작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또 같은 해명.
“오해하지 마세요….”
공작은 고개를 기울여 알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킨십의 연금술에 각도의 마법까지 결합되니 이번엔 다른 의미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해할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알레스가 한 번 더 내게 날아왔다면 확실히 오해했을 텐데요. 조금 아쉽군요.”
공작의 말에 알레스가 눈을 껌뻑이는 사이 3차 급정차 구간이 지나갔다.
물론 이번엔 공작을 덮치지 않았다.
“농담이었는데, 재미없었습니까?”
“네.”
“연습을 좀 더 해야겠군요.”
긴장이 풀린 알레스는 공작의 팔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 스킨십은 영육의 연금술을 불러오진 않겠지.
하지만 그건 알레스 생각이었고 공작은 그녀의 앙증맞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눌러야 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 그때 생각이 나네요. 제국 최초의 맥주를 시음하러 갔을 때 말이에요.”
“아, 그때 말입니까.”
“마차가 좁아서 강제로 꼭 끼어 앉았잖아요. 지금은 마차가 이렇게 넓은데도 붙어 있네요.”
“좋군요, 이런 것도.”
“아까도 똑같은 말씀 하신 거 기억하세요?”
“그랬습니까?”
“듣기 좋다는 얘기예요. 똑같은 말을 할 상황이 카이트에게 자꾸만 생기면 좋겠어요. 세상엔 이런 기쁨도 저런 기쁨도 있다는 걸 카이트가 알게 되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좋군요, 알레스와 이런 얘기 나누는 것도.”
“생각보다 응용력이 좋으신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진심을 말한 겁니다.”
“뭐예요, 정말!”
공작이 자신을 흉내 내자 알레스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것으로 응징했다.
이 격의 없는 행동에 공작은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이것도 좋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알레스는 알까.
이런 것도 좋고 저런 것도 좋다고 새삼 깨닫는 건, 세상에 이런저런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돼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순간에 알레스가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레스가 곁에 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다른 빛을 띤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모르던 것들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긴 시간 이런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여전히 모른 채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인연을 맺어 주거나 갈라놓거나 엇갈리게 하는 힘이 궁금했다.
공작이 인간의 운명에 관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알레스도 스킨십의 과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손바닥과 뺨에 느껴지던 그 생생한 욕망의 꿈틀거림. 그 잊을 수 없는 감각.
아무래도 카르티에의 말을 믿어야 할까 보다.
스킨십은 영육의 연금술인 것으로.
그런데 말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욕망의 화학반응은 나한테만 일어난 겁니까? 정녕?
알레스는 평온해서 얄미운 공작을 향해 조용히 눈을 흘겼다.
* * *
마차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싣고 제도 외곽의 언덕을 향해 달렸다.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제도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언덕이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리면 제도 번화가의 불빛들이 아름답고 화려한 점묘화를 선보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감성적이 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마침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꽃미남 마부들이 식탁과 의자를 설치하고 조명과 난방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실은 프러포즈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줄 조명에 특히 공을 들였다.
가뜩이나 비싼 조명 마도구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느라 비용도 많이 썼고.
본격적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 조명의 역할은 특히나 중요했다.
게다가 지금은 쌀쌀한 계절이라 난방 마도구도 필요했다.
이 모든 번거로움을 무릅쓰며 굳이 야외를 고집하는 이유는….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치맥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추울수록 치킨은 더 고소하고 맥주는 더 톡 쏘니까!
치맥의 프러포즈를 거부할 수 없는 알레스였다.
“이건 내가 도움을 주어야겠군요.”
공작이 분주한 마부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하더니 직접 조명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알레스가 춥지 않도록 작지만 화력이 좋은 모닥불도 지폈다.
‘아, 불 계열 마법.’
알레스는 푸른 불꽃의 고결이 강연회 때 손끝에 불을 만들어 내고 환청과 환각을 만들어 내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도 신기했는데, 지금은 온기까지 있는 진짜 불을 만들어 냈다.
공작이 마법 능력자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