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좋군요, 이런 것도
“아가씨, 날이 무척 좋습니다.”
방문을 두드린 마사가 머리를 디밀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날도 좋은데 예쁘게 단장해 드릴게요.”
팝콘을 먹으며 눈사람을 그리고 있던 알레스가 탁자에서 눈을 들었다.
“갑자기? 날 좋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이 참, 기분 전환 아닙니까.”
“별로 기분을 전환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요, 기분 전환.”
“이상한 취미네.”
“아가씨는 그냥 가만히 앉아 계세요. 제가 재주껏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왜 이래? 무섭게.”
“이렇게 탐스러운 머리칼을 그냥 내버려 두기가 얼마나 아까운지 아세요? 안 그래도 작고 고운 얼굴에 입술연지나 볼연지만 조금 발라도 얼마나 생기가 도실지! 마르신 편이니까 속옷이나 드레스 디자인으로 볼륨을 조금 더 업….”
“마사, 왜 남의 걸 아까워하고 그러지? 그보다 남의 걸 꾸며서 기분 전환이 되겠어? 내가 보기엔 마사의 얼굴과 머리에 해도 충분한 일 같은데.”
“아이 참, 제 솥단지 같은 얼굴은 꾸며서 뭐 합니까. 왜 자꾸 딴소릴 하셔요.”
“기분 내고 싶은 거 아냐? 나한테도 별건 없지만 화장품이나 향유가 필요하면 팍팍 갖다 써. 어차피 오래 두면 안 좋대.”
“아가씨, 직분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제가 아가씨를 단장해 드리기 위해 얼마나 실력을 갈고 닦았는지 아세요? 본분을 다하고 보람을 느낄 기회를 주셔야지요!”
“다른 할 일도 많으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그런 건 대체 언제 갈고 닦은 거야? 왜 하필 거기서 보람을 찾으려는 거고? 아무래도 다른 업무를 더 배당해야겠어.”
마사가 기진맥진해진 얼굴로 가슴을 팡팡 쳤다.
“아니, 이렇게 입씨름할 일입니까? 아가씨 단장 한번 해 드리려다 제가 늙겠습니다.”
“맞아.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면 사람이 일찍 늙는대. 그리고 방금 거리에서 영애들이 끼악끼악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카르티에 알람이 울렸으니 오후 3시가 넘었다는 거 아냐.”
“그게 왜요?”
“이제 업무 몇 가지 처리하고 나면 어둑어둑해질 테고, 저녁식사 하고 나면 곧 잘 시간일 텐데, 이제 와서 단장은 뭐 하러 해?”
알레스의 지적에 마사가 멈칫하더니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편히 앉아 계시면 된다니까요. 눈사람 그리시던 거 계속 그리시고 하시던 일 계속 하시면서요.”
“아 싫다니까 그러네.”
“아가씨!”
“아우 귀야.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마사?”
알레스가 매우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마사를 째려보고 있을 때였다.
마사에 이어 헤라클레스가 방문을 두드렸다.
왠지 기분이 붕붕 떠 보이던 마사와 달리 그는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마님, 밖에서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
의아한 얼굴로 물은 알레스는 마사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사, 눈은 왜 피하는 거지?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이시긴 한데….”
“그래? 안으로 모시지 않고?”
“그것이… 혼자 오신 게 아니라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황자 전하와 같이 오셨나? 무슨 일이시지?”
마사가 답답하다는 듯 헤라클레스를 옆으로 밀치며 재촉하고 나섰다.
“공작 전하가 기다리고 계신다니 일단 내려가 보시지요.”
“알았어. 그러지 뭐.”
“참, 아가씨 잠깐만요.”
마사가 후다닥 사라졌다가 하얀 털이 보슬보슬한 코트와 함께 나타났다.
“날이 제법 추워요. 따뜻하게 입으셔야 해요.”
“으응? 바로 집 앞에 나가는데 무슨. 마사, 평소 같지 않게 왜 이리 과보호 모드지?”
“어머,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저는 자나 깨나 아가씨 걱정뿐이라고요. 말 나온 김에 머리 장식 하나만 달아요, 아가씨.”
마사는 평소 사용하지도 않는 보석 머리핀을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스윽 꺼내더니 알레스의 머리에 야무지게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알레스의 머리카락에 향유를 바르고 귓가와 목덜미에 향수까지 뿌렸다.
정말이지 타짜도 울고 갈 전광석화와도 같은 손놀림이었다.
‘카이트한테 잘 보이길 바라는 건가? 새삼스럽게….’
알레스는 마사의 식지 않는 정성에 혀를 내두르며 공작이 기다린다는 집 앞으로 나섰다.
‘이래서 혼자 온 게 아니라고 했구나.’
공작은 엄밀히 말하면 단독으로 온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일부로서 알레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유 마차가 왜…?”
“알레스, 나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샤랄라하게 꾸민 마차의 외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수수하게 입은 꽃미남 마부들, 마차 밖까지 풍겨 나오는 꽃향기, 곧 석양이 질 시각….
이건 공유 마차의 맞춤 서비스 중에서도 프러포즈에 특화된 패키지인 ‘핑키 허니 패키지’!
공작과 마사가 이런 작당을 했을 줄이야.
알레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마차를 바라보자 공작이 다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가 받으러 왔습니다. 알레스의 첫 춤이요.”
카이트, 발목이 깨끗이 낫길 기다렸다가 다시 발목을 부러뜨리려는 건 아니죠?
“알레스는 공유 마차를 고객으로서 누려 본 적이 없지요?”
본인은 정작 비좁고 낡은 마차를 타고 다니잖아요.
공작은 ‘다정한 릴리 마를렌의 집’에 맥주를 시음하러 갔던 날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직접 경험해 보는 건 다를 수 있지요. 고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알레스가 직접 타 보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그럼, 가실까요?”
마차에 오른 알레스는 공작과 마주보고 앉았다.
작은 테이블에 천타빵과 말편자 빵, 커피 ‘키스 오브 카르티에’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커피는 밤비 경이 디자인한 머그컵에 담겨 있었다.
프러포즈 패키지에 나오는 머그컵은 커플 머그컵이었는데, 컵 안 바닥에 연인의 이름을 새겼다.
커피를 다 마시면 그 은밀한 이름이 드러나도록.
프러포즈에 성공하면―공유 마차 프러포즈는 99.9%의 성공률을 자랑했다―그 머그컵은 선물로 제공됐다.
알레스는 머그컵 안에 담긴 커피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설마 이 안에 카이트의 이름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번 탑승은 시찰 같은 건데 말이야.
호기심에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우아하게 커피 향을 음미하는 척했다.
마차 안은 추위에 강한 동백과 흰색, 연분홍색의 제라늄으로 로맨틱하게 장식돼 있었다.
마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알레스를 바라보던 공작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려한 비에커가의 풍경이 창밖으로 느긋하게 흘러갔다.
알레스는 천타빵을 오물거리면서 안 보는 척하며 공작을 흘끔거렸다.
어쩜 눈코입이 전부 그린 거처럼 완벽한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웃음이 나오고 긍정 에너지가 샘솟는, 삶의 탄수화물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빵을 볼 때만 느끼던 감정을 사람의 얼굴에서도 느낄 수 있다니.
알레스는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미쳤나 봐. 진짜 프러포즈 받는 줄 아나 봐.
넋 놓고 있지 말고 서비스에 빈틈은 없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새롭게 더할 아이디어는 없는지 샅샅이 살피란 말이다!
알레스는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손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건 오히려 추운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니까.
메르세데스식 빙수인 ‘눈 여왕의 궁전’을 이제 공유 마차에서 선보이도록 하자.
추가할 시럽은 일단 다섯 가지 중에 고르는 것으로 하고.
카이트를 모델로 세운 지역 관광 홍보 포스터를 마차 내부랑 외벽에 부착하고….
아, 헤라클레스를 들볶아서 만든 메르세데스 특산 과자도 개시해야겠다.
메르세데스의 눈 덮인 전나무를 형상화한 머랭쿠키!
깨끗한 눈을 살풋 베어 문 것처럼 가벼운 식감과 사르르 녹는 달콤함!
예상지 못한 천상의 맛에 다들 깜짝 놀라겠지? 이건 ‘얼음왕자의 미소’라고 이름 붙여야 하나?
“좋군요, 이런 것도.”
일에 집중한 나머지 입술이 점점 앞으로 튀어나와 새 부리처럼 된 줄도 모르고 열심히 메모하던 알레스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음왕자가 머랭쿠키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지요. 카이트도 가끔 이런 여유를 즐기세요. 인생 뭐 있나요?”
“재밌는 말이군요. 그런데 정작 알레스는 일에 너무 몰두하느라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 같군요.”
“아, 실례했어요. 곧 메르세데스령 홍보를 시작할 참이라서요.”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별말도 아닌데 공작의 눈빛이 지나치게 그윽해서 알레스는 입에 침이 고였다.
침 넘기는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적당히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검은 액체가 모두 알레스의 입 안으로 사라지자 컵 안에 마법처럼 등장한 이름.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알레스는 하마터면 막 삼킨 커피를 뿜을 뻔했다. 참느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슬쩍 바라본 공작은 마침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느긋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설마설마 공작이 들고 있는 저 머그컵의 바닥에는 내 이름이?
알레스는 어색하고 민망한 나머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오소소 돋으려 했다.
마사와 밤비, 가만 안 둘 거야.
커피를 다 마신 공작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멈칫하더니 곧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역시 웃는 얼굴이 예뻐.
황망한 와중에도 알레스는 생각했다.
평소의 공작을 생각하면 웃는 법이나 알까 싶지만, 비에커가에서 추격전을 벌인 후 처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줄곧 같은 생각이었다.
웃는 얼굴이 소년 같고 가슴 설레게 예뻤다.
‘정말이지 감성 목석인 나나 되니까 이 정도지. 다른 사람한테 저런 미소를 보였다간 딱 고소감이지.’
익숙지 않은 달달한 분위기에 알레스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꽃미남 마부 중 넷째인 콰르토가 마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레이디, 커피잔과 빵 접시를 좀 정리해 드릴게요.”
멍뭉미를 담당하고 있는 콰르토가 해맑은 표정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래, 그 요망한 머그컵은 싹 치워 버리는 게 좋겠어.
알레스가 반색하는데, 공작은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
“그 커피잔은 어디로 가는 건가?”
“이 커플 머그컵 말씀입니까. 성공하시면 두 분께 선물로 드립니다. 전하, 꼭 성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아, 커플 머그컵이라고 부르는군.”
콰르토, 그 친절한 입 다물라.
알레스는 얼른 갖고 사라지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 접수됐는지, 콰르토도 의미심장한 눈빛을 알레스에게 쏘아대는 게 아닌가.
‘왜 저러지?’
알레스는 의아한 눈으로 그가 다과를 치우는 걸 바라보다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흔남 마부가 아닌 꽃미남 마부 옵션을 선택했네?
꽃미남 마부야 공유 마차 서비스의 말 그대로 꽃이었으나, 아무래도 영식들이 주로 예약하는 프러포즈 패키지에서만은 배척을 당해 왔다.
하지만 카이트는 자신 있으니까?
인정의 의미로 혼자 빙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알레스는 다음 순간 콰르토의 눈빛이 무슨 뜻이었는지 와르르 깨달아 버렸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