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쁜 버릇이 들었다
손에 이어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알레스의 발을 내려다보던 공작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걸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미안해요. 이렇게 된 탓에 약속도 못 지키게 됐네요. 첫 춤… 말이에요.”
“지금 그게 문젭니까.”
“그래도요. 카이트가 제게 부탁한 거라곤 겨우 그거 하난데….”
“춤은 언제든 다시 출 수 있습니다.”
안 춘다는 말씀은 결코 안 하시는군요. 이럴 때는 괜찮다고 하셔도 되는데….
알레스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
“그럼 한 번 더 실례하겠습니다.”
공작이 다시 알레스를 안아 올렸다.
조금 더 능숙하게 공작의 목에 매달린 알레스가 물었다.
“이대로 방을 나서면 지나친 관심을 받을 텐데요? 가면이라도 다시 써야….”
“알레스, 잊었습니까?”
“네?”
“난 원래 문보다 창문이 더 편합니다.”
“아…. 그런데 여기 몇 층이었죠?”
“끼아아악!”
혼비백산한 알레스의 비명소리가 황궁의 정원을 뒤흔들었다.
별궁과 무도회장 가득 넘실대는 음악 소리 덕분에 비명소리가 담을 넘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어흑흑.”
“미안합니다. 경공술을 쓰고 최대한 꼭 끌어안아 충격을 완화했는데, 부족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말하자마자 뚝 떨어지는 게 어딨어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알레스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사납게 소리쳤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상상하기 전에 뛰어내리는 게 공포감을 덜 줄 거라 생각해서…. 다 내 잘못입니다.”
“그래서요? 다 카이트 잘못이면 또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실 건가요?”
“알레스….”
알레스의 짓궂은 말에 공작이 얼굴을 붉혔다.
“또 꽁꽁 숨어 버리실 건가요?”
“그때 내가 했던 말은 부디 잊어 주었으면 합니다. 내 흑역사입니다.”
귀까지 빨개진 채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응답하는 공작을 보며 알레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이런 화제로 농담을 하고 공작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이 조금 감격스러웠다.
공작이 점점 더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는 듯해서.
이제는 그가 조금이나마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그리고 공작과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아서.
걱정은, 그가 편해진 나머지 자신의 버릇이 점점 나빠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안겨 다니는 것도 몇 번 해 보니, 공작의 품이 원래부터 자기 자리인 양 편하고 익숙해졌다.
‘점점 뻔뻔해진다니까.’
알레스는 공작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느낌이 너무도 편안해서 자세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따스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자장가처럼 그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영원히 얼굴을 딱 붙인 채 떨어지지 말까 보다.’
매우 나쁜 습관이 들고 말았다.
알레스가 공작의 품에서 음흉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도 공작은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에게선 어김없이 은은한 삼나무 향이 풍겼다.
알레스는 저도 모르게 이 넓고 따뜻한 가슴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염치없는 바람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신체 일부만 빌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누군가와 연을 맺는다는 건 꿈이 있고 감정이 있고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이 있는, 한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는 일일 텐데.
자신이 필요할 때만 머리를 기댈 수 있게 푹신한 쿠션이 되어 주길 바라는 건 매우 이기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건 한마디로 황제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일이지.’
알레스는 아까 무도회장에서 공작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기분이 이상했던 게 떠올랐다.
정말이지 고약한 심보가 아닌가.
솔직한 마음이지만, 솔직하다고 다 용서가 되는 건 아니라고, 알레스!
두서없는 생각에 이끌려 배회하는 동안 어느덧 마사와 밤비가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도착했다.
“어머, 아가씨!”
마사가 이상하게 환호성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질렀다.
무도회에 가신다기에 한껏 치장해 드렸더니….
풀어 헤친 머리에 얇고 단출한 옷만 남기시고 맨발인 채로 공작 전하의 품에 안겨 돌아오셨군요.
잘하셨습니다!
“발목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바로 의료용 마정석으로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의 말을 듣고 알레스의 멍든 발목을 본 후에야 마사는 기겁을 하며 걱정스런 얼굴이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와인을 든 영애들에게 당했어.”
“아니, 와인으로 드레스나 망쳐 놓으면 될 일이지, 어쩜 사람 발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대요?”
마사가 마정석으로 발목을 찜질하며 버럭 따졌다.
“실은 그들이 직접 그런 건 아니고…. 그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발목을 삔 거야.”
“왜 아가씨를 쫓아온 거예요? 정체를 들키신 건가요?”
“모르겠어. 확실한 건 내가 이 무도회에 참석한 걸 스노브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세상에. 정말로 위험할 뻔하셨어요. 이제는 저희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니란 걸 아시겠죠?”
“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이 대비해 준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난 것 같아. 그리고 공작 전하를 만난 게 행운이었지.”
“어머나, 맞아요. 공작 전하를 만나신 게 결정적이었죠! 저희 아가씨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마사가 그제야 호들갑스럽게 인사했다.
“당연한 일이었소. 나야말로 행운이었지요.”
알레스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공작은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 방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셨어요?”
“거긴 브린이 얼마 전까지 쓰던 방입니다.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군요.”
“그래요? 정말 운이 좋았네요.”
알레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두 분은 보통 인연이 아니신가 봐요. 저 넓은 황궁에서 마침 그렇게 위급한 때 딱 마주치신다는 건 신이 내린 인연이 아니신가, 이 유모는 그런 신비롭고 운명적인 생각이 마구 드는 것이지요.”
마사, 주책 좀 그만 부려. 알레스가 민망한 얼굴로 눈짓을 했다.
하지만 마사는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전하, 외람되지만 제가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이 있습니다.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소. 말해 보시오.”
“선대 백작님과 마님의 기일마다 추도식 비용으로 신전에 마정석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푸른빛을 띤 그 마정석은 매우 귀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전하십니까? 매해 성함을 밝히지 않고 마정석을 보내 주신 분이?”
과거에 공작이 페레티 백작 부부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레스도 들은 기억이 났다.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역시 전하셨군요. 왜 말씀을 안 하십니까. 아가씨, 궁금증이 하나 풀렸습니다.”
“으응….”
난 모르는 일이란 말이지. 내 기억 속엔 없단 말이지.
공작은 백작 부부의 기일마다 신전에 라피스를 보냈구나.
“카이트 고마워요.”
“그저 두 분이 잊히지 않길 바랐을 뿐입니다. 좋은 분들이니까요.”
좋은 사람들이어서, 세상의 무자비한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눈사람처럼 금방 녹아 버렸을 페레티 백작 부부.
‘나는 저쪽 세상에서도 이쪽 세상에서도 눈사람의 아이로 태어났구나.’
알레스는 오랜만에 아득한 기분이 됐다.
그나마 이곳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 눈사람들에게 아주 조금 유리한 세상이다.
저쪽 세상의 눈사람들을 전부 이쪽 세상으로 데리고 올 수 있다면?
예정된 운명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까?
“궁금한 게 많아서 송구합니다. 전하,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마사의 목소리가 알레스의 상념을 흩어 놓았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수락을 표했다.
“아가씨가 열 살이 되시던 해부터 매년 생일 선물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그분도 전하이신지요?”
공작이 앞서 질문을 받았을 때보다 순순히 시인했다.
“시치미 떼기도 힘든 분위기군요.”
그러고는 알레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메르세데스의 사람들이 보냈다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 같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알레스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사가 눈치를 보다 나섰다.
“아가씨 놀라셨나 봐요. 늘 궁금해하셨지요. 매년 잊지 않고 살뜰히 챙겨 주시는 분이 대체 누구신지. 그동안 받은 선물들 기억하시죠?”
그러니까 난 모른다고. 무엇을 받았는지.
“그럼, 기억하지. 그동안 무척 고마웠어요, 카이트.”
알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렇구나. 공작과 진짜 알레스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과 추억이 있구나.
알레스는 새삼 깨달았다.
공작은 훨씬 전부터 멀리서나마 진짜 알레스의 소식을 알아보고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각의 베일(알레스는 저주인 줄 알지만) 때문에 비록 적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었을지라도.
생각해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이 알고 있는 알레스는 과거와 현재가 빚어낸 기억의 총체인 것이다.
어느 날 뚝 떨어진 괴상한 여자가 아니라.
여기까지 생각한 알레스는 입 안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공작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도, 다정함도, 걱정도, 서운함이나 불만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쓰게 느껴졌다.
만일 공작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한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그건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몰랐던 일도 아닌데. 새삼 가슴이 욱신거리는 건 자신이 공작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나쁜 습관이 들었어.’
이 알레스가 진짜 알레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도 그 눈에 깃든 다정한 빛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분은 정말이지 세상에 둘도 없는 각별한 인연이십니다.”
마사가 들뜬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으며 알레스는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발목은 좀 괜찮아졌습니까?”
공작이 눈을 맞춰 오며 물었다.
“네, 신기하네요. 의료용 마정석 효과가 이렇게 좋은 거군요.”
알레스의 반응에 마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가씨, 모든 마정석이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은 건 아닐 거예요. 이건 메르세데스령에서만 나는 라피스로 만든 건데 아주 고급이래요. 밤비 경이 특별히 준비한 거라고 아까 말했거든요.”
“아, 그래서 마력 찜질할 때 보랏빛과 푸른빛이 일렁거렸던 거구나.”
알레스가 발목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가 무도회에 참석하시는 걸 스노브 후작이 알고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정보는 어디서 얻으신 건가요?”
그동안 잠자코 있던 밤비 경이 물었다. 밤비는 정보가 새 나갔다는 사실에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 어떤 영애가 떠드는 걸 우연히 듣고….”
네슬라 공녀가 알려 주었다고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니 알레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스노브 후작 쪽의 동정을 몰랐다는 것은 호위에 있어서는 분명한 실책이었다.
후작이 더 잔인한 흉계를 꾸몄다면, 운 좋게 공작을 만나지 못했다면, 레이디는 지금보다 더 큰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얼마 전, 공작이 밤비에게 따로 일러둔 얘기가 있었다.
레이디 페레티가 독버섯 일당의 표적이 될 위험이 커졌으니 호위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공작 본인이 직접 레이디의 신변 보호에 개입할 것이라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레이디의 호위 책임자는 자신이 아닌가.
밤비는 자책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차는 그대로 비에커가로 달려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에 당도했다.
이곳까지 동행한 공작은 떠나기 전에 마사를 따로 불렀다.
“부인, 물어볼 게 있소.”
놀란 마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공작이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공유 마차에 프러포즈 패키지란 게 있다고 들었소. 그건 어떻게 신청할 수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