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무도회 추격전
‘여기가 어디쯤이지? 모르겠어. 비슷비슷한 방문들과 벽장식 때문에 헷갈려. 방향감각을 잃었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생각보다 멀리 온 걸까? 아니면 오하라를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 그걸 모르겠다.
이 무도회에서 볼일은 대충 다 본 것 같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차근차근 길을 찾거나 지나가는 황궁 고용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되는 문제였다.
‘내가 무도회에 온 걸 스노브가 알고 있다니 더 이상 지체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알레스는 길을 찾는 대로 곧장 황궁을 벗어나 마사와 밤비가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부를 생각이었다.
마침 복도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가던 알레스는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멈칫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여러 명의 발소리?
몸을 숨기고 발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망설이는 사이, 그들이 먼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말로만 듣던 와인 든 영애 떼?
십여 명의 영애들이 하나같이 검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글라스를 높이 쳐들고 알레스를 향해 밀려왔다.
그들의 눈빛을 보니 반가워서 저러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다른 쪽 손에 부채나 손가방을 들고 빙빙 돌리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점점 다가오는 속도를 높이자, 뒷걸음질 치던 알레스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무도회용 구두가 익숙지 않아 달리자마자 발목을 삐끗했지만 어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구두를 벗어 던진 알레스는 통증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몰려오는 기세로 보아선 드레스에 와인을 쏟는 정도가 아니라 글라스째 내리칠 것 같았다. 좀비 떼가 따로 없었다.
밤비에게 몇 가지 호신술과 대처법을 배웠지만, 상대편 쪽수가 너무 많아 기술을 펼치기도 전에 몰매를 맞을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소리를 질러 주의를 끌 텐데, 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꽉 잡고 달리던 알레스는 복도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밤비가 일러준 대로 치마폭을 뜯어 한쪽으로 내던졌다.
그런 다음 한층 홀가분해진 차림으로 그 반대쪽 복도로 냅다 달아났다.
그다음 나타난 양 갈래 길에서도 가슴과 어깨를 장식한 천을 뜯어 집어던지고 반대쪽 복도로 내달렸다.
금방 탄로 날 얕은 술수였지만, 뒤따라오는 영애들에게 잠깐 동안이나마 혼선을 줄 수는 있으리라.
덕분에 몸도 한층 가벼워져서 도망가는 데 유리해졌다.
발목이 멀쩡하지 않다는 게 핸디캡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무사히 와인 부대를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아!
알레스가 섣부른 승리감에 도취돼 있을 때였다.
막다른 벽이 비웃듯 막아선 것은.
* * *
알레스를 뒤쫓던 영애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반가면을 쓰고 로열블루 드레스를 입은 핑크브라운 머리칼을 살짝 손봐주면 되는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독 안에 든 쥐 주제에 요리조리 달아나며 어찌나 잔꾀를 부리는지.
무리의 리더 격인 영애가 들고 있던 레드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흘러내린 와인을 손으로 훔치자 흰 장갑에 붉은 물이 들었다.
알레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을 제대로 빡치게 만들고 말았다.
“복도 끝 막다른 방 앞에 이런 게 떨어져 있네요.”
무리에 있던 다른 영애가 리더의 눈앞에 금붙이 하나를 들어 보였다.
말편자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드롭 귀고리였다.
건네받은 귀고리를 손에 들고 들여다보던 리더가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드디어 쥐새끼를 찾은 모양인데? 다들 조심해요. 궁지에 몰린 쥐새끼는 무는 수가 있으니까.”
와인을 든 영애 무리는 귀고리가 떨어져 있던 복도 끝으로 몰려갔다. 막다른 곳에 방이 하나 있었다.
리더 격인 영애가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거세게 비틀어 문을 열어젖혔다.
도도하게 고개를 쳐든 영애들이 호기롭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독 안에 든 쥐에게 레드와인 세례를 퍼붓기만 하면 되는데!
하지만 그들의 행진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방 안에는 그들이 기대한 생쥐 레이디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업무 중이었는지,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있던 그는 와인 영애들의 요란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내리깔고 있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릴 뿐이었다.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서늘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빙벽 앞에서 영애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의 물음에 어느새 정숙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리더 격의 영애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공작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가 방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꽤 급한 사정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렇게 격한 등장을 보면 말입니다.”
“아, 그건….”
“혹시 내가 도움을 드려야 하는 일인가 해서 묻는 겁니다.”
이 말에 비로소 영애는 긴장을 풀고 말했다.
“실은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무도회에 처음 초대받은 영애라 흥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과음을 했지 뭔가요. 실수라도 저지르기 전에 같은 레이디인 저희가 챙기려고요.”
“수고가 많으시군요. 사람을 풀어서 그분을 찾는 데 도움을 드릴까요?”
“아닙니다, 전하. 저희끼리 찾아보겠습니다. 일이 너무 커지면 그 영애가 민망해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모르는 척하지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와인 영애들은 나름 잘 둘러댔다고 생각하며 방에서 물러났다.
약이 바짝 오른 영애 무리는 다시 알레스의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
책상에 앉아 영애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방문으로 다가가 걸쇠부터 채운 뒤, 뛰다시피 책장으로 향했다.
그가 두 개의 책장을 양쪽으로 밀자, 책장 뒤 숨은 공간에서 반가면을 쓴 레이디가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칼, 속옷에 가까운 단출한 드레스 그리고 맨발.
“알레스, 괜찮습니까?”
“괜찮고말고요. 이거 참, 쑥스럽네요. 몰골도 말이 아니고.”
“그게 문젭니까. 다친 데는 없고요?”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카이트. 아휴, 그 영애들 정말이지 인정사정없네요. 덕분에 살았어요.”
십년감수한 기분이었지만, 알레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취기는 좀 가라앉았습니까?”
“나 참, 놀리는 거죠? 둘러대도 어쩜 그런. 멀쩡한 사람 취객으로 만들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알레스가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공작은 알레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알레스의 뺨을 스친 후 귓가에 닿았다.
별것 아닌 그 동작에 알레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공작의 손가락은 알레스의 반가면을 조심스레 벗겨 냈다.
한 겹 벗기자 또 한 겹. 다시 한 겹 벗기자 또 한 겹.
공작은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알레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세 겹의 반가면을 하나하나 벗겼다.
반가면이 사라진 곳에 한 쌍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일렁이는 녹안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대체 왜 가슴이 콩닥거리고 뺨이 달아오르는 거야? 가면 세 장 벗었을 뿐인데.’
알레스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손으로 벗어도 되는데.”
“미안해요, 마음대로 벗겨서. 알레스의 눈을 얼른 제대로 보고 싶었어요.”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제 눈이랑 인사하시고요.”
공작이 낮게 웃었다.
“그들이 왜 알레스를 쫓아온 겁니까?”
“우선은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저한테 쏟으려고요.”
“와인을? 무슨 이유로?”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느낌으론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은 것 같아요.”
“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그럼 그 누군가가 알레스가 여기 온 걸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마도요. 그리고 제가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걸 스노브가 알고 있었대요.”
“흐음, 그렇다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던 공작의 눈에 문득 알레스의 맨발이 들어왔다.
“아, 미안합니다. 당신을 너무 불편하게 세워 뒀군요. 일단은 이쪽으로 좀 앉으시죠. 마차에 여벌 드레스와 구두가 있나요?”
공작이 안락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마사와 밤비 경이 대기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이런 일을 대비해….”
“잠깐, 알레스!”
알레스가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공작이 소리를 지르더니 성큼 다가왔다.
“어어!”
공작이 알레스를 번쩍 안아 올렸다. 놀란 알레스가 몸을 버둥거렸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다친 겁니까?”
알레스가 안락의자 쪽으로 걸음을 떼며 절뚝거리는 걸 본 것이다.
“아, 발목을 조금 삐었어요. 괜찮아요.”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공작은 알레스를 안락의자에 내려놓은 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레스는 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미끄럽다는 이유로 얇은 실크 양말마저 벗어 던진 맨발을 민망한 기분으로 꼼지락거렸다.
눈앞에 놓인 작고 하얀 맨발을 보자 공작의 가슴도 저릿해졌다.
어느 밤, 알레스가 자신의 발을 씻기고 마사지해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다친 알레스를 두고 엉뚱한 상념에 빠져드는 자신을 탓하며 공작은 알레스의 발목으로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발목이 손 안에 쏙 들어오고도 남았다. 순식간에 손가락 끝까지 뜨거워졌다.
오른쪽 발목이 부어오른 채 검게 멍들어 있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예요. 어떤 영애는 와인 세례를 피하려다 넘어져서 정강이뼈에 금이 갔다잖아요.”
알레스의 농담에도 공작은 웃지 않았다.
“마차에 치료용 마정석이 있습니까?”
“네, 구비해 둔다고 했어요.”
“곧장 마차로 가야겠군요.”
“그러죠. 볼일도 얼추 끝났으니까. 그 전에 카이트, 얼굴 좀 푸세요. 정말로 별일 아니라니까요.”
“알레스.”
공작의 눈에 그야말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내가 지금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압니까?”
“…….”
“앞으로 다치지 말아요. 아프지도 말고요. 알레스를 다치게 한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알레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뗐다가 공작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눌려 다시 다물었다.
이대로 지고는(?) 못 사는데….
“카이트도 괜찮다는 말 하지 말아요!”
알레스가 불쑥 내뱉었다.
“이제 알았죠? 안 괜찮은데 자꾸만 괜찮다고 하는 게 얼마나 사람 답답하게 하는지. 카이트도 맨날 혼자서만 짊어지고 괜찮다고 하잖아요.”
공작이 멍한 얼굴로 알레스를 올려다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난 정말 괜찮았습니다.”
알레스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네, 네, 그러시겠죠.”
공작은 다시 하얀 두 개의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저 발에, 그리고 발목에 입을 맞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