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정략결혼? 전략결혼!
“네슬라 공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때는 이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알레스가 슬그머니 그녀이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실은 당신을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우리 편? 편이 있어?”
“간단히 설명하자면 스노브가 악당인데 알량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희생시키려고 해요. 제국의 가난한 백성들을 포함해서요.”
“뭐 그렇게 뻔해? 요즘 그렇게 평면적으로 캐릭터 만들면 인기도 없고 욕먹어.”
“끄음, 그렇긴 한데… 계급 사회여서 다양성이 떨어지나? 그 인간이 그렇더라고요. 어떻게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연루가 돼 있는지.”
“하긴 드라마나 영화보다 현실이 더 막장일 때가 많지. 개연성도 영 떨어지고.”
“여하튼 당신은 그 악당의 체스 말로 낙점된 거예요. 당신을 이용해서 또 한바탕 욕심을 채울 생각인 거죠.”
“역시 기분 나쁜 영감탱이야.”
오하라가 고운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그리고 제가 속한 편은 그런 스노브의 야욕을 막기 위해 애쓰는 편이고요.”
“호오,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정의의 기사들인 거야?”
“음, 정의감 넘치는 사람도 있고, 그냥 개인적인 원한 때문인 사람도 있고, 스노브의 야욕과 내 이익이 충돌해서 그를 막으려는 사람도 있고요.”
“당신은 어느 쪽인데?”
“저는 이익 쪽이요. 감정 상한 거도 있고요. 스노브가 먼저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니까요.”
“솔직하네. 그나저나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사업 때문에 여기 왔다더니 모르는 게 없고. 스파이 같은 거야?”
“비슷한 거라고 해 두죠.”
“그래서 나를 정의의 기사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무슨 얘기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알레스는 다시 오하라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스노브의 말로 스노브를 잡으려고 했어요.”
“……?”
“당신이 황비 후보에서 미끄러진다 해도 스노브는 또 다른 말을 구해서 세울 테죠. 그럴 바에야 당신이 우리 편, 아니 황제의 편에 서서 버텨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뭐? 결국 황제랑 결혼을 하라는 소리야 뭐야?”
“그러니까 오하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때 그랬단 소리예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안… 되겠죠?”
“안 되지!”
오하라가 단칼에 자르며 펄쩍 뛰었다.
“그렇죠, 그렇지요.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을 기대하는 건 이 상황에서 너무 이기적인 바람이겠죠?”
“알면서 뭘 물어?”
“어차피 앞으로 공녀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면 통 크게 그 한 몸 던져 보는 것도….”
“됐거든! 남의 몸 가지고 뭘 하려는 거야?”
“안 되겠죠?”
“안 된다고 몇 번 말해? 생각을 해 봐, 엉? 황제랑 결혼이라니 안… 되잖아, 안 되잖아!”
진저리를 치는 오하라에게 알레스가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정략결혼이 전략결혼이 되게 하면 어때요? 정말로 오직 전략만 있는 관계요. 황제와 딜을 주선할 수도 있어요.”
“내가 처한 상황을 곧이곧대로 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황제는 내가 처한 상황도 모르는 걸요.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어야 할 거예요.”
“그럼 어떻게 설명할 건데?”
“여기 귀족들의 정략결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결혼과 달라서 사업 파트너 같은 관계가 가능해요. 황제같이 최고 계급일수록 오히려 통하기 쉬울 수도요.”
“믿어도 돼? 사기 치는 거 아니지?”
“사기…를 치기도 하지만 이번은 아니에요.”
“그래도 마음이 영 동하지 않아.”
“충분히 이해해요.”
난 안팎이 모두 여자인데도 그 녀석 싫어서 걷어차고 나왔는데 남중혁 씨는 오죽하겠어.
알레스가 아주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도 계속 오하라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면 황제와 딜을 하는 게 당신을 위해서도 가장 나을지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점점 기울어요. 누구도 강요할 순 없지만요.”
“후우, 난 잘 모르겠어.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가슴이 먼저 거부해. 차라리 첫 번째 방법이 낫지 않을까? 깽판 치는 거.”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뒷일이 좀 걱정되네요.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
“그럼 당신네 회사에 들어가면 안 돼? 엄청 잘나가는 거 같던데. 나 하나 더 숟가락 얹어도 괜찮잖아?”
“아,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구설에 오를 수 있겠네요.”
“구설수야 내 일상이었는걸.”
연예계 가십에 정통한 배우님께서 말씀하셨다.
알레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까 영애들에게 나눠 준 초록색 명함을 내밀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시간이 많진 않지만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우린 당신을 도울 준비가 돼 있으니까요.”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던 오하라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원래 살던 세상에서 어떤 일을 했어?”
“그냥 회사원이요? 보통 회사원보다는 성깔이 좀 있었지만.”
“몇 살이었는데?”
“서른 살이요.”
“어, 나보다 누나네?”
“그럴 거예요. 남중혁 씨가 보송보송하던 시절부터 난 이미 찌든 회사원이었으니까.”
“그럼 앞으로 말 놔.”
“그…럴까? 근데 나만 말 놓는 거야? 넌 존대를 안 하고?”
“새삼스럽게 무슨. 게다가 여긴 저쪽 세상도 아니잖아. 내가 공녀니까 계급이 더 높은 거 아냐?”
“흥, 그런 덴 잘도 적응하네.”
“그나저나 황제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무슨?”
“전 부인이었던 페레티, 곧 부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네슬라. 황제와 결혼으로 엮이기만 하면 다른 세상 사람이 몸에 들어가잖아. 당신이랑 내 경우처럼.”
“어? 정말 그러네.”
“그 인간 무슨 살이 낀 거 아니야? 아내 잡아먹을 상인가?”
오하라가 턱을 괸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레스도 오하라의 말을 듣고 보니 지나치게 공교롭긴 했다.
“제국판 푸른 수염도 아니고…. 혹시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같은 걸까? 황제의 부인은 몸이 바뀐다는.”
그렇게 생각하니 황제의 운명도 나름 기구했다.
결혼 상대자가 다른 세상에서 온 악녀 아니면 남자라니. 평생 홀아비로 늙을 팔자인가.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을 거 같기도 하고.
알레스는 황제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아? 나야 상관없지만 네슬라 공녀님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잖아. 천천히 생각해 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줘.”
알레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오하라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까 그 가면 다시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 맞다. 가면 벗은 걸 깜빡했네. 당연히 써야지. 내가 여기 온 걸 사람들이 몰라야 하니까.”
알레스가 얇은 것과 딱딱한 것을 차례로 다시 썼다.
“당신이 여기 온 걸 이미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더 챙겨서 써야 할걸?”
“그게 무슨 소리야?”
“스노브는 알고 있었어. 당신이 여기 올 걸. 그래서 실은 나도 알고 있었고. 다만 당시의 나에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흘려들었지.”
알레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노브가 알고 있다면 결코 손 놓고 있진 않았을 터.
알레스는 가면을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쓰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무도회 채비를 도와주며 밤비가 했던 말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떠올릴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는데….’
알레스가 입고 있는 로열블루의 드레스는 밤비가 오늘 무도회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디자인에 신경을 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추격이나 몸싸움, 은신 등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해 독특한 구조로 설계했다.
「거추장스러운 부분을 모두 제거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의 이 부분을 잡아당기면, 이렇게 분리가 됩니다.」
급히 피신해야 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몸놀림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풍성한 치마, 가슴과 어깨의 장식을 떼어낼 수 있는 드레스였다.
여차하면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옷을 벗어 던지고 달아나면 되는 것이다.
알레스는 밤비의 설명을 들으며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 웃음을 참았는데, 막상 무도회에 와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된 알레스에게 오하라가 물었다.
“왜? 걱정돼? 내가 홀까지 같이 가 줄까?”
“제안은 고맙지만 그건 안 돼. 스노브가 심은 첩자들이 분명 있을 거야.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들이 보면 골치 아파질 거야.”
“그렇겠네. 그럼 몸조심해.”
“혹시 나에게 직접 연락하기 조심스러우면 로잘린 황녀를 통해 자리를 마련해도 좋아.”
“아, 그 귀여운 새침데기 황녀?”
“황녀와 빨리 가까워지고 싶다면 푸른 불꽃의 고결 멤버라고 해도 좋고.”
“푸른 불꽃의 고결? 그 소름 돋는 단어들의 조합은 뭔데?”
“팬클럽 이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릴 했다간 험한 일을 당할 테니 입조심 하도록.”
“팬클럽이라. 그렇다면 무조건 조심해야지.”
“참, 본인이 톱 스타였으니 누구보다 잘 알겠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팬심이지. 그런데 누구 팬클럽?”
“메르세데스 공작.”
“아하, 그 냉미남?”
“그를 알고 있어?”
“오늘 보니까 눈에 확 띄던데 뭐. 여기저기서 아가씨들이 그 남자 얘기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겠던데? 이 구역 인기남인가 봐?”
“음, 이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
“미혼이야? 애인은 있고?”
“아직?”
“흠, 그래도 황녀가 팬클럽 멤버일 만큼 그를 좋아한다니 결국 황녀와 잘되겠네.”
“그…럴까?”
“인형처럼 예쁘고 귀엽겠다, 황족이겠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 한다니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없을 것 같네.”
“아까 당신이 말하지 않았어? 여기 귀족들은 정략결혼이 당연한 거라며? 어차피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지.”
“너도 그랬어?”
“응?”
“너도 저쪽 세상에서 엄청난 팬을 거느린 최고 인기남이었잖아. 보는 눈이 많아서 연애도 맘 편히 못 했을 것 같긴 한데. 너랑 어울리는 예쁘고 멋지고 기왕이면 조건도 맞는, 그런 사람이 좋았어?”
“그건…, 물론이지.”
“역시 그렇구나. 난 이제 나가 볼게. 결심이 서면 연락 줘.”
알레스는 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온 후 등 뒤로 재빨리 문을 닫았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워낙 넓고 방도 많은 황궁이라 길이 좀 헷갈렸지만, 기억을 더듬어 홀이 나오리라 생각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걷고 있자니 갖가지 상념이 밀려왔다.
네슬라 공녀와 이런 식으로 연결될지 짐작이나 했겠는가.
어쨌든 알레스에겐 생각지 못한 기회였다.
어쩌면 스노브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흐름이 그를 응징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때가 된 것인지도.
악당은 죗값을 치르고, 메르세데스 공작은 복수를 완수하고.
세상의 도리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가 마땅히 누려야 했던 영광을 되돌려 받고.
북부 공작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황녀와 결혼해 영지를 잘 다스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산다는 해피엔딩!
기분이.
이상해.
뭔가 마음이 불편하고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아.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 보니….
“여기 어디야?”
완전히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