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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87화 (86/120)

87화

오하라의 비밀

오하라와 함께 별실에 들어간 알레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키가 큰 오하라의 연청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내며 알레스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오하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문을 잠근 거였다.

철컥 소리를 듣고 알레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둘이 한 방에 있는 걸 누군가 보게 되는 것도 꽤 난처한 일이었다.

오하라는 주도면밀한 사람이구나. 역시 제국의 황비 자리에 오를 레이디라면 조심성이 많아야겠지?

알레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느낌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오하라가 알레스의 어깨를 잡는가 싶더니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알레스를 꼼짝 못 하게 벽에 붙여 세운 오하라는 길고 늘씬한 팔을 뻗어 탁 소리 나게 벽을 짚었다.

멜로드라마나 로맨스 소설 같은 데서 얼핏 봤던 벽치기를 지금 여기서 이렇게?

난생 처음 당해 본 벽치기의 상대가 하필 오하라 가넷 네슬라라니!

전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구도에 알레스는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저기요, 나한테 왜 이러세요…?’

오하라도 알레스를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벽을 짚지 않은 쪽 손으로 알레스의 반가면을 재빨리 벗겼다. 미처 저항할 틈도 없었다.

한 손에 반가면을 움켜쥔 채 알레스의 얼굴을 확인한 오하라가 흠칫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면을 벗겨 낸 곳에는 또 다른 가면이 있었다.

딱딱한 가면 아래 얇은 천으로 만든 가면이 두 겹.

마사와 밤비가 대비한 그대로였다.

“뭐, 뭐야?”

오하라가 왠지 투박해진 목소리와 불량한 말투로 말했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있던 알레스는 오하라가 당황한 사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레이디, 어차피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잖아요? 좋은 말로 부탁하셨음 제 손으로 벗었을 거예요.”

알레스가 스스로 눈 주변을 가렸던 얇은 가면을 풀어 내렸다.

반짝이는 에메랄드그린 눈동자와 영리해 보이는 눈매가 드러났다.

알레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오하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이디 페레티, 당신….”

알레스를 벽으로 밀어붙이던 기세와는 달리 무언가 망설이는 듯했다.

“…여기 사람 아니지?”

‘!’

“다른 세계에서 왔지?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있지?”

“…….”

“혹시… 한국에서 왔어?”

‘!’

“그 말 춤 추는 거 보고 알았어. 한때 엄청 유행했잖아. 그 형 그걸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지….”

‘그 형?’

“아니야? 제발 맞다고 말해 줘. 내가 미친 거 아니라고. 당신도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오하라가 절박한 얼굴로 매달렸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던 알레스는 그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아요. 나도 당신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쪽 세상으로 건너왔어요. 눈빛으로 이런 말을 전하면서.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챈 듯, 오하라의 연청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벽을 짚었던 손도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알레스가 한숨 돌리려는 순간, 오하라가 알레스를 와락 껴안았다.

“정말, 정말로 고마워. 나랑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게…. 그것만으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정말 무서웠다고….”

어느 날 갑자기 웬 서양 중세풍 세계로 떨어져 공작가 영애가 되었으니 놀랍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나처럼 여기 떨어지자마자 이혼녀가 되는 터프한 코스는 아니었잖아요?

페레티처럼 말만 귀족이지 다 망해 가는 빈털터리 가문도 아니고.

나름 제국의 빵빵한 4공작가 중 하나인 네슬라가에 꽂아 준 걸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게다가 늘씬한 인어 스타일 미인이니 얼마나 좋아!

곧 제국의 황비가 되실 몸이기도 하고.

자신을 꼭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이는 오하라에게 알레스가 이런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할 때였다.

오하라가 먼저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떨어져 나오며 물었다.

“혹시… 남중혁이라는 배우 알아?”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알레스가 아무리 저쪽 세상에서 워커홀릭이었고 연예인을 잘 몰랐다 해도 그 배우만큼은 알았다.

아마 국민 남친인 그를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어디 무인도 같은 데 버려진 게 아니라면.

“…나 남중혁이야.”

“…….”

남중혁? 남중혁 배우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웬 여자 몸에 들어와 있잖아.”

우째 이런 일이…. 나와는 질이 다른 혼란을 겪었겠네….

알레스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녀, 아니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저 조심스레 위로의 눈빛을 건넸다.

“갑자기 이상한 곳에 떨어져 엉뚱하게 여자가 된 거도 황당해 미치겠는데 느닷없이 인상 더러운 영감 하나가 들이닥치더니 뭐, 황제랑 결혼을 하라나?”

오하라가 우아한 외모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몸짓과 말투로 콧김과 하소연을 쏟아냈다.

‘아, 맞다. 그 문제가 있었지.’

알레스는 급격히 겸손해졌다.

자기한테 떨어진 삶이 더 각박한 줄 알았더니, 이건 뭐 극한의 서바이벌도 아니고….

오하라, 아니 남중혁 씨 내가 졌소.

“아, 정말… 막막하시겠어요.”

안타깝지만 이런 무성의한 리액션밖에는.

오하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터놓고 고민을 말할 사람이라도 있어서.”

“가슴이 답답하면 얼마든지 저한테 털어놓으세요.”

“혹시 우리가 왜 여기 오게 됐는지, 이 몸속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알아?”

“글쎄요…. 전혀 모르는데요.”

“뭐 좀 짐작 가는 바도 없고?”

“…짐작을 해 본 적이 없네요.”

그러고 보니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 이쪽 세상으로 와서 레이디 페레티의 몸에 들어오게 된 거지?

“뭐야? 궁금하지도 않아? 왜 이렇게 무덤덤해?”

“사정이 있었어요. 그동안 정신없이 쫓겼다고요. 여기 떨어지자마자 주변에서 얼마나 사람을 닦아세우던지.”

“원래 살던 세상에 미련이 없나 봐?”

“뭐, 그렇기도 하고요. 남중혁 배우님이야 어떡해서든 돌아가고 싶으시겠지만.”

알레스의 말에 오하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나도 공녀가 아니라 공작 같은 배역을 맡았다면 여기서 즐겁게 대충 뭉갰을 걸?”

하긴 성별이 바뀐 건 꽤 난감한 문제일 터. 게다가 몰아치는 정략결혼의 압박이라니.

“그래도 아까 보니까 당신은 여기 적응을 꽤 잘하고 있는 거 같던데? 귀족 아가씨들한테 말 춤을 가르칠 생각을 하다니.”

“아, 그거요. 제가 몸치라 사교댄스는 도저히 무리라….”

“그래도 신박했어. 나한테는 깜깜한 어둠을 번쩍 가른 한 줄기 빛이었고.”

“오하라, 아니 남중혁 씨는 그래도 제국의 공녀 역할을 감쪽같이 하던 걸요? 아까 보니까 춤도 잘 추시고.”

“명색이 배우잖아. 영화 때문에 따로 사교댄스 강습을 받은 적도 있고. 어쨌든 연기는 내 전문이니까.”

“불행 중 다행이네요. 전 아예 사교계에 나갈 생각도 않는데. 이번 무도회도 사업 때문에 몰래 온 거예요. 이렇게 가면을 쓰고.”

“뭐 어때? 무도회라지만 다들 춤엔 관심 없는 거 같던데. 이 무도회 자체가 정치적인 이벤트잖아.”

“잘 파악하고 있네요?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아요?”

“당신 이름은 많이 들었지. 물론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었어. 아까 말한 그 인상 나쁜 영감이랑 심술궂게 생긴 아줌마 세 명이 주로 떠들어댄 소리니까.”

“흐음, 확실히 좋은 얘긴 아니었겠네요.”

“그래도 알겠던걸? 당신이 매우 유능하고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적대 관계에 있는 그들이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헐뜯을 만큼.”

오하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체 내 욕을 얼마나 한 거야? 알레스가 불만스럽게 눈을 굴렸다.

“그런데 말 춤을 춘 레이디의 정체를 알아봤더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바로 그 이름이잖아! 얼마나 놀랐는지.”

“저도 말 춤이 이런 만남을 가져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알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깜짝 놀랄 일이잖아.

“그나저나 당신이랑 나랑 라이벌 구도인 건 당신이 황제의 전 부인이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

“아 그게… 현 황제가 즉위 전 대공이던 시절에 이 몸의 원래 주인과 결혼을 했대요. 그런데 황제 되더니 바로 걷어차던데요?”

“의리 없는 놈! 딱 그렇게 생겨 먹었더라니. 실컷 뒷바라지 해 줬더니 잘되니까 배신을 해? 아주 막장 드라마구만.”

“흠흠, 뒷바라지를 해 줬다고 하기엔 이틀밖에 부부로 살지 않아서.”

“뭐야 그게?”

“정략결혼이라 그래요. 여하튼 이런저런 지저분한 사정이 있어요.”

오하라가 한참 눈을 껌뻑이더니 조심성 없이 다리를 쩍 벌리며 주저앉았다.

“여하튼 당신은 그 정략결혼인지 뭔지를 영리하게 잘 피해갔네. 그 심술쟁이 1남 3녀가 뭐라고 떠들든, 내가 듣기엔 이혼 후에도 당차게 잘 헤쳐 나가는 거 같고.”

그의 녹슬지 않은 입담에 알레스는 간만에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해요.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을 텐데.”

“뭐, 멀리서 보면 코미디라잖아. 그나저나 내 정략결혼은 어떻게 하지? 좋은 생각 좀 있어?”

흐음. 알레스는 입을 새 부리 모양으로 만들고는 생각에 잠겼다.

황제와 황비 후보자 양쪽에서 결혼에 관한 조언을 구해 오다니.

오하라를 혹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정도만 궁리해 봤지, 이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구도다.

“우선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도록 사달을 내는 게 한 가지 방법이겠죠.”

“황제가 가만히 있을까?”

“음, 황제는 가만히 있을 거예요. 길길이 뛰는 건 스노브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황제도 이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야?”

“이 국혼은 스노브가 벌인 장사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당신을 황비 자리에 앉히고 황궁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뭐야, 결혼은 내가 하는데 나한테 좋은 게 하나도 없잖아.”

“스노브와 가문의 욕심에 희생당하는 역할인 셈이죠.”

“짜증나네, 그 비열한 영감쟁이.”

“귀족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고는 있지만 황제로서도 권력이 분산되는 게 달가울 리 없을 거고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황제도 이 결혼이 무산되기를 고대한다는 거군. 티를 낼 수는 없지만.”

“그렇죠.”

“그럼 결혼이 무산될 구실을 내가 만들어 주면 매우 좋아하겠네?”

“눈치가 빠르시네요.”

“어떤 핑계를 만들어 주면 좋을까? 큰 하자가 있다고 할까? 아니면 이미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라고 하는 건 어때?”

“누구랑요?”

“누구… 흠, 그것도 문제네. 혹시 이참에 같이 해치우면 좋을 사람 있어? 내가 데리고 갈게.”

“…순간 놀랐네. 그거 영화 대사잖아요. 아무 때나 대사 치지 말란 말이에요.”

“내 직업이 이건데?”

오하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아까 판을 깨는 게 한 가지 방법이라고 했잖아. 그럼 다른 방법은 뭔데?”

“아 그거요….”

알레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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