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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86화 (114/120)

86화

당신의 가치

“여러분, 부족한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지요?”

알레스의 물음에 혈색부터 달라진 영애들이 눈빛으로 긍정적인 답을 보냈다.

“사람은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

“특히 우리같이 중심에서 조금 비껴난 레이디들은 말이죠.”

뜻밖의 가볍지 않은 화제에 영애들이 눈을 깜빡였다.

“척 하고 견적을 내 봐서 이건 도저히 가망이 없다 싶으면 얼른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한다는 뜻이에요.”

아직은 알 듯 말 듯한 말.

“우리가 춘 춤이랑 같은 거예요. 언제까지 늘 하던 대로 오지 않는 춤 신청자를 마냥 기다리기만 할 건가요?”

아! 영애들 사이에서 깨달음의 탄성이 조그맣게 터져 나왔다.

“메인 홀에서 추는 커플 댄스는 아니었지만, 우리 방금 무척 즐거웠잖아요?”

알레스가 방금 전의 감흥을 상기시키려는 듯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긴 줄에 서지 마세요. 노심초사하며 괜히 힘들게 갈 필요 없어요. 쉽고 편하게 성공하려면 짧은 줄에 서세요.”

이 말에 다시 영애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인기 있는 곳이기에 줄이 길겠지요. 모두가 원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모두가 원한다고 꼭 나도 원해야 할까요? 혹시 습관적으로 긴 줄에 서 있는 건 아닌가요? 투덜거리면서도 거기가 익숙하고 편하니까?”

알레스의 지적이 가슴 깊은 곳을 푹 찔렀지만, 영애들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함께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심이 되니까? 대충 비슷한 곳에 서 있으니 내가 아주 틀린 건 아닌 거 같죠?”

알레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번에도 한 사람 한 사람 시선을 맞췄다.

침묵하는 동안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편자 세 개를 겹친 디자인으로 하나는 골드, 하나는 핑크골드, 하나는 화이트골드에 큐빅이 잔뜩 박혀 있었다.

알레스의 영업이 이어졌다.

“대충 비슷한 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잠시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춤추기 전이었다면 아마도 영애들은 알레스의 직설적이고 얄미운 말에 아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흥겨운 춤을 나눈 시간만큼의 신뢰가 쌓였으니까.

“영악해져야 해요. 우리가 저기 메인 홀에 있는 사람들을 흉내 낸다 해도 저들과 같아질 순 없어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아류나 모조품밖에 안 되겠죠.”

“우리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 우울한 거라고요.”

누군가 용기를 내 실토하자, 알레스가 그녀를 향해 따스하게 웃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줄이 긴 곳보다 짧은 곳으로 가세요. 커플 댄스가 아닌 다른 춤도 충분히 즐거웠잖아요?”

알레스가 한쪽에 기대 놓았던 손가방을 가져왔다.

퀼팅 무늬가 들어간 연보라색 가방에는 말편자 모양의 골드 잠금단추가 강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말편자 모양 금속을 사슬처럼 이은 골드 컬러 체인이 손잡이 대신 찰랑거렸다.

여기 모인 귀족 영애들은 중요한 화제에 집중하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는 스킬쯤은 습득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나만의 춤을 찾으려면 우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죠?”

알레스는 손가방에서 작고 두꺼운 직사각형 종이를 꺼내서 모여 선 영애들에게 한 장씩 돌렸다.

이 명함 역시 밤비에게 미리 부탁해 만들어 뒀다.

들러리 영애들은 자신의 손에 놓인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녹색 바탕에 금박 글자가 찍혀 있었다.

‘당신의 가치를 찾아드립니다. 페레티 매니지먼트.’

* * *

메인 홀과 다른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

메르세데스 공작은 주먹을 입에 댄 채 서 있었다.

누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우수에 찬 그의 눈빛과 수려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 때문에 중대하고도 철학적인 고민―인간의 실존이라거나 사회 정의, 제국의 미래 같은―을 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매우 중대하고 철학적인 문제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고민 중이 아니라는 것.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건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렇게 눈에 띄면 안 된다고 강조하더니….’

공작은 알레스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중이었다.

알레스가 다른 영애들과 함께 작은 홀로 자리를 옮길 때도 조용히 뒤를 밟았다.

그리고 전부 다 보았다.

정체를 숨기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던 레이디가 그 누구보다 이목을 끌고 있는 광경을.

스케일은 또 얼마나 큰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영애와 함께 별관 홀을 통째로 차지하고 일을 벌이고 있었다.

춤동작 자체도 기괴하거니와 그 와중에 알레스의 움직임은 다른 영애들과 비교해도 매우 뻣뻣했다.

박자도 성급하게 들어가거나 어긋나기 십상이어서 보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만들었다.

저러다 발목을 삐거나 허리를 다치는 건 아닌지 염려될 정도였다.

‘정말로 춤을 못 추는구나.’

삐걱거리던 알레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공작은 등이 오싹해질 만큼 귀엽고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수밖에.

그때 불쑥 날아온 목소리가 공작의 감상을 흩뜨렸다.

“공은 무도회를 별로 즐기지 않는 모양이군?”

성장을 한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공작에게 묻고 있었다.

“춤에 재능이 없습니다.”

공작이 황제와 똑바로 마주섰다.

“공은 원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 제도에도 잘 오지 않고.”

“그런 편입니다.”

“그런데 근래는 자주 오는 거 같군. 이번 무도회도 그렇고, 지난 축제 강연회도 그렇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연회 동정도 알고 계셨군요.”

“당연한 일 아닌가. 제도, 아니 제국 전체가 떠들썩했는데 짐이라고 모를 리가.”

황제가 어깨를 으쓱하는데 순간 공작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남장을 한 알레스가 검은 복면인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던 장면.

알레스는 그자가 강연을 홍보하는 벽보에 낙서를 한 범인이라고 했다.

왜 불현듯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은 황비 후보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슬라 공녀 말씀이신지요? 송구스럽지만 판단을 내릴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오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진 못해도 그녀가 등에 업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황비로서 특별히 흠잡을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공작의 덤덤한 평가에 황제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재밌군.”

메르세데스와 스노브 사이의 오랜 숙원을 내 알고 있거늘.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다시 물었다.

“황비로 오하라보다 더 적합한 이는 없을까?”

공작은 황제의 눈에서 고약한 빛을 감지했다.

“예를 들면… 페레티는 어떤가?”

황제의 자수정 눈동자가 공작의 짙푸른 눈동자에 정면으로 부딪혀 왔지만,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스스로 기회를 버렸다고,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알레스는 당신 옆에 두기엔 아까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든 황제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공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 짐도 어느 정도는 짐의 실수를 인정하네. 그땐 페레티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어.”

황제는 머쓱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증명해 보였지. 이제 누구도 그녀의 자격에 대해 반박하지 못할 만큼.”

지금껏 잠자코 있던 공작이 조용히 물었다.

“누구의 반박 말씀입니까?”

“뭐?”

“누구의 시선이나 평가를 그리 마음 쓰십니까?”

“…….”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람의 가치라는 건 고유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우열을 가리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황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공작은 적대도 호감도 담지 않은 심해 같은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가치가 없다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가치가 없다 해도 좋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치를 모른다 해도 선의를 베풀 수 있지 않습니까.

공작은 입을 다문 황제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돌아섰다.

공작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알레스를 향한 연정을 고백하지 않아서.

혹시라도 그가 알레스에게 순수한 애정을 품게 됐다고,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한다고 말했다면 참으로 난감했을 거라고 공작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황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 기대 없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와의 만남은 공작에게 곧 다른 난감함을 안겨 주었다.

‘알레스가 어디로 갔지?’

* * *

그사이 알레스도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렸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접근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간을 보면 좋을까 궁리하던 대상이 오히려 먼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인어처럼 늘씬한 몸으로 알레스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고혹적인 미소가 아름다웠다.

“레이디 페레티?”

알레스는 화들짝 놀랐다.

반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 만난 적도 없는데 네슬라 공녀가 어떻게 나를 알아본 거지?

그보다 먼저, 자신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레이디 페레티가 이 황궁 무도회에 와 있으리라고는 모두 상상도 못 할 텐데.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가면 너머로도 느껴지는 당황한 기색에 오하라가 먼저 털어 놓았다.

“실은 5황자 전하께 여쭤 봤어요.”

브린! 거기서 샌 거구만! 이 입 싼 인간을 그냥!

가만? 네슬라 영애가 먼저 물어봤다는 건 적어도 자신이 이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단 소린데?

스노브 일당에게 이미 들켜 버린 걸까?

“아, 아까 춤추는 거 봤거든요. 영애들이랑 작은 홀에서. 춤이 무척 신기하고 재밌던데요? 그래서 내가 황자 전하께 여쭈었죠. 말 춤을 추는 저 영애가 누군지 아시냐고요.”

이번에도 오하라가 알아서 알레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아하, 그렇게 된 거로구나!

…하며 상쾌하게 고개를 끄덕이자니 뭔가 찜찜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황제의 전 부인이자 스노브 영감과 사교계 너구리 3인방이 크게 한번 손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레이디 페레티가 누구인지 물어본 게 아니라….

저 작은 홀에서 이상한 춤을 추는 영애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레이디 페레티라고 알려 주더라는 말 아닌가.

황비 후보자께서 그게 왜 궁금하신 건데요? 말 춤인지는 어떻게 아시고.

혹시 언니도 우리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실래요?

하지만 이번에도 오하라가 먼저 제안했다.

“괜찮으면 잠시 다른 방으로 가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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