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다 함께 막춤을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영애들이 놀란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반가면에 아담한 체구, 웨이브 진 핑크브라운색 머리칼의 레이디였다.
“춤추고 싶으면 추면 그만이지. 웬 핑계들이 그리 많은지.”
알레스의 거침없는 말에 순식간에 주위가 얼어붙었다.
드레스 자락을 꼬옥 움켜쥐며 더더욱 위축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안 그래도 울고 싶던 차에 뺨 한번 잘 때려 주었다며 드릉드릉 반격의 시동을 거는 이도 있었다.
마침내 성격 있어 보이는 영애 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누가 추기 싫어서 안 춰요? 여기 춤추는 법 모르는 사람이 있나? 파트너가 있어야! 출 거 아니야.”
춤추는 법 모르는 사람 여기 있소.
알레스는 켕기는 마음을 숨기며 건방진 표정을 유지했다.
방금 전 영애보다는 대가 좀 약해 보이는 영애 하나가 분한 얼굴로 따졌다.
“그, 그러는 당신은?”
자기야말로 왕따인 걸 모르나 봐.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직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못해 반가면을 쓴 주제에.
교류하는 이도 없고 춤 신청하는 남자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와 똑같이 후미진 자리를 배당받은 외톨이 주제에!
보아하니 이름도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혹시나 얻어걸릴지 모를 행운을 기대하며 꾸역꾸역 무도회에 참석한 게 분명하면서.
한 가지 살짝 찜찜한 부분이 있다면,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외톨이라기엔 걸치고 있는 드레스나 장신구들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우아하고 고급스럽다는 것 정도?
그나저나 저 드레스 디자인이 무척 파격적이면서도 멋스러운데, 어디서 맞춘 걸까? 아마도 어디서 빌려다 입은 거겠지?
저 귀고리랑 목걸이 심플하면서도 자꾸 눈이 가네? 어느 공방 제품이야?
저 구두는 어느 디자이너 거지? 본 적 없는 가죽 가공 방식인걸? 앞코도 특이하고.
영애들은 알레스를 향해 눈을 부라리면서도 재빨리 필요한 정보를 스캔했다.
“정말 뭘 모르는 레이디들이네. 파트너는 대체 뭐 하러 기다려요?”
뭐? 파트너를 왜 기다리느냐고? 지금 염장 지르는 거야?
이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알레스에게 억하심정을 품기 시작했다.
“당신이야말로 뭘 모르는 게 아닌가요?”
가장 심약해 보이는 영애마저 이렇게 대들 정도로.
지금껏 거만하게 앉아 영애들을 약 올리던 알레스는 분위기를 제압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최대한 눈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좌중을 휘어잡는 이런 연극적인 동작도 전부 샤를테론 예술단에서 전수 받았다.
“꼭 남녀 한 쌍이 파트너가 돼서 춤을 춰야 한다는 법은 없죠.”
“뭐라고요?”
“춤은 혼자서도 출 수 있고 여럿이 함께 출 수도 있어요.”
긴장했던 무리들이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알레스 자신이 춤을 추러 이 무도회에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 있는 다른 영애들도 남자랑 춤을 못 춰서 환장한 게 아님을.
남자와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음을.
아니,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게 따로 있음을.
하지만 바로 그 부분이 가장 짜증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못될지언정 못나지는 말자는 주의인 알레스에겐 특히.
이렇게 무기력하게 뒷방에 처박혀서 가망 없는 기대나 품을 바에야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 춤 한번 보고 싶네요. 전 꽉 막히고 머리도 나빠서 둘이서 추는 춤밖에는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는 너는? 그렇게 잘난 너는 왜 우리랑 똑같이 여기 있는데? 그럴듯하게 말하는 거야 쉽지.
그런 빈정거림이 담긴 말이었다.
알레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작 자신은 춤을 못 춘다는 것.
커플 댄스든 혼자 하는 몸부림이든 떼춤이든, 춤이란 춤은 그냥 다 못 춘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왜 하필 춤에 대해 입을 놀렸는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춤에는 쌍무도 독무도 군무도 있습니다만, 난 몸치라서 이만.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댄서나 연예인이 아니라도 춤을 못 추면 사람 취급 못 받던 저쪽 세상에서 푸대접을 받고 살아왔지만, 순간 알레스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저쪽 세상 춤이 하나 있었다.
그거라면 알레스 같은 몸치도 대충 얼치기로 흉내는 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함께 가실까요? 저쪽에 있는 작은 홀로요.”
적당히 민망해 하면서 쭈그러질 줄 알았던 알레스가 호기롭게 제안하자 다들 멈칫했다.
하지만 뭐. 어차피 오늘 무도회에서 수확을 얻기엔 그른 거 같고.
오지도 않을 춤 신청자를 기다리느라 좀이 쑤시던 들러리 영애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화사함과 즐거움이 넘치지만 그들만의 규율과 법칙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인 메인 홀을 벗어나 소박하지만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자신들의 장소로 향했다.
어쩌나 보자며 벼르는 사람 반, 호기심과 흥미로 살짝 들뜬 사람 반.
소규모 별실로 모여든 영애가 스무 명 남짓 됐다.
궁정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이 작은 홀까지도 흘러들어 왔다.
알레스는 쭈뼛거리고 있는 영애들을 향해 서두를 뗐다.
“여러분, 말 좋아하시죠?”
제국은 말 사랑이 유난한 곳이었다.
말 학대 방지를 위해 마차도 말이 끌지 않고 있으니.
다만 순수하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마정석에 얽힌 음흉한 뒷거래가 뒤섞여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어쨌든.
“말씀드린 대로 혼자 신나게 출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어울려서 추면 색다른 재미가 있는 춤을 소개해 드릴게요. 바로 호스 댄스라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알레스의 귓불과 목에 말편자 모양을 본뜬 독특한 귀고리와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는 것 역시 영애들은 놓치지 않았다.
“여러분 승마 익숙하시죠? 동작은 승마하는 자세와 비슷해요. 제가 한번 해 볼게요.”
알레스는 한때 저쪽 세상을 휩쓸었던 유명한 말 춤을 떠올렸다.
전 세계 남녀노소가 따라 했던 그 춤!
그만큼 동작은 어렵지 않으면서 중독성이 있는 춤이었다.
말은 이곳에서도 친숙한, 아니 매우 사랑받는 동물이므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에도 이보다 좋은 춤이 없었다.
“이렇게 양팔을 엇갈리고요, 고삐를 잡듯이 위아래로 나풀나풀 흔들어 주세요.”
확실히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다들 팔을 우아하게 하늘거렸다.
“팔 동작을 유지하면서 하체는 말 위에 올라탄 듯이 하고 스텝을 이렇게, 이렇게, 밟아 주세요.”
사실 알레스가 말 춤을 흉내 내는 모양새는 저쪽 세상 기준으로 하면 형편없었다.
하지만 원래 춤의 원형을 알 길이 없는 데다, 매우 신선한 춤사위를 접해 약간의 충격에 빠진 영애들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알레스로 말하자면, 아무렇게나 춰도 춤신, 춤왕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아시겠죠? 이 동작을 하면서 앞으로 헉헉, 뒤로 헉헉, 옆으로 헉헉, 움직일 수도 있답니다 헉헉. 여럿이 열을 지어서 달릴 수도 있어요.”
처음엔 쭈뼛대며 눈치를 보던 영애들도 어느새 알레스를 따라 하는 데 몰두해 주위 시선도 잊었다.
“자, 그럼 악단의 연주에 맞춰서 자유롭게 춰 보실까요?”
작은 홀에 모인 영애들이 열심히 습득한 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마다 받아들인 동작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어차피 말을 탄 모양새라는 이 춤의 정체성만 놓치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어느새 작은 홀은 독무와 군무로 흥겹게 출렁였다.
자칫 황궁 무도회의 분위기를 흐리고 사교계에 파문을 일으킬 만한 광경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동물의 모양을 본뜬 춤이었기에 어린아이들의 율동이나 평민들의 민속춤처럼 귀여운 맛이 있어 다행히 그런 비난은 살짝궁 피해갈 수 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민속춤이 개량을 거쳐 귀족들의 사교댄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까.
말편자를 본뜬 액세서리, 말편자 빵, 행운의 황금 말편자, 거기에 이번엔 말 춤까지.
정말이지 이쪽 세상에서 말이란 동물은 오로지 마차만 끌지 않을 뿐, 안 쓰이는 곳이 없었다.
간이 홀 안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처음엔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팔다리 움직이는 데만 급급하던 영애들이었지만, 그녀들의 얼굴에도 점차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재밌어요!”
“이렇게 흥겨운 경험은 처음이에요!”
“속이 다 시원하네!”
“이 맛이야!”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거 같아요!”
그녀들의 흥겨움에 전염되었는지, 춤이라면 질색하던 알레스마저도 조금 즐겁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때문일까. 알레스답지 않게 과감한 시도도 하게 되었다.
말 춤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조금 밋밋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다른 동작을 추가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 봤자 몸치 알레스가 구현할 수 있는 동작이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먼저 검지를 세워서 허공 찌르기! 엉성하기 짝이 없는 디스코, 디스코.
“허공을 푹푹 찌를 때마다 싫은 사람한테 삿대질하는 거 같아 속이 후련해요!”
이제 까르르 소리 내 웃기까지 하는 영애들이었다.
다음은 춤이라기보다 구령과 박수에 가까운 동작. 같은 쪽 발을 두 번 구르고 박수 한 번!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져 발동작이 크게 드러나진 않아도 바닥을 울리는 쿵쿵 소리와 손뼉 짝 소리가 딱딱 맞아떨어질 때마다 영애들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침 들려오는 연주는 빠른 3박자의 발츠로 쿵짝짝, 쿵짝짝이었지만, 우리는 쿵쿵짝, 쿵쿵짝 한다!
들러리 영애들은 서로 은밀한 눈빛을 나누며 흐뭇하게 웃었다.
마지막 동작은 뻣뻣한 알레스로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시도해 버린 웨이브.
서로서로 곁에 선 영애의 손을 잡은 뒤 팔을 파도처럼 꿀렁꿀렁 움직였다.
그 야릇하고 짜릿한 감각이 꼭 잡은 손을 타고 꿀렁꿀렁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 모여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이 영애들은 본래 무도회에 춤을 추러 온 것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야망 혹은 가문의 야심을 짊어지고 스스로 혹은 마지못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춤에 흠뻑 빠졌다.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오로지 춤과 자신의 맥박만이 세상에 남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과하게 심취한 어떤 영애는 홀의 기둥을 붙잡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후아, 정말 여한 없이 즐겼네요!”
연주가 끝나자 한 영애가 큰 숨을 토해 내며 이렇게 내뱉었다.
진심으로 그러하다고, 간이 홀에 모인 들러리 영애들은 생각했다.
‘이래서 댄스 테라피라는 게 있는 거구나.’
어째서 그 고문 같은 춤이 치유법이 될 수 있는지, 이쪽저쪽 세상을 통틀어 이해하지 못하던 알레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영애들에게 자신이 전수한 막춤이 훌륭한 치유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신조차도 방금 전의 찜찜하고 묘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알레스는 다른 영애들처럼 마냥 홀가분한 기분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말로 중요한 비즈니스는 지금부터 시작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