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조금 흐뭇하고 조금 서운한
서버가 전해 준 그의 쪽지.
[그쪽으로 갈까요?]
알레스가 다시 다급하게 서버에게 손짓했다.
[아니요!!! 전 오늘 눈에 띄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느낌표를 세 개나 찍었다.
[그럼 테라스에서 만날까요? 여기 공기가 탁하군요.]
[마침 급한 볼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해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즐거운 무도회 되길 바라며.]
[천천히 와요. 다 끝나면. 마음 쓰지 말고.]
쪽지가 몇 차례 오가자 서버의 얼굴에서 처음의 야릇한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이러려고 황궁에 들어왔나. 그런 자괴감만이 눈 밑에 거뭇하게 남아 있을 뿐.
알레스는 다시 그를 불러 쪽지를 건네는 대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실이든 휴게실이든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홀을 가득 메운 차렌토 춤곡 ‘달아난 약혼녀’처럼 알레스는 공작의 관심을 피해 달아났다.
알레스가 자리를 비우자 공작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는 중얼거렸다.
“귀여워.”
옆에 있던 브린 황자가 흠칫하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중하게.”
“자네한테 그런 말을 다 듣게 되다니.”
“나도 푸른 불꽃의 고결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어디 가서 말도 못 해. 누가 믿겠어?”
“자네도 보지 않았나? 귀여운 모습.”
“귀여운지 아닌지 잘 보이지도 않는구만. 시종 부산하기만 하던데. 그런 게 좋나?”
브린의 핀잔 섞인 물음에 카이트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허. 브린은 새삼 어이가 없고 신기했다.
건어물 공작의 그 담백한 미소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면서 춤 연습을 하더니, 춤은 안 추나?”
왠지 어색해진 브린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춰야지.”
“언제?”
“내가 아니라 그녀가 추고 싶어 할 때.”
아 놔, 왜 물어봤을까. 브린은 괜히 외로운 기분이 들어서 춤 파트너를 찾아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 로잘린.’
브린의 눈에 반가면을 쓴 여동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진작 자신들의 자리로 달려들어 카이트 오라버니에게 춤을 추자고 졸랐을 로잘린이 지금껏 잠잠했다.
아니,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로잘린은 아직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이 로잘린을 통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영애들로, 황녀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축제 강연회 때 연모인 클럽 간의 충돌과 갈등을 중재하고 건전한 연모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쓴 황녀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로잘린은 <빌보아 차트> 3위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제 응석과 우기기와도 안녕이겠구나, 로잘린.’
저렇게 된 마당에 예전처럼 카이트 오라버니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채신머리없이 굴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조금 흐뭇하고 조금 서운하고 많이 심심해질 거 같네.’
성인이 되는 가면을 선물 받은 여동생을 보며 브린 황자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역시 난 춤이나 춰야겠어. 미래의 형수님께 한 곡 청해 볼까?”
브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알레스는 세면실에서 괜히 손을 씻고 거울을 보았다.
반가면을 썼으니 화장은 고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대여섯 명의 무리가 세면실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들은 들어오는 순간에도 이미 무언가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설원의 외로운 늑대 같지 않았어요? 고우신 얼굴에 그토록 야성적인 눈빛이라니.”
“어머, 티리프 영애. 표현이 너무 절묘하십니다. 전 오늘 그분께 더 깊이 빠져들게 됐답니다.”
“저도요. 그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을 보셨어요? 마치 고상한 얼음 조각상 같잖아요. 전 그런 냉랭한 분께 끌리더라고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호호호.”
“아니에요, 카밀라 영애.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저도 그런 걸요. 무정한 모습이 야속하지만 왠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요.”
그들은 세면실에 있던 알레스나 다른 영애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상기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누구…?’
알레스는 설마 하며 그들의 열띤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 고백할 게 있는데요. 실은 카르티에 전하를 흠모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마차를 완전히 갈아탔답니다.”
“휴우, 두 분은 루비와 사파이어처럼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니고 계신지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 너무 가혹한 주문이에요. 하지만 제 취향도 얼음 왕자님 쪽으로 조금 더 기우네요, 오호호호.”
“오죽하면 황녀 전하도 푸른 불꽃의 고결 멤버이셨겠어요. 지금은 본인이 연모인들을 거느리게 되셨지만.”
알레스는 흠칫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의 평판은 전혀 나빠지지 않았다.
아니,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갈팡질팡, 긴가민가하던 사람들까지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 같았다.
영애들은 그 무심하고 싸늘한 모습에 더 달아오른 듯했다.
“다 떠나서 너어무 준수하지 않으신가요? 정말 너무 아흑….”
영애 하나가 말하다 말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얼씨구? 알레스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어휴 난 몰라. 스타필드 영애, 나 그 감정 뭔지 알아요. 잘 빠진 한 자루 검 같지 않아요? 당장이라도 벨 것처럼 위험한데 또 한편으론 너무 아름다워서 이끌리게 되는…. 아아, 난 몰라아아.”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알레스는 헛웃음을 쳤다.
“페링 대해와도 같은 어깨라는 말을 오늘 실물로 보았지 뭐예요. 겨울을 제외하고는 늘 전장에 계신다더니 체형이 아주 근사하세요.”
“매우 보기 좋게 자리한 근육이지요? 어머, 제가 너무 무례하게 말했나요?”
한 영애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글쎄, 퍼클랜드 자작, 제 남동생 말이에요. 어디서 이상한 격투기를 배워 와서는. 근육이 붙긴 했는데 정말이지 몹쓸 모양새이지 뭐예요. 그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영애의 표현은 다소 숙녀답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엔 결코 거짓이 없습니다.”
“어머, 우리 모두 너무 앙큼한 거 아닌가요, 호호호.”
“하지만 우린 전하의 고고한 사상과 고상한 문장도 사랑하잖아요. 전하의 저서를 단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사서 몇 번씩 읽었다고요.”
“전 같은 책도 증쇄될 때마다 다시 사서 구비해 놓는답니다. 가장 많이 팔린 전하의 저서인 <인간의 가치>는 1쇄부터 23쇄까지 각각 세 권씩 사서 한 권은 닳도록 읽고 나머지 두 권은 장서 보관 전용 캐비닛에 고이 모셔 두었답니다.”
“크리스티 영애의 열정은 정말 못 당한다니까요.”
“언제 한번 명 구절 암기 대회 같은 걸 열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거 멋진 생각이네요.”
그 뒤로도 꺅꺅뀨꺄악 하는 영애들의 호들갑은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알레스는 점점 기분이 묘해졌다.
이런 결과가 의도된 건지 아니면 그저 될놈될인 건지 알 수 없지만, 알레스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이 무도회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남자 요망하네.’
공작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
그래서 영지도 덩달아 알려지고 여행객이 몰려들게 하는 것.
공작의 저서는 물론 공작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것에 사람들이 환장하며 돈을 물 쓰듯 쓰는 것.
이 모두가 자신이 바라던 일이었는데.
평소라면 공작의 매니저로서 매우 흡족한 얼굴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얄팍한 기쁨에 젖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의아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이 순간에 뜬금없이 마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 건지.
「저어,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공작이 처음 <빌보아 차트>에 등장했을 때 마사가 무언가 걱정하는 얼굴로 한 말이었다.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든다는 건 안 괜찮다는 뜻일까.’
왜 안 괜찮은 거지? 뭐가 안 괜찮은 거야?
스멀스멀 달라붙는 낯선 감정에 알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좋아. 매우 안 좋아.
무엇보다 공작은 정식 계약까지 한 자신의 고객이 아닌가.
이런 중요한 순간에 엉뚱한 사심에 빠져 있는 건 프로답지 못한 태도였다.
여전히 푸른 불꽃의 고결을 연모하는 마음을 경쟁적으로 늘어놓는 영애들을 뒤로 하고 알레스는 세면실을 나섰다.
복도를 따라 다시 홀로 향하는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있는 걸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다 모호한 행동을 하는 카이트 때문이야! 거기 말려들어서 괜히 헷갈린 거라고. 맞아, 그래!’
첫 춤 타령은 은인 가문의 레이디를 향한 오빠 마음이고, 입맞춤은 카이트는 기억도 못 하는 접촉사고였고.
우리 사이엔 계약과 이행. 그것밖에 없다.
알레스는 공작을 원망까지 해 가며 낯설고 찜찜한 감정을 떼어내려 애썼다.
그렇게 다소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 자리로 돌아온 알레스는 저절로 공작의 좌석부터 살폈지만, 공작과 황자 모두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불빛이 쏟아지는 저 플로어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파트너가 되어 춤이라도 추고 있나 보다고 알레스는 생각했다.
‘그럼 나도 슬슬 접근해 볼까?’
어떤 식으로 네슬라 영애의 평판을 수집할까 궁리하던 알레스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까부터 어떤 소리가 알레스의 신경을 긁어 댔기 때문이었다.
실은 진작부터, 공작과 쪽지를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일 때부터 거슬리던 소리였다.
제 코가 석 자요, 남의 일에 참견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못 들은 척하고 있었을 뿐.
“후우….”
“휘유….”
“히유우우….”
“에휴우우….”
이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주를 이뤘고.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대체 뭘 바라고 여길 온 거야.”
“나 같은 걸 누가….”
자기 비하나 한탄이 아니면.
“가문만 좋았어도.”
“솔직히 말해 저기 있는 영애들이 우리보다 나은 거라곤 타고난 배경밖에 없잖아요?”
“끼리끼리 밀어 주고 끌어 주고. 우리 같은 사람은 낄 수도 없다고요.”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불만이나 원망이었다.
이 구역이 유독 칙칙한 건 원래 구석지고 어두컴컴한 자리여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런 소리들이 분위기를 더욱 꿀꿀하게 만들고 있기도 했다.
춤 신청을 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춤 신청을 받는 사람도 없는, 무도회장 속 외딴섬 같은 이곳.
어느 세상에서나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났다.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고.
하지만 묘한 위축감, 열등감과 싸우고 있던 알레스는 이 소리들이 견딜 수 없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정말 구차해서 못 봐 주겠네.”
쓸쓸한 레이디들의 구역에 건방진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