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무도회의 냉미남
한 마리 인어 같은 오하라 가넷 네슬라.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답게 드레스도 무척 아름다웠다.
머메이드라인을 변형해 늘씬한 몸매를 돋보이게 한 청보랏빛 드레스는 흑진주로 촘촘하게 장식돼 있었다.
「짐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갑자기 음성 지원이 되는 황제의 희망사항.
저 정도 미모면 좋아하지 않을 까닭이 없겠고. 아니, 과분하지!
똑같이 청보랏빛 드레스를 선호하는 걸 보면 취향도 비슷한 거 아닌가 싶고.
카리스마 있는 언니 스타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황비 자리에도 꽤 잘 맞을 것 같았다.
인어와 대왕오징어라니, 은근히 어울리는 한 쌍의 용궁 커플이었다.
다만 마사의 말을 들어서 그래 보이는 건지, 그녀의 얼굴이 왠지 우울하고 수심에 차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디 스노브 영감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리 편, 아니 폐하와 백성들 편에 서 주시길.’
그와 같은 기원을 하면서 홀을 한 바퀴 둘러보던 알레스의 녹안이 한곳에 뚝 멈췄다.
‘카이트….’
황제석과 황비 후보자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메르세데스 공작의 자리가 있었다.
친우인 브린 황자도 동석하고 있었다.
그렇다. 카이트는 밝고 화려한 메인 구역의 일원인 것이다!
평소 북부 명문가니 개국공신 가문이니, 황제도 무시 못 할 군사력과 재력을 지닌 북부 얼음 방패니, 4공작 중에서도 동부 공작가인 카르티에와 자웅을 겨루는 제국 귀족의 쌍두마차니 하는 수식어를 지겹도록 듣긴 했다.
하지만 그뿐, 알레스는 그에게서 어떤 거리감이나 벽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마사가 메르세데스 공작을 두고 헛된 꿈을 꿀 때마다 ‘한미한 가문의 이혼녀가 어찌 감히’란 말을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지만, 정말로 자격지심 같을 걸 가진 적은 없었다.
‘하긴 뭐 제국의 태양인 황제한테도 꿀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구역에 앉아 있자니 둘 사이의 계급 차이가 생생하게 실감이 났다.
두 자리 사이에 놓인 거리가 두 사람 사이의 거리인 것만 같았다.
“이거 안 좋은걸.”
알레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위축감, 자격지심, 자기연민 같은 심리가 생겨나는 건 싫었다.
못된 년이 될지언정 못난 년이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걸 보면 느끼는 그대로 아,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하구나 감탄하면 되는 거야.’
그 혹은 그녀가 멋진 건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알레스는 구차한 감상에 빠져드는 대신, 푸른 불꽃의 고결이라 불리는 북부 공작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안구정화나 해 보기로 했다.
본바탕이 훌륭하니 뭐 조금만 꾸며 줘도 분위기와 잘생김이 줄줄 흘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저마다 한껏 멋지게 차려입었어도, 어깨가 그만큼 넓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공작이 우락부락 남성미를 과시하는 그런 스타일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얼굴은 섬세하니 여성적인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데, 체격이나 체형은 어이쿠나 탁월했다.
저런 걸 저주 때문에 그동안 사람들이 제대로 향유할 수 없었다니, 참으로 전 인류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이 달린 인간이면 다 같은 생각인지, 벌써부터 메르세데스 공작의 주위를 서성이며 수군거리는 영애들이 알레스의 눈에 띄었다.
하긴 이제는 저주받은 건어물 공작이 아니라 <빌보아 차트> 상위 10위권에 빛나는, 팬클럽 부대를 몰고 다니는 인기남이시니.
여기서 잠깐, <빌보아 차트> 만년 1위에 빛나는 사교계의 별이자, 메스세데스와 쌍벽을 이루는 카르티에 가문의 원조 인기남은 대체 어디서 뭘 하시는 건지?
알레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폐하가 돋보여야 하는 자리 아닌가요? 내가 가면 폐가 될 겁니다. 주인공이 무사히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무도회엔 불참하는 게 신하 된 자의 도리이자 예의지요.」
얼마 전 럭셔리 제품의 홍보나 유통은 어떻게 하는지, 노하우를 좀 캐물을까 해서 저택을 방문했다가 이처럼 느끼하고 방자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레이디 페레티가 참석한다고요? 그… 무도회에? 카이트도 참석한다고요? 이런이런… 초대장에 불참 회신을 한 게 후회되는군요. 내가 얼마나 재미를 추구하는지 아시죠? 벌써부터 애가 닳는 기분이군요.」
이런 은근 약 오르는 말도.
다시 생각해도 카르티에는 참, 짓궂으면서도 기이한 사람이야.
알레스는 콧속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여하튼 그런 웃기는 이유로 카르티에 공작이 불참한 무도회에서 메르세데스 공작은 더욱 관심을 한 몸에 샀다.
푸른 불꽃의 고결은 이름처럼 서늘하고 유혹적이며 고고했다.
이 표현들이 함께 있는 게 모순인 것 같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고 어떤 영애가 흥분해서 말하는 걸 알레스도 들었다.
다만….
‘표정이 왜 저래? 꼭 뭐 씹은 얼굴이잖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길고 갸름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모습이 도도하고 새침해 보였다.
‘안 어울리게 왜 저러고 있담? 팬서비스 몰라요, 팬서비스?’
알레스는 답답한 마음에 버둥거렸다.
영지 겨울여행 패키지도 홍보하고 손님도 끌어야 하는데 그렇게 냉기만 흘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요!
몇몇 영애들이 다가와 인사라도 할라치면 마지못해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는데, 그때 드러난 그의 눈은 평소에 보던 눈이 아니었다.
북부 메르세데스의 빙벽처럼 차갑고 무표정했다.
기껏 호감을 가지고 다가왔던 영애들이 흠칫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옆에 앉은 브린 황자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바쁜 듯했다.
물론 그가 유들유들하고 사교성 넘치는 인간형은 아닌 거야 진작 밝혀진 사실이다.
하지만 건어물과 냉동생선은 엄연히 다른 법.
그는 뻣뻣할지언정 차가운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 뻣뻣한 고지식함 속에는 소년 같은 쑥스러움과 호기심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알레스는 형편상 다가가 귀띔해 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카이트! 영지 홍보, 책 판매, <빌보아 차트> 순위 올리기!’
혹시나 하고 가망 없는 텔레파시만 쏘아 볼 뿐.
바람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메르세데스 공작 때문에 알레스가 안달복달하고 있는 사이 마침내 무도회의 막이 올랐다.
알레스의 무관심 속에 이미 입장해 있던 아가판투스 황제가 뭐라 뭐라 개회사를 했다.
지금 보니 황제석에 반가면을 쓴 백금발의 영애가 앉아 있었다.
아직 데뷔탕트 볼을 치르지 않은 로잘린 황녀일 터였다.
황제의 개회사가 끝나고 궁정 오케스트라가 연주 준비를 마쳤다.
황제가 네슬라 영애의 손을 이끌고 플로어로 나오자, 여기저기서 짝을 이룬 남녀가 걸어 나와 춤을 추기 위해 정렬했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무난하고 경쾌한 3박자의 발츠였다.
쿵짝짝 쿵짝짝.
파트너와 살짝궁 몸을 맞댄 이들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미끄러졌다.
‘어디, 첫 춤 애호가 카이트는 어쩌고 있나 볼까?’
충실한 매니저인 알레스는 다시 공작 관찰에 들어갔다.
어쩌고 있긴. 여전히 냉기를 줄줄 흘리며 아름답지만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냉미남의 정석을 보여 주고 있었다.
기껏 용기를 내 춤 신청을 하러 다가오는 영애들이 있었지만, 공작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려 말도 못 꺼내고 물러서기 일쑤였다.
“자네 때문에 나까지 춤을 못 추잖아!”
잘 들리진 않지만 브린 황자가 이렇게 항의하는 듯했다.
‘저러다 카이트의 평판이 나빠지면 어쩌지? 이미지와 차트 순위를 한 방에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야.’
알레스의 좁아진 미간 사이로 불길한 기억 하나가 슬몃 떠올랐다.
‘아니야, 아닐 거야….’
「주제넘은 소린지 몰라도 몇 마디 더 할게요. 제가 카이트의 매니저이기도 하니까요.」
「카이트는 너무 물렁해요. 또 너무 헤프고요.」
「눈빛이든 표정이든 결코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고요. 그렇게 다정다감한 눈빛은 안 된다고요!」
그때 한 말 때문에 저러고 있는 건 설마 아니겠지?
그래서 저런 얼음 같은 얼굴로 철벽, 아니 빙벽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이 융통성 없는 고객님아!
알레스가 부글거리며 공작을 째려보고 있을 때였다.
‘어?’
뭔가 이상한 느낌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공작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우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꽤 먼 데다, 밝은 중앙에 있는 공작을 알레스가 찾는 건 쉽지만 어둑한 구석에 있는 알레스를 공작이 알아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거기다 반가면까지 착용하고 있는데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것이며, 더욱이 눈이 마주칠 수는….
‘어어?’
…그럴 수는 없는데 어째 또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아니, 이제 보란 듯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거 같다?
알레스는 찌르르한 감각이 등을 타고 내려가는 걸 느꼈다.
‘정말로 나를 알아본 거야?’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며, 자신이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설마, 착각이겠지. 중얼거리던 알레스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얼음 조각 같던 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심쿵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벼락같은 미소였다.
접촉사고를 일으켰던 그 도톰한 입술은 예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알레스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순식간에 다시 얼음 가면으로 돌아간 공작은 서버를 불러 무언가를 건넸다.
그때쯤엔 알레스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서버가 자기한테 오리라는 걸.
짐작대로 얼마 후 서버는 알레스에게 공작의 쪽지를 전해 주고 갔다.
펼쳐 보았더니.
[나 잘하고 있나요?]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알레스는 편두통이 오는 거 같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알레스도 쪽지를 써서 아마도 일부러 멀리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아까 그 서버를 불렀다.
연주는 어느덧 발츠에서 오베레와 차렌토로 넘어가며 더욱 빨라지고 격정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젊은 귀족들의 프림로즈 무도회답게 우아함보다는 정열과 기쁨과 환희가 홀을 가득 메웠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무도회에선 춤을 추셔야죠. 표정도 좀 푸시고요. 카이트는 영지의 얼굴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영애들에게 좀 더 다정히.]
더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홍보 행위를 강요하고 싶었지만 겨우 절제한 알레스의 쪽지가 공작에게 전해졌다.
쪽지를 읽은 공작의 얼굴은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뾰로통해져 있었다.
알아들은 걸까? 알레스는 공작이 자신의 주문을 제대로 접수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영애들에게 자본주의 미소를 날리는 대신, 또 서버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