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자리가 어디예요?
마사가 안타까운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몸싸움 쪽은 밤비 경이 알려드릴 거예요.”
“호신술 얘기가 농담이 아니었네?”
“농담이라뇨? 방금 다 말씀드렸잖아요. 부상자들을 제 눈으로 봤다는 말씀까지 드렸는데….”
이제 와서 왜 답답하게 구느냐는 표정으로 마사가 알레스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저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폭력 사태라니요.
귀족 영애가 아니고 깡패들이니? 쇠파이프는 안 휘두르나?
내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냐고요!
알레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항의했으나 간단히 무시됐다.
대신 밤비가 준비해 온 것들을 풀어 놓았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호위 기사인 제가 동행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알아두시면 나중에라도 유용하실 거예요.”
아니, 유용할 일이 없어야지, 밤비 경.
밤비의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을 보며 알레스는 울상이 될 뻔했다.
“갑자기 발을 걸어오거나 팔꿈치로 티 안 나게 가격해 오거나 여러 명이 집단으로 몰려와 구석으로 몰아붙일 때 대처하는 요령과 기술 몇 가지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밤비 경, 몰매 맞으면서도 얼굴은 지키는 법도 아가씨께 알려드리세요.”
훈련 내용을 듣는 알레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차 사라졌다.
“허허, 뭐 흉기 같은 건 안 휘두르나? 무기는 안 챙겨 와?”
알레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던진 농담에 밤비의 진지한 설명이 뒤따랐다.
“황궁이라 흉기나 무기는 소지할 수 없습니다만, 소지품을 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말씀 잘 하셨어요. 제가 깜빡 놓칠 뻔했습니다. 부채나 손가방, 액세서리를 무기처럼 사용할 경우 대처하는 법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연장도 휘두르잖아!
폐하, 아니 이 원수 같은 대왕 오징어가 날 사지로 몰아넣은 게 맞잖아!
저쪽 세상이었으면 ‘이거 깜짝 카메라죠?’라고 물어봤을, 그런 기막힌 상황이 알레스 앞에 펼쳐졌다.
* *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알레스는 혹독한 특훈을 어찌어찌 받아냈다.
내가 왕년에 직장 정글에서도 버텨 낸 표독한 사내 악녀인데 말이야!
이런 철딱서니 없는 귀족 소꿉놀이에 발릴 수야 없지! 하고 이를 악물면서.
이제 막 황궁 연회장인 골든 아메시스트 홀 입구에 당도해 초대장을 내 보이는 알레스는 마치 결승 무대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본인은 이 무도회의 주인공도 아니요, 사교계의 나비나 꽃, 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비록 반가면을 쓴 사교계 애벌레, 아니 아직 부화도 하지 않은 메추리알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실수나 허술함도 허용해선 안 된다고 되뇌었다.
허점을 보이는 순간 상대방의 펀치를 맞고 바닥에 고꾸라지게 될 테니까.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야!
알레스는 우아하게 걷고 나른하게 고개를 하늘거렸지만 속으로는 결의를 다지며 눈동자를 부산하게 굴려 주변 동태를 살폈다.
오늘 알레스의 착장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였다.
너무 튀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평범해도 안 된다.
고상하지만 지루해선 안 되고, 고급스럽지만 은근해야 한다.
첫인상은 흐릿하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져야 하고, 심플하지만 깊이가 느껴져야 한다.
화려하진 않아도 강렬해야 하고, 담백하면서도 관능적이어야 한다.
이게 무슨 개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야!
상사나 클라이언트가 저런 요구를 했다면 아마 분노와 짜증과 살의로 오장육부가 떨렸을 거다.
하지만 밤비 경은 침착하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또 해냈다.
알레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딱히 눈길을 끌지 않으면서도 돌아서면 자꾸만 생각나 ‘그거 어디서 주문했을까?’ 알아보고 싶어지는.
생각할수록 점점 안 사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 같고 밤잠이 안 올 거 같은 그런.
중독성 강한 마성의 패션 아이템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성대한 파티에서 좌중을 압도할 화려한 착장은 아니지만, 우아하고 격조 있는 데일리 룩으로 환영 받을 의상과 소품들.
그것이 이번 무도회를 겨냥해 밤비 경이 준비한 ‘매그놀리아 컬렉션’의 콘셉트였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안목 있는 사람만 알아보든 말든.
이 무심하고 도도한 태도가 이 꾸안꾸 컬렉션의 전반적인 무드였다.
사실 다소 왜소한 체형에 말괄량이 같은 소녀미가 남아 있는 알레스에게 그다지 어울리는 착장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디자이너인 밤비 경에게 더없이 잘 어울릴, 심플하고 우아하면서도 유니크한 아이템들이었다.
아쉬운 대로 반가면으로 인상을 지운 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밤비의 작품들로 차곡차곡 채웠다.
너무 과하지 않게, 아이템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PPL인 게 너무 티 나지 않게. 배치에도 신경을 썼다.
치밀하게 계산된 광고판 레이디는 드디어 무도회장에 무사히 입장했다.
홀 내부는 그 이름 그대로 신비하고 투명한 보랏빛 자수정과 황홀한 순금 장식 그리고 수천 개의 크리스털을 세공한 눈부신 샹들리에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자수정을 닮은 자안은 맥켈란 황족의 특징이었다.
빛과 빛이 부딪쳐 쏟아져 내리는 골든 아메시스트 홀에서 알레스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저쪽 세상 선글라스가 간절해지는 눈부심이었다.
오, 선글라스는 어떨까?
알레스는 무도회장이라는 것도 잊고 손뼉을 칠 뻔했다.
다음 시즌 주력 아이템으로 선글라스 낙점!
알레스는 저쪽 세상에서 본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 속에서 우아하고 고전적인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하고 블링블링한 액세서리를 착용한 주연 배우는 조막만 한 얼굴을 거의 다 덮는 오버사이즈의 선글라스를 꼈더랬다.
꽤나 유명한 그 장면―게다가 빵과 모닝커피를 테이크아웃 한 장면이었다!―을 인상 깊게 봤던 알레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쪽 세상 귀족들의 차림과 선글라스가 위화감 없이 매우 잘 어울릴 것임을.
생각해 보니 우아하고 시크한 밤비 경의 디자인과도 찰떡궁합이다.
밤비 경이 디자인한 제품들을 착용하고 선글라스로 부은 눈을 가린 채 헤라클레스의 빵과 카르티에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레이디들이라.
정말이지 바람직한 이 시대 셀럽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알레스는 다음번 유행시킬 트렌드에 ‘티파니 플랜’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버렸다.
‘아, 메르세데스령 여행 상품에도 선글라스를 포함시켜야겠다. 겨울이면 온통 눈으로 뒤덮이는 곳이니까.’
선글라스 끼고 사탕당근 시럽을 얹은 빙수 먹기는 어떨까.
하얀 눈밭 한가운데 노천탕을 만드는 건?
뜨거운 탕 안에서 살얼음 맥주 마시기는 어떨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업 아이디어에 행복한 미소를 짓던 알레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선글라스를 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주위가 매우 어둑하고 칙칙해졌던 것이다.
그 화사하게 넘실거리던 빛은 어디로 갔담?
행복한 상상에 빠져 헤벌쭉하고 있는 사이 알레스는 어느새 자신의 지정석으로 안내돼 있었다.
알고 보니 넓은 홀은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돼 있고, 춤을 추지 않을 때 각자 대기하는 좌석도 지정돼 있었다.
일반적인 중소형 홀에서야 지정석을 두기 힘들지만, 황궁 연회장은 워낙 규모가 크니 전통적인 격식에 맞춰 좌석을 갖추고 있었다.
춤추는 장소도 메인 홀 외에 크고 작은 별도의 홀이 있을 정도였다.
다만 지정좌석제는 자리만으로 그 사람의 서열을 한눈에 드러낸다는 냉정함이 있었다.
어차피 이곳은 엄격한 계급사회이고 귀족 사이에도 엄연히 서열이 존재했지만, 알레스에게 그 구별이 이처럼 실감나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서열이 있다니까 있나 보다 했지, 그리 와 닿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리만 봐도 누가 이 무도회의 주빈인지, 쭉정이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앉는 자리는 흡사 카바나처럼 독립적이고 안락해 보였다.
공간도 널찍한 게 춤추다 피곤하면 데이 베드처럼 생긴 안락의자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될 거 같았다.
그에 비해 지금 알레스가 안내된 곳은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역으로, 주빈들의 자리에 비하면 역 대합실 같은 느낌이었다.
개별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몸을 기댈 의자 하나씩을 배당받은 게 전부였다.
물론 알레스는 별로 불만이 없었다.
이 후미진 자리가 남의 눈 피하기에도 좋고, 조용히 활동하기에도 편하니까.
살짝 구석지긴 했지만, 은밀하게 차단된 장소가 아니라 훤히 공개된 장소라 밤비 경의 작품들을 널리 두루두루 보여 줄 수도 있고. 웅얼웅얼.
반가면까지 쓰고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춤추자고 귀찮게 할 남자도 없을 테고. 중얼중얼.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해 입장하는 중이었고, 아직은 황제의 개회사도, 연주도 시작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삼삼오오 어울리며 친분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머니 생신 선물로 본영지의 저택에 로즈 가든을 새로이 조성할 계획이랍니다.”
“카르티에 전하가 내년 봄 시즌에 선보일 퍼퓸의 시향회에 초대해 주셔서, 호호. 향이 아주….”
“마정석 가격이 또 오를 거라고 하던데. 미리 사 두는 게 좋을까요?”
“평민들 사이에서 치맥콘이라는 게 유행이라는 거 아세요?”
“공유 마차 마부들은 날이 갈수록 미모에 물이 오르는 것 같아요.”
딱히 한담을 나눌 이도 없는 알레스는 홀 안에 수근수근 깔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를 흘려들으며 마사가 한 말들을 곱씹었다.
황비 후보자 오하라 가넷 네슬라에 관한 보고였다.
「조금 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용인들 중에서도 네슬라 영애의 최측근들만 안다는 얘긴데.」
「원래는 평범한 깍쟁이 영애였다고 해요. 적당히 엄하고 까탈스러운. 지금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대요.」
「당연한 것도 기억을 잘 못하고 갑자기 성격도 변한 거 같고.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데 그때 보면 눈빛이 꼭 다른 사람 같대요.」
「황비 후보로 추대하는 일 때문에 스노브 후작이 네슬라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한바탕 큰소리가 오갔대요.」
몇 차례 곱씹던 알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노브가 또 뭔가 수상쩍은 짓을 꾸민 걸까? 매우 마음에 걸리는 얘기들이었다.
알레스는 저 멀리 휘황찬란한 구역을 눈으로 훑으며 네슬라 영애를 찾았다.
자리가 나눠져 있는 게 이럴 땐 편리했다.
오늘 무도회의 주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그녀 아닌가.
황제의 자리로 짐작되는 가장 화려한 특별석 바로 옆, 역시 화려하게 꾸며진 자리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네슬라 영애의 외모 특징은 이미 기사나 귀족 연감 등을 통해 파악해 놓고 있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체형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매끄러운 은발에 아쿠아마린처럼 반짝이는 연청색 눈동자.
인어가 연상되는 우아한 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