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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81화 (81/120)

81화

지옥에서 온 무도회 특훈

“레이디는 춤을 추셨다 하면 무조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거예요.”

“그렇군요….”

처음부터 무도회에서 춤을 출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공작의 첫 춤 타령 때문에 춤을 배워 보려 한 건데….

저쪽 세상에서나 이쪽 세상에서나 춤과는 인연이 없는 걸로.

‘미안해요, 카이트. 약속은 지키겠지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닐 거예요.’

무도회까지 시간이 얼마 없는 데다, 황제에게 의뢰 받은 일에 상품 홍보에 신경 쓸 거리만도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춤이 재앙을 불러올 거라는 선고까지 받은 마당에야.

알레스는 춤에 대한 미련을 깔끔히 내려놓기로 했다.

공작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치부를 보여 주는 걸로 대가를 치르기로.

원숭이 춤을 추다 코가 깨지는 레이디의 모습이란 매우 놀랍고 특별한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 * *

“아가씨, 춤은 잘 배우고 오셨어요?”

“으응, 대충.”

“지금은 좀 피곤하실까요? 저랑 밤비 경이 무도회를 위해 준비한 게 좀 있는데요. 피곤하시면 전략 회의는 다음으로 미룰게요.”

벌써 전략 회의? 임무를 맡긴 지 얼마나 됐다고.

알레스는 두 측근의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난 괜찮아요. 여러분이 준비한 걸 얼른 듣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세 사람은 주로 회의실로 쓰는 방으로 향했다.

이미 설명판까지 꺼내 놓은 상태였다.

지난 축제 강연회 때 메르세데스에서 파견한 아이언스 경이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직사각형의 판에 직접 내용을 쓰고 지울 수도 있고, 미리 준비한 자료를 띄울 수도 있는 간단한 마도구였다.

저쪽 세상으로 치면 화이트보드와 빔 프로젝터를 합친 것쯤 될까.

아이언스 경이 메르세데스로 돌아갈 때 밤비 경이 두고 가라고 압박해 얻은 물건이었다.

마사가 역시 마도구인 전용 펜을 들어 설명판에 썼다.

‘악의적인 공격에 대처하는 법.’

마사의 취향을 듬뿍 담은 핑크색 글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저 앙큼하고 깜찍한 글자 모양과 거기에 담긴 호전적 의미 사이에서 알레스는 잠시 멍해졌다.

마사에게 부탁한 임무는 분명 네슬라 영애에 대해 조사하라는 거였고, 밤비 경에게 부탁한 임무는 분명 무도회에 선보일 럭셔리 상품을 준비하라는 거였는데.

악의적인 공격에 대처하는 법은 둘 중 어디에 속하는 내용인지?

의문으로 가득한 알레스의 눈빛은 아랑곳없이 마사는 열의로 가득 찬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흔하고 빈번한 공격은 드레스에 고의로 차나 술을 쏟는 거예요.”

“저, 잠깐만, 마사.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희가 연회장에 들어가 본 적은 없어도 예비용 드레스를 챙겨서 동행한 적은 있거든요. 마차에서 대기하면서 다른 가문 고용인들한테 이런저런 얘기도 얻어듣고요. 그때 별별 일이 다 있었다니까요.”

“그 얘길 왜 지금 하는 건지…. 네슬라 영애에 관한 조사나 밤비 경의 컬렉션 홍보 전략은 어쩌고?”

“그쪽이라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저희가 알아서 꼼꼼히 준비할 테니까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고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 저게?”

알레스가 손가락으로 설명판을 가리키며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가 사교계의 살벌함을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요. 연회장 바깥에서 대기하다 보면 안에서 별별 소동이 다 일어나더라고요. 전쟁터나 다름이 없어요.”

언젠가 로잘린 황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게 알레스의 기억 속에 또렷이 떠올랐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사교계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을걸요?」

과장 아니었나요?

“고용인들이 예비용 드레스나 장신구를 챙겨 가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구급약이나 응급 치료용 마정석도 필요하고요. 발목을 삐끗하거나 무릎이 깨진다거나 손바닥이 까지는 건 흔한 일이었죠. 가벼운 화상을 입기도 하고요.”

“아, 그러니까 전쟁터 같은 무도회에서 가장 흔히 일어나는 공격이 고의로 차나 술 쏟기라는 거야?”

“네, 무도회 드레스는 며칠에 걸쳐서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공을 들이잖아요. 그걸 한순간에 엉망으로 만드는 심술궂은 공격이죠.”

“그렇게 유치하다고? 고상한 귀족 영애들이? 어린아이들도 안 그러겠다.”

귀족 영애라 쓰고 개망나니라고 읽습니다. 마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그게 현실인 걸요. 굳이 술잔이나 찻잔을 들고 접근하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술이나 차가운 음료야 뭐, 준비해 간 여벌 의상으로 갈아입으시면 되지만 뜨거운 차는 반드시 피하셔야 해요.”

뜨거운 차를 고의로 쏟다니 제정신인 거야?

“특히 아가씨는 노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 같으니 예비용 드레스랑 장신구를 넉넉히 준비할게요. 참, 구두도 많이 망가지는 품목 중 하나니까 넉넉히 챙겨 가고요. 또 구급약이랑 의료용 마정석도 잔뜩….”

알레스가 손을 뻗어 마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난 그날 반가면을 쓴다니까. 프림로즈 무도회라 데뷔탕트 볼을 치르지 않은 이들도 반가면을 착용하고 참석할 수 있다고.”

난 그 관례를 십분 이용할 거고.

반가면이 없다면 애초에 무도회장에 발을 들일 생각일랑 하지 않았을 테고.

“아가씨도 참.”

마사가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저 웃음 뒤에 꼭 알레스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귀족 망아지가 되곤 했으니까.

“그래요. 아가씨 말대로 반가면을 써서 사람들이 못 알아보면 다행이구요. 하지만 만일의 사태라는 게 있잖아요. 만일에 대비해야죠.”

“반가면을 썼는데 알아본다고? 내가 악명은 높아도 얼굴은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을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번 이혼 요청 때는 남성분이 대부분이었다 해도 황제 즉위 축하연엔 귀부인이나 영애들도 꽤 있었다고요. 그때 면죄권 가지고 그렇게 주목을 받으시고선.”

아, 맞다. 그런 꿈같은 일이 있었지. 물론 악몽.

“나, 머리 염색할까?”

“황궁 출입자는 염색 금지예요.”

“그건 또 왜 그래?”

“보안을 위해서요. 마법 금지, 변장 금지, 마도구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요.”

“그렇지만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반가면한테 누가 주의를 기울이겠어? 반가면들은 무도회의 들러리에 가까운 걸.”

“네, 아가씨가 특별히 주의를 끄는 행동을 하시지 않는 한, 못 알아볼 가능성이 크긴 해요.”

그래서 내가 춤추는 것도 깔끔하게 포기했지.

“난 구석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일 거라고.”

“하지만 사교계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인 만큼 아가씨도 이참에 기본적인 주의사항을 알아 두시는 게 좋잖아요.”

“주의사항이 너무 소름 돋게 원초적이어서 말이야.”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전쟁터는 원래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법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야. 저쪽 세상 직장 정글에서도 그렇긴 했지.

그렇지만 이건 귀족들의 무도회잖아!

춤을 포기했더니 그보다 더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알레스는 생각지 못한 시련에 당황했다.

“아, 그러고 보니 반가면을 벗기려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네요. 가면도 예비로 몇 개 지니고 계셔야겠어요. 딱딱한 가면 안에 얇은 천으로 된 가면을 두 겹으로 쓰시는 거도 좋고요.”

“잠깐만, 마사. 가면을 벗긴다고? 그건 폭력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내가 지금 무도회가 아니라 던전 깨기라도 하러 가는 건가?

“진짜 폭력도 난무하는 걸요. 팔꿈치로 옆구리를 가격당하거나 발에 걸려 넘어져 무릎을 깬 분은 제 눈으로도 몇 차례 봤고요.”

“이거 무서워서 못 가겠는 걸?”

“자극되시라고 좀 심한 경우를 말씀드린 거긴 해요. 그래도 언제 어떤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니 간단한 연회용 호신술은 익히고 가시는 게 좋지요.”

“연회용 호신술?”

“예, 그건 밤비 경이 알려드릴 거예요.”

지금껏 곁에 잠자코 서 있던 밤비가 알레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호신술까지 익혀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실은 스노브 후작 때문에 더 신경이 쓰여요.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런 이가 아가씨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요. 요전에는 황궁에서 딱 마주치기까지 하셨다면서요.”

“황제와 모의한 걸 들켰을까?”

“악한 짓으로 힘과 재물을 쌓은 이라면 아마 촉도 좋고 정보력도 무시 못 할 거예요. 특히 황비 간택으로 민감한 시기잖아요.”

마사, 난 당신의 촉과 정보력이 더 신기해. 알레스가 특급 유모를 우러러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네슬라 영애를 조사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거네.”

“그럴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더 절박한 입장 아니겠어요? 폐하의 어쨌거나 전 부인인 아가씨를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을 거예요.”

‘어쨌거나 전 부인’이라니. 마사, 말조심해. 잘못하면 찰떡 별명 될라.

“흠, 알았어요. 이것도 사교계 처세술이라면 처세술이니 알아둬서 나쁠 거 없겠지. 그런 번잡한 일은 안 일어나는 게 좋겠지만.”

돌이켜보면 저쪽 세상 직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세상이면 얼마나 편할까.

일만큼, 아니 어쩌면 일보다 중요한 앞통수 기술, 뒤통수 기술, 잡다하고 치사한 처세술과 병법 등등이 난무했다.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하긴 귀족들처럼 딱히 하는 일 없는 사람들일수록 소일거리로 피곤을 자처하곤 하지.

“예에,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지요. 그럼 고의로 술이나 차를 쏟거나 일부러 드레스 자락을 밟거나 레이스나 머리 장식이 엉기도록 유인하는 등 자잘한 수작을 걸어올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지 상황극을 통해 연습해 볼게요.”

“상황극?”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요. 본인의 성향이나 당시 상황에 맞도록 순발력 있게 대처하셔야 해요. 스스로 답을 찾으셔야 하는 거죠.”

흠, 자기 주도 학습이란 건가.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다는 건가.

주인을 강하게 키우는 엄격한 유모여.

“이걸 연습한 다음엔 말 공격에 대처하는 법을 익힐 거예요.”

“이엑, 또 있어?”

“말로 주고받는 싸움이 사교계 신경전의 절정이라 할 수 있어요. 저희 평민들이 보기엔 도저히 이해 못 할 헛짓거, 크흠, 화법이지만요.”

“귀족들 말싸움은 뭐가 달라?”

“저희 보기엔 답답하다고 할지, 희한하다고 할지. 저게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한 대 콕 쥐어박고 싶다니까요. 마사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곁에 있던 밤비도 한마디 거들었다.

“핵심은 상대방의 말이 조롱인지 칭찬인지, 악의인지 호감인지 즉각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걸 파악하는 게 첫걸음이지요.”

저희 같은 기사들은 도무지 참기 힘든 화법입니다만. 밤비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맞아. 그런 식이라면 아마도 밤비 경은 조용히 검을 빼들었겠지. 알레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조롱을 칭찬인 줄 알고 좋아한다거나 악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이면 웃음거리가 된다는 얘기?”

“예. 되돌려 줄 때도 감정을 곧장 드러내는 건 하수예요. 상대방이 공격한 그대로 돌려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죠. 빈정거림엔 빈정거림으로, 능글거림엔 능글거림으로.”

마사가 대답을 가로채며 설명했다.

“벌써부터 어질어질하네. 그래도 뭐, 난 몸싸움보단 말싸움에 더 자신 있으니까.”

“아가씨, 안타깝지만 몸싸움도 익히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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