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피할 수 없다면
“이건 기회야. 사교계에 우리 상품을 소개할 절호의 기회. 알다시피 내가 막 자유롭게 사교계에 들락거릴 형편이 못 되잖아? 하지만 밤비 경의 컬렉션들만 해도 사교계에서 먹히는 것들이란 말이지. 매니지먼트 사업도 그렇고. 이참에 홍보 기회로….”
“아가씨!”
알레스가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마사가 주인 아가씨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제발 그 의뢰 거절하세요. 차라리 폐하의 부탁을 거절하고 감옥 가세요!”
“뭐어?”
“저희가 벌금을 내든 뇌물을 쓰든 꼭 꺼내 드릴게요. 며칠만 그 안에서 고생하세요, 아가씨.”
자기 인생 아니라고 막 지르는 거야, 마사?
“아니, 차라리 폐하께 계약금을 돌려드리는 건 어때요? 위약금까지 몇 배로 돌려드린다고 사정해 보면요? 저희 이제 그 정도 치를 능력은 되잖아요.”
“나도 폐하의 의뢰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되게 많이 이상한가 보지?”
마사가 또다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아가씨, 추문도 추문 나름이죠. 이건 회복 불가능이에요. 지울 수 없는 최악의 오점을 남길 거라고요. 정말이지 황명 거역 죄로 감옥 가시는 게 나아요.”
“안 들키면 되잖아? 혹시라도 들키면 사업 욕심에 눈이 돌아 수치심을 잃은 걸로 둘러대면 어때? 망신은 좀 당하겠지만 생매장 감은 아니잖아? 잘하면 동정표를 살 수도 있어.”
어흐흐. 마사가 장탄식을 내뱉었다.
“아가씨는 세상 누구보다 영악하신 듯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철이 없으신 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배짱이 지나치게 두둑하신 건지, 이 유모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레스의 대책 없는 소리에 밤비까지 나섰다.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시려는지 솔직히 납득이 안 갑니다. 지금 하고 계신 공유 마차 사업에 집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새로 구상하신 바도 있잖습니까.”
“아, 그래. 그거야, 밤비 경!”
알레스가 생각났다는 듯 밤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 마법식 때문에라도 안 갈 수가 없단 말이지.”
“마법식이 무도회와 무슨 상관이….”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한데…. 내가 그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린 거 같아.”
“예에? 갑자기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시게요?”
마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급작스러운 말인 건 알아. 나 역시 조금도 원한 일이 아니거든. 난 그저 공유 마차를 마법식으로 움직이고 싶어서, 마정석 값 좀 아껴 보겠다고 부지런히 브린 황자를 찾아간 죄밖에 없다고.”
알레스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은 더욱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전부 이어져 있더란 말이지. 악한 짓, 못된 짓은 모두 그 음흉한 후작 영감과 연결돼 있더라고.”
“후작? 음흉하다면 스노브 후작이요?”
“응. 황비 간택을 빙자한 이권 다툼도, 마정석 가격 폭등도, 외국과의 비정상적인 무역 협정도, 심지어….”
알레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도 골랐다.
“크게는 메르세데스의 오랜 숙원과 페레티의 몰락, 작게는 우리 상단을 해코지하던 소소한 사건들도 모두 줄줄이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두 가문의 이름까지 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처음엔 폐하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함정을 팠다 싶었지. 물론 그건 그것대로 여전히 유효할지 모르지만.”
그 인간 아주 치사하다니까.
“중요한 건 폐하의 의뢰를 처음엔 빚 청산한다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내가 필요해서 꼭 해야겠다는 거야.”
“어째서 그렇지요?”
“그 스노브 두꺼비가 나를 싫어해. 앞으로 더욱 싫어하게 생겼고.”
“네에? 아가씨가 뭘 어쨌다고요? 지체 높은 귀족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전부터 날 싫어했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욕심 사나운 영감이 구린 짓 하는 동선과 내가 사업 확장하려는 동선이 겹치지 뭐야. 지난번 황궁에서 딱 마주쳤을 땐 은근히 협박까지 하더라고.”
“뭐 그렇게 치사하대요, 귀족이?”
“귀족이 원래 치사하고 쪼잔한 거 몰라? 그 인간 입장에선 내가 자신의 대업에 사사건건 재를 뿌리는 눈엣가시일 테지.”
“흥, 별 양심 없는 입장도 다 있네요. 뭘 잘했다고. 아주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릴까 보다.”
역시 박력 넘치는 나의 특급 유모.
“카이트, 아니 공작 전하 말씀으로는 그가 자신의 이익이나 재산이 걸린 일이라면 매우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래. 그래서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대.”
“그런 일은 이 밤비가 결코 용납지 않을 겁니다.”
역시 단호하고 우아한 나의 호위 기사.
“고마워요, 두 사람.”
마밤헬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맨손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알레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어차피 찍힌 몸이라 한바탕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 정보 창구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고 있는 게 유리할 거야.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도 있잖아.”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으셨대요?”
응, 저쪽 세상 범죄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그러니까 무도회도, 네슬라 공녀도 처음엔 폐하가 내게 날린 엿가락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스노브를 염탐하는 데 꼭 필요한 당분이란 말씀!”
이대로 설득당해도 되는 걸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마사와 밤비는 여전히 미심쩍고 걱정스러웠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지. 저길 좀 봐요.”
알레스가 한쪽 벽을 가리켰다.
단정한 필체의 표어가 벽에 걸려 있었다.
지난번 축제 준비 회의를 하며 알레스가 한 말을 헤라클레스가 곧이곧대로 듣고 성실히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두루두루, 겸사겸사.’
페레티 상단의 인재상이 담긴 액자가 견고한 빛을 발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무도회는 우리 상단의 럭셔리 상품을 홍보할 좋은 기회이기도 해요.”
드레스나 장신구 등 밤비의 컬렉션을 사교계에 유행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아마 다른 상단이나 살롱에서도 황실 무도회란 대목을 노리고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리라.
“그러니 나를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 생각하고 맘껏 이용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밤비 경?”
물론 주된 임무가 무엇인지는 잊지 않았다.
무도회 때 확실한 꼬투리를 잡아서 황비 간택에 지장을 주거나 아예 무효화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네슬라 공녀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스노브가 검은 꿍꿍이를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니 가만히 두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을 리 만무하고….
네슬라 공녀가 차라리 인성 파탄 개차반이라면 있는 그대로 황제에게 고하기만 하면 될 테니 일이 좀 편할 텐데.
황비 자리에서 밀려난대도 미안함이 덜할 테고.
반대로 그녀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 스노브의 악행을 알려 준 뒤 우리 편으로 만드는 시나리오도 좋고.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왕이면 이쪽이 훨씬 낫지.’
황제와 스노브 둘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으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쪽이나 이쪽이나 쉽지 않은 일인 데다 황제의 전처라는 알레스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꺼림칙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뭐, 기왕에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묵묵히 제 몫이라도 챙겨야지.
잘돼서 나중에라도 옛정을 잊지 않고 갚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드레스부터 액세서리까지 밤비 경이 선보이고 싶은 건 모두 준비해요. 그리고 춤은….”
“아 맞다. 춤 선생을 구할까요?”
“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아. 지금처럼 예민한 시기에 귀족 사회의 천덕꾸러기인 내가 춤 선생을 구하면 분명 사교계에 소문이 돌 거야.”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아, 막 떠올랐는데, 내가 무척 훌륭한 춤 선생님을 잊고 있었네. 좋아, 춤은 해결되겠어.”
“누구신데요?”
“은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있어. 비밀 보장은 확실하지.”
“그럼… 저는 뭘 준비할까요?”
“마사? 그럼 마사에겐 네슬라 공녀에 대한 조사를 부탁할게. 네슬라 공작가 고용인 중에 아는 사람 좀 있어?”
“공작가의 제도 저택에 아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요. 없어도 곧 만들 테니 맡겨 주세요.”
마사의 똑 부러진 대답에 알레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크, 이제 나만 잘하면 될 거 같네.”
* * *
알레스는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그곳을 찾았다.
“샤를테론 단장님, 우리 마부들은 잘 따라가고 있나요?”
교육을 부탁한 연습생들이 수업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점검한다는 명목에서였다.
“본바탕이 훌륭한데 성실하기까지 하니 실력이 늘지 않을 수 없지요.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여간 보람 있는 게 아니랍니다.”
우아한 차림의 단장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연극조로 말했다.
그녀의 습관이었다.
꽃미남 마부, 소로 사 형제는 공유 마차 업무가 끝난 뒤엔 샤를테론 예술단에서 연기, 노래, 춤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게 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지요.”
“어머, 과찬이세요.”
“사실 제게 필요한 것도 그런 선생님이랍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밀실로 모실까요?”
“아, 그 정돈 아니고, 실은 사업 때문에 규모가 꽤 큰 무도회에 조만간 참석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 춤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유, 제대로 오셨어요, 레이디. 저희 특기가 춤이에요, 춤! 사교계 몸치 분들 여럿 고쳐 드렸지요.”
특기는 연기가 아니었나요?
어쨌든 귀부인 출신 단원이 많으니 무도회 예법이나 춤에 능통한 사람도 있겠지.
“저희는 일대일 수준별 맞춤 수업으로 유명해요. 물론 비밀 보장 철저하고요. 레벨 테스트 후에 기본 스텝과 유행 춤곡을 익히고, 고객의 필요에 따라 무도회 맞춤 속성 과정으로 가거나 예술 연구반으로 가거나 하세요.”
“저는 곧 닥쳐올 무도회를 적당히 넘기기만 하면 되는데요. 너무 못 춰서 이목을 끌지 않을 정도로만….”
“흐음, 레벨 테스트부터 해 보고 말씀 나누는 게 좋겠네요.”
“네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샤를테론 단장은 연기와 접대용 언행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지금은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엉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도 이해가 안 가요. 사람 몸이 어떻게 이런지….”
망가진 마리오네트처럼 삐거덕거리던 알레스가 넘어지며 바닥에 이마를 찧을 뻔한 일이 두 차례 반복되자 단장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저, 레이디, 이런 말씀 드리기 좀 미안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우아한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도회 때 최대한 춤을 안 추고 넘기는 법 같은 걸 익히시는 게 어떨까요?”
표정을 봤을 때 농담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요? 미안하긴 제가 미안하죠.”
“전 정말 당황스러워서…. 진료를 한번 받아 보시는 게 어떨까요? 관절이 심하게 굳으신 거 같아요. 신경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르고요.”
비꼬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진심인 것이 더욱 상처군.
알레스는 단장의 진지한 권유를 받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