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두근두근 춤 연습
“카이트, 너 지금 정상 아니야. 너 완전 정신 나간 놈 같다고!”
브린 황자가 꽥하고 내질렀다.
친우의 적나라한 표현에 공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브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독설을 날렸다.
“하긴 질투도 해 본 인간이 하는 거지. 지금껏 질투 한번 못 하고 살아 온 자네가 뭘 알겠어?”
질투심에서조차 열등감과 박탈감을 느껴야 하다니.
공작은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도 브린의 말이 옳으리라.
거의 모든 일엔 일련의 시간 즉, 과정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과정을 건너뛰려 하면 대개 부작용이 생긴다고 배웠다.
공작은 자신이 어쩌면 연애 속성반 학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조금 늦되고 열등한 학생인지도.
원래의 과정을 억지로 단축하거나 건너뛰면 부작용이 생기는 건 당연하겠지.
잠시 상념에 빠졌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대체로 합당한 거 같군.”
“뭐야… 바로 인정하는 거야? 싱겁게.”
“자네한테 잘 보여야 할 일이 있거든. 부탁이 있어.”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브린이 몸 사리는 시늉을 하며 수상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공작은 수줍음을 무뚝뚝함으로 가장한 소년처럼 말했다.
“춤 좀 가르쳐 줘.”
“…….”
내 이럴 줄 알았다. 브린이 혀를 찼다.
“본인이 다 알아서 리드한다면서?”
“그럴 거야. 자네한테 배워서.”
“내가 왜?”
“내 감정을 털어놓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알게 된 사람은 그 값을 치러야 한다네.”
“그런 날강도 같은 이야기는 처음일세. 누가 물어봤나? 누가 알고 싶대? 나한테 하는 고백도 아닌데 왜 내가 값을 치러야 하지?”
“꽤 재밌게 듣는 거 같던데.”
“재미?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오더군. 카이트,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데, 난 여전히 그 결혼 반댈세.”
어디서 어머니래? 난 너 절대 인정 못 해!
브린이 비뚤어진 시어머니 같은 대사를 날리자 카이트의 반듯한 이마에 구김살이 생겼다.
“왜지?”
“이유야 많고 많지. 아, 반대파는 나뿐만이 아닐걸? 메르세데스 공작부인 자리가 어디 보통 자리인가?”
“그녀도 보통 사람은 아니야.”
“흥, 우선 자네 그 극성스런 영지민들은 어쩔 셈인가? 극성스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로잘린마저도 그 영지민 시집살이가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뭘 망설인다는 건지. 공작은 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레이디 페레티가 그런 영지민들에게 고분고분 맞춰 줄 만큼 성격이 좋은 건 아니잖나.”
“우리 영지민들은 담백하고 가식을 싫어하고 순리를 아는 사람들이야. 분명 알레스를 좋아할 거야.”
무슨 근거로?
친우의 눈에 낀 콩깍지를 제거하기 위해 브린이 강수를 두어 보았다.
“영지민들이 사랑한 선대 공작부인, 자네 모친을 생각해 봐. 레이디 페레티는 그와 한참 거리가 있지.”
공작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됐어, 브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공작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런 눈빛을 보냈다.
“브린, 나를 완전히 발가벗길 셈이군.”
“……?”
“실은 차마 자네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브린을 엄습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거 앞으로도 계속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알레스한테서 어머니를 느꼈어.”
“!”
“알레스와 다시 만났을 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 있었어. 그저 어렸을 적 만났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
“그게 맞는 거 같은데.”
“나중에 깨달았지. 분명 어머니의 기운이었어. 나는 알레스에게서 어머니를 본 거야.”
“…하나도 안 닮았다고. 물론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내가 들은 레이디 캄파넬라는… 여하튼 절대 안 닮았어.”
친우의 부정에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브린, 그건 나만 아는 거야. 나만이 알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브린은 할 말을 잃었다.
비장의 카드로 선대 공작부인 얘기를 꺼낸 건데.
카이트를 잘못된 길에서 구해 내기는커녕 자신이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버리다니.
완전히 말려들고 말았다.
“그러니… 춤 좀 가르쳐 줘.”
* * *
“보통 무도회에선 요즘 유행하는 춤곡 세 가지와 전통적인 춤곡 두 가지, 이렇게 다섯 곡 정도를 돌아가면서 연주하지.”
간편한 복장을 한 두 남자가 마주섰다.
“내가 특별히 궁정 악장에게 알아보니 이번 황실 무도회에 연주되는 최신 유행곡은 트라우스의 발츠 ‘북국의 수선화’, 소핀의 오베레 ‘치즈 타이거’, 루드비히의 차렌토 ‘달아난 약혼녀’ 이 세 곡이야.”
주로 한 남자가 말하고 다른 한 남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젊은 귀족들이 참여하는 프림로즈 무도회인 만큼, 빠르고 경쾌하고 역동적인 곡들로 구성했더군. 춤도 빠른 회전이나 도약 같은 힘찬 동작들이 많고.”
브린이 공작을 위아래로 새삼 훑어보았다.
잘난 줄은 알았지만, 역시 잘났군.
춤 연습을 위해 입은 가벼운 옷차림이 공작의 신체적 우월함을 더욱 잘 드러내 주었다.
황자 본인도 어디 가서 빠지는 미모가 아닌데.
공작의 완벽한 비율 앞에선 신의 솜씨를 향한 경외감마저 들곤 했다.
위는, 넓다 넓어. 아래는, 길다 길어.
위아래 공통으로 탄탄하다.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얼굴은 무감하거나 도도한데 괜히 섹시해 보일 때가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징그럽지만, 자꾸만 침을 삼키며 감탄하게 된다.
“그런 춤이니까 말이야, 자네에게 유리할 수가 있어. 평소 검술과 동방 무예로 단련돼 있는 몸이니까. 아마 다른 사람보다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야.”
“회전이나 도약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왠지 검술 훈련이나 설인족과의 전투가 연상되긴 하는군.”
“그래, 어쩌면 훈련이고 전투지. 사교계의 많은 부분이 그래.”
“흐음.”
“일단 각 춤의 핵심을 꼽자면 발츠는 포옹, 오베레는 회전, 차렌토는 도약과 질주라고 할 수 있어. 즉 그 핵심 동작을 잘 소화해 내면 춤을 잘 추는 거라 말할 수 있지.”
회전, 도약과 질주는 알겠는데, 포옹을 잘하는 건 어떤 걸까. 공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인사하는 거부터 시작해야 하나. 먼저 기본 클래식 스텝부터 익히고, 유행곡으로 가 보자고.”
뜨겁게 맞잡은 두 손. 허리를 억세게 감아오는 팔.
나부끼는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쇄골과 가슴 근육.
혼연일체가 되어 호흡과 리듬과 감흥을 주고받는 댄스 댄스 댄스.
아네모네 저택의 작은 연회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건장한 두 남자가 서로를 부여잡고 춤을 추는 모습이 다소 기괴해 보일지 모르지만.
브린의 예상대로, 육체적인 감각이 발달한 공작은 춤도 놀라울 정도로 금세 익혔다.
혹시 출 줄 알면서 사기 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힘은 또 어찌나 센지, 나름 빠지지 않는 체격을 지닌 브린이 공작의 팔뚝 사이에서 붕붕 날아다녔다.
“카이트, 힘 조절을 좀 해야겠어. 그렇게 들고 던지고 돌렸다간 레이디가 무도회장 밖으로 날아가 버릴 거라고.”
“아, 주의해야겠군.”
안 그래도 작고 가녀린 알레스인데.
공작은 큰일 날 뻔했다며 매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나흘에 걸친 총 열여섯 시간의 연습.
그사이 공작은 꽤 근사한 춤동작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춤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 행세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춤의 완성은 잘 빠진 몸이란 사실도 확인시켜 주었다.
브린은 연습하는 중간중간 난데없이 두근대는 가슴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파트너의 크고 격한 동작에 보조를 맞추느라 그랬을 거다, 아마도.
황자로 살아 온 스물네 해. 첫사랑에 빠진 친우 때문에 이렇게 치일 줄이야.
사랑에 빠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친구를 곁에 두는 건 더욱 보통 일이 아니다.
* * *
“마사, 혹시 춤 좀 출 줄 아나?”
“춤이요? 축제 때나 명절에 동네에서 원무를 춘 적은 있는데요. 왕년에 제 별명이 크룬 지방 물 찬 제비였는데.”
“음, 그런 거 말고… 혹시 무도회 같은 데서 귀족들이 추는 사교댄스 같은 거… 우리 중에 그런 춤을 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알레스의 말에 마사와 밤비가 눈을 껌뻑였다.
“밤비 경은 몸 선이 우아하고 움직임이 날렵해서 춤도 잘 출 거 같은데. 좀 추지 않아요?”
“어려서부터 춤추는 걸 싫어해서요. 아버지가 댄스 강사를 붙여 주신다기에 검술 선생님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드렸지요.”
“그, 그렇군.”
“갑자기 춤은 왜요?”
아가씨는 사교계에 나가실 것도 아니잖아요? 마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도회에 참석할 일이 생겨서….”
“네에? 정말이세요?”
흥분해서 한바탕 쏟아내려는 마사를 알레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잠깐. 마사가 상상하는 그런 일 아니야.”
“…그런 일이 아니라뇨? 무도회에 초대받으신 거잖아요? 어쩜, 아가씨도 참. 그런 좋은 일을 깜짝 선물처럼 숨기시다 이제야 터뜨리시고.”
아가씨가 재혼하기 전엔 결코 연회 초대장은 구경도 못 할 거라 생각했던 특급 유모는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두자 깐깐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가씨에 대한 평판이 바뀌기 시작한 걸까?
“아휴 아가씨, 그런 거라면 최고의 댄스 강사를 구하면 되지요.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무도회지만 춤추러 가는 건 아니어서….”
“아 물론 춤 자체가 목적은 아니겠지요. 사교계 데뷔라는 게 중요한 거지요. 또 좋은 분을 만나거나 소개받으실 수도 있고.”
“어? 어, 그렇지.”
“어느 가문에서 열리는 무도회인가요? 제가 아주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짜내서 멋지게 준비해 드릴게요.”
“그게 말이지, 실은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인데… 그 황비 간택을 앞두고 열리는 경축 행사 같은 거라나.”
한껏 들떴던 마사가 살짝 휘청했다.
곁에 있던 밤비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대신 물었다.
“레이디,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레스가 겸연쩍은 얼굴로 설명했다.
“며칠 전 폐하랑 맺은 계약 때문에 입궁했잖아요. 그때 의뢰받은 일을 수행하러 무도회에 참석, 아니 잠입하는 거야.”
“잠, 잠입이라니….”
마사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극비리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긴 한데, 둘은 내 참모이자 상단의 중역이니 설명할게요. 폐하가 의뢰한 일이 뭐냐면….”
황비 후보인 오하라 가넷 네슬라의 평판 조사를 해 달라는 것으로,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무도회 잠입까지 강행하게 된 정황을 알레스는 두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알레스의 말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마사와 밤비의 얼굴이 시간이 흐르며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음, 좀 정신 나간 의뢰지? 나도 처음엔 황당하기만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한 거 같아서.”
“무슨 기회요?”
특급 유모가 특급으로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알레스는 예감했다.
로맨스를 목욕당한 자유연애 신봉자가 곧 한탄과 분노를 터뜨릴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