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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78화 (78/120)

78화

당신의 모든 처음을 나에게

“그런 이유로, 마법식에 관한 일은 알레스가 내게 양보를 좀 해 주면 좋겠습니다.”

공작이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예, 일단은 조용히 찌그러지겠습니다.

사실 알레스에겐 공유 마차뿐 아니라 그 후속 사업에 대한 원대한 구상이 있었지만, 여기서 그 얘기까지 꺼냈다간….

공작이 복수를 핑계로 또 어떤 대형 호구 노릇을 하겠다고 나설지 두려워 일단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쉽지만 우선은 맞춰 주는 척하면서 브린 황자를 은밀히 구워삶을 기회를 엿보는 것으로 타협.

“메르세데스에서 마법식을 연구 개발하고, 페레티에서 연구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하고. 우선은 그렇게 해 보지요.”

“네에…. 그런데 저만 너무 날로 먹는 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데요.”

“날로 먹다니요. 공유 마차 사업이 지금처럼 자리를 잡기까지 알레스와 직원들이 들인 노력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제가 치러야 할 비용이라든지 바라시는 대가라든지, 그런 걸 말씀해 주시면 마음이 조금 편할 거 같아요.”

“대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네? 언제요?”

알레스가 기억을 더듬었다.

“알레스의 첫 춤.”

공작의 말이 떨어지자 브린이 입에서 뭔가를 뿜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내게 주십시오.”

알레스는 곱아드는 손발을 진정시키며 까맣게 잊고 있던 무도회를 떠올렸다.

무도회. 무도회 잠입이란 거사가 있었지.

황비 간택 자체가 스노브 영감이 야심을 채우기 위해 설계한 정치적 이벤트란 건데.

그렇다면 황비 후보자인 오하라 가넷 네슬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말려야 하는 결혼 아닌가?

그 능구렁이 황제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아마도 거부할 구실이 필요한 거겠지?

공작은 이 국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와중에 사업적인 이익도 포기할 수 없는 알레스는 무도회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런데 춤, 춤이라니!

“카이트, 저는 춤을 출 여유가 없을 거 같아요. 말씀드렸다시피 거기서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춤도 못 추고요.”

이 정도만 말해도 공작이 순순히 요구를 거둬들일 거라고 알레스는 예상했다.

그러나 공작은 오늘따라 낯선 모습을 보여 주기로 작정한 듯했다.

“대가라는 건 원래 어려움이 따라서 대가인 법인데…. 그 까다로움이 대가의 가치일 텐데요.”

“…으음, 제가 사교계 문화에 익숙지 않기도 하고, 정말이지 춤을 출 기회가 있을지 어떨지….”

“그러니 더욱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교계 문화는 카이트 너도 모르잖아!

소리 없이 절규하는 브린의 입가가 파들 떨렸다.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반가면을 썼다 해도 무도회에서 혼자만 동떨어진 행동을 하면 오히려 눈에 띌 겁니다. 어느 정도는 흐름에 몸을 맡겨야 부자연스럽지 않겠죠.”

“그런가요….”

하지만 푸른 불꽃의 고결과 춤을 추면 나한테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던 사람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질 테죠!

게다가 난 정말로 심각한 몸치에 박치란 말이죠! 나무토막도 나보단 유연할 거라고요.

비밀 임무도 임무지만 생각해 보니 이쪽이 더 큰 문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알레스의 뇌리를 강타했다.

알레스는 저쪽 세상 흑역사가 떠올라 몰래 한숨을 내보냈다.

저쪽 세상에서 그녀가 살던 나라는 춤 한 자락 출 줄 모르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너도나도 아이돌 춤이 개인기인 곳이었건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희귀종이었다.

정말이지 이쪽 세상에서도 같은 문제에 부딪히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저쪽 세상에서 어땠냐고요?

사회적 낙오를 면하기 위해 댄스 학원에도 다녀봤지만 강사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수업료를 돌려준 몸이라고요.

회사 단합대회 때는 춤 대신 급한 대로 앞구르기를 한 몸이라고요.

이 몸이 그런 몸이라고요!

…가만? 이 몸은 그 몸이 아니잖아?

혹시 이 아가씨 몸은 뭐가 좀 다르려나?

몸 안에 내가 있으니 감각이야 여전히 후지겠지만, 몸에 밴 리듬이 있을지 모르잖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레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공작이 도닥이듯 말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지는 알레스가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건 내가 리드할게요. 알레스는 해야 할 일에 몰두하도록 해요.”

다정한 목소리로 그런 상냥한 배려를 할 거라면 그냥 춤 신청을 철회해요!

알레스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알레스는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첫 춤은 나와 추겠다고.”

기왕이면 두 번째 춤도, 세 번째 춤도, 앞으로의 모든 춤을.

다른 사람이랑 춤추지 말아요.

공작은 자신의 심장이 하는 말에 스스로 당혹감을 느꼈다.

공작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지는 걸 본 알레스는 춤 한번 추는 거 가지고 너무 까탈을 부린 건가 싶어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 카이트. 오해는 하지 마세요. 카이트가 춤 신청을 해 준 건 기뻐요.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요. 다만 제가 그런 문화에 익숙지 않고, 또….”

“또?”

“카이트야말로 저랑 춰도 정말 괜찮겠어요? 카이트의 사회적 지위도 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 하긴. 무도회에서는 원래 여러 사람과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는 거죠? 저랑만 추실 게 아닌데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내가 왜 그랬지, 아하하하.”

“글쎄요.”

“예?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잘 알고 있는 것도 있고,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알레스가 멍한 얼굴로 묻자 공작이 입을 일자로 다물고 고심하다 말했다.

“알레스, 춤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의 말에 알레스의 둘 곳 잃은 눈동자가 크게 원을 그리며 또르르 굴렀다.

저기요? 내가 요즘 사나운 일을 많이 당하는 바람에 정신이 좀 들락날락해서 그런데요. 춤 얘기를 내가 먼저 꺼냈던가요?

춤이라면 질색인 사람을 붙들고, 그렇게 에둘러 사양하는데도 굳이굳이굳이 집요하게 춤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요!

알레스는 공작이 요즘 어딘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주 토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시 갑자기 저주에서 풀려난 후유증인가?

“우리는 마법식 개발과 보급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난 알레스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겁니다. 알레스는 그 대가로 나와 첫 춤을 추기로 했고요. 어떻습니까? 이 내용에 동의합니까?”

갑자기 계약 모드로 훅 들어오는 공작.

“예? 예….”

내용이 틀린 건 아닌데….

“그럼 내일 공증인을 불러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의 밸런스가 심하게 붕괴돼 있잖아요!

알레스는 뭔가 계약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도덕책 공작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에잇, 몰라. 안 되면 이번 생도 앞구르기다!

* * *

알레스가 밤비와 함께 아네모네 저택을 나서자 브린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첫 추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입장을 바꾼 건 미안하네.”

“하!”

자신의 과오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친우의 태도도 브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요목조목 따져야 하는데 말이다.

“알레스가 내 복수 계획에 휘말리는 게, 그래서 위험해지는 게 걱정돼서 말리려 했지.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너무 독단적이고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알레스를 뭐라고 생각한 걸까?”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지 마. 자넨 막상 눈앞에서 레이디 페레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거뿐이야. 아주 흐물흐물 녹아내리던데?”

브린이 울분을 삭이며 비꼬자, 공작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바람직한데?”

“와, 진짜. 정말 이럴 거야? 마법식 문젠 중대 사안이라고.”

“내 생각도 같아. 협력이란 건 일을 그르치기 위해 하는 게 아니지. 서로 힘을 얻기 위해 하는 거고,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은 결코 사사로이 하지 않았어.”

공작의 매끄러운 응수에 브린 황자는 이를 빠득 물었다.

말려들지 말자, 말려들지 말자.

무릇 진정한 우정이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친우를 호되게 질타해서라도 바른길로 인도하는 거지.

“이보게 카이트, 자네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은 이해하네. 나도 첫사랑을 할 때는 말이지….”

“알레스의 안전은 내가 직접 챙길 거야.”

“…….”

“어제 스노브와도 마주쳤잖아. 매우 마음에 걸려.”

“나는!”

점잖게 충고하는 친우 역할에 몰입하느라 기껏 낮게 깔았던 브린의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나는! 나는! 마법식을 연구하는 것도 개발하는 것도 다 내가 해야 할 일인 데다, 이제 공유 마차를 마법식 차로 개조하는 일까지 떠안게 됐다고! 누가 제일 위험할 거 같은데?”

“자넨 제국의 황자잖아. 게다가 매우 뜻밖에도 보기와 달리 검술에 뛰어난 걸 익히 알고 있고.”

“허, 황자 아니라 황제라도 안전하지 못한 마당에! 황태자도 아가판투스가 아니라 스노브가 제거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든단 말이지. 게다가 그 영감은 흑마술과 마약에까지 손을 대는 작자잖아!”

“진정하게. 내가 언제 자네를 위험에 방치한 적이 있나? 자네 안전도 내가 직접 챙길 테니 마음을 좀 가라앉히지.”

일은 자신이 하고 연애는 지들이 하는 사태에 울분을 터뜨린 황자는 공작이 내민 당근에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공작은 친우의 찻잔에 직접 허브티도 따라 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나? 좀 평온해졌나?”

“뭐, 그래.”

“우리가 함께하는 대업에 관해선 결코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그래. 뭐 자네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건어물 도덕책으로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내가 너무 흥분했군.

브린이 차를 홀짝이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공작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 자네가 말한 첫사랑 말이야. 역시 처음이란 건 특별한 거겠지?”

“으응?”

첫사랑…? 내 얘길 듣고는 있었던 거야?

“처음이라서 각별하고, 그래서 자꾸만 치졸해지는 걸까?”

그만, 그만해.

브린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입가로 흘릴 뻔했다.

“가능하면 알레스의 모든 처음을 함께하고 싶어. 내가 이상한 건가?”

지난번보다 증세가 더 심해지긴 했네.

“이런 마음을 조금만 더 일찍 자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늦게 깨달아서 놓친 것들이 아쉬워.”

친우가 살아온 무미건조한 삶을 잘 알기에 브린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그간 너무 팍팍하게 살아오긴 했지. 멋도 맛도 없이.

브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남편이 되지 못한 건 매우 애석하지만 대신 영원하고 유일한 남편이 되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겠지.”

브린의 고갯짓이 뚝 멈췄다.

“그걸 제외하고는 첫 입맞춤, 첫 승마, 첫 춤 등 알레스의 모든 처음을 내가 함께했으면 해. 그걸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면 아마 질투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을 테지.”

브린의 입이 삐뚜름하게 벌어졌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거 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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