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위대한 호구
공작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싫어하다니요. 처음엔 내 짧은 생각으로 알레스가 마법식 개발같이 위험한 일에 엮이지 않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아니, 제 안위 따윈 지금 하나도 중요치 않아요, 카이트. 얘기를 해 보자고요.”
알레스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영지에 마정석이 그리 많다면서 왜 마법식 개발 같은 걸 하고 있냐고요.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예?”
알레스의 갑작스런 취조에 주춤한 공작을 대신해 브린이 대꾸했다.
“왜긴요, 레이디. 카이트의 취미인걸요. 이게 바로 메르세데스의 스케일입니다.”
황당한 표정의 알레스를 보며 브린이 실실거렸다.
“더 재밌는 얘길 해드릴까요? 담합한 스노브 일당이 마정석 가격을 올리려 할 때마다 메르세데스에서 라피스를 헐값에 풀어서 가격 상승을 막았다는 사실!”
윽. 알레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알레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스노브 일당이라뇨?”
그 와중에 스노브의 이름이 귀에 쿡 들어왔다.
설마 스노브 그 영감은 여기에도 연루돼 있는 거야?
“아, 스노브도 앞서 말한 광산 소유 가문 중 하납니다. 뭐 스노브 후작이 그 귀족 무리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죠. 아무래도 후작의 입김이 워낙 세다 보니.”
브린의 설명을 듣고 알레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햐, 그 양반, 어떤 면에선 대단한 양반일세.
외국과의 무역도 독점하다시피 해, 온갖 뇌물이란 뇌물은 다 받아 처먹어, 그걸로 모자라 마정석으로 장난질까지.
원래 나쁜 놈은 나쁜 짓을 하나만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악의 커넥션만큼 집요하고 끈끈한 게 어디 있으랴.
그 영감 구린 짓이야 아마 파 보면 더 나오겠지?
황비 간택을 추진하는 것도 황실 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뭔가 더 해 먹으려는 수작이겠고.
아주 혼자서 다 해 먹는군!
스노브 후작이 제국과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게 화가 나는 건지, 좋은 걸 독차지하는 게 배가 아픈 건지, 조금 헷갈리는 알레스였다.
그러고 보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사사건건 스노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잖아?’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페레티가의 망아지가 마정석을 마법식으로 교체하는 일에 가담한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이 내세운 황비 후보인 오하라 가넷 네슬라의 평판 조사를 맡은 걸 알게 된다면?
최소한 사망 각? 시신이나 찾을 수 있을지.
스노브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리라.
그 음험한 눈을 떠올리며 알레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알레스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공작의 손이 떨리는 어깨를 살그머니 감싸 왔다.
그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알레스는 다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머리야….
스노브도 스노브지만 내 진짜 걱정거리는 바로 당신이라고요!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엔 스노브 같은 도둑놈도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영지에 마정석이 풍족하니 영지민들이 고생할 일도 없잖아요. 마법식까지 손대는 건 무리 아닐까요? 오히려 영지의 평화를 깨뜨릴지 몰라요.”
어느새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알레스가 공작을 말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성정을 생각하면 마정석 놀이로 재산 불리는 일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을 터.
영지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영주이니 기왕 있는 마정석으로 메르세데스령을 잘 다스리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네, 그래요. 당분간 메르세데스는 마정석 때문에 곤란을 겪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메르세데스만 홀로 평화롭긴 어려울 겁니다. 더 크게는 환경 문제도 있고요. 마법식으로 교체하는 게 아무래도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일 테니….”
끝없이 이어지는 공작의 정견 발표에 알레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공작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냥 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알레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초대형 호구였다.
몰라봐서 미안해… 가 아니고!
“그럼 영지에 가득가득한 마정석은 어쩌시게요?”
알레스가 끓어오르는 울화를 내리누르며 공작에게 물었다.
마정석이 정 성가시고 영 쓸모없다면 나한테 주시든가요.
내가 아주 요긴하게 잘 쓸 테니.
“라피스처럼 순도가 높은 마정석은 원래 의료용으로 쓰기에 적합하지요. 국방이나 의료와 같이 생명이 걸린 매우 긴급하고 중대한 일에 쓰는 게 맞는 듯합니다.”
“으음, 옳은 말씀이긴 한데요….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데요?”
“그건….”
“카이트가 이 제국의 황제도 아니잖아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요? 누가 고마워하냐고요? 남 좋은 일 하는 게 취미세요?”
알레스가 살짝 신경질적인 어조로 면박을 주는데도 공작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물범처럼 눈동자만 조금 더 짙어졌다.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그래도 공작 전하인데 너무 대놓고 몰아붙인 것이 마음에 걸린 알레스는 중얼중얼 조그맣게 덧붙였다.
저쪽 세상에서 상사나 동료와 핏대를 올리며 언쟁을 벌이던 전투적인 버릇이 남아서 그만.
기분 상했을까….
그러나 공작은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심지어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고서.
“실은 알레스에게 똑같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알레스는 그럼 왜 남 좋은 일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결코 비꼬는 것도, 농담하는 것도 아닌 공작의 말에 알레스는 기가 턱 막혔다.
그건 말이죠, 홍보나 설득을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낸 거지, 진짜 남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거든요?
알레스는 낯 간지러운 오해를 풀기 위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카이트가 몰라서 그렇지, 전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이득을 깨알같이 챙긴다고요. 결코 남 좋은 일만 하지 않아요.”
“그러니 현명하지요. 일방적인 희생은 오래가지 못하니까. 모두에게 좋은 일이 진정 오래도록 좋은 일이죠.”
“뭐어… 그렇긴 해요. 기왕이면 서로 손해 보지 않고 얼굴 붉힐 일 없으면 그게 더 경제적이긴 하죠. 쓸데없는 시간 낭비, 정력 낭비 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향해 빙긋 미소 짓는 공작을 보고 나서야 알레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해명했다.
“하지만 전 카이트처럼 원대한 뜻을 품고 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투자! 그렇죠, 일종의 투자랄까요. 또 뽑아 먹기 위해 먼저 투자하는 거랄까. 여하튼 전 다 계산된 행동이에요! 오직 내 이익을 위해 가장 좋은 수를 둘 뿐이라고요!”
뭐, 자랑은 아닙니다만.
알레스의 열띤 해명이 끝나자 공작은 입술을 깨물다 결국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웃어? 웃기려고 한 소리는 더욱 아닙니다만.
“…아,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알레스가 수줍어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는….”
알레스는 순식간에 눈동자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수줍음과 귀여움이라니!
세상에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다면 바로 그 두 단어가 아닐지.
누가 들을까 겁나는 말인데, 참 누가 듣고 있지.
민망한 마음에 힐끗 본 브린의 얼굴엔 ‘얼씨구?’ 하는 표정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도 쑥스러워하는 마음, 이해합니다. 알레스는 그런 사람이죠.”
아닌데요. 알레스가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은 눈물이 날 정도로 쑥스러운가 보다고 생각했다.
이제 수줍음 많은 알레스를 그만 괴롭혀야겠군.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익이나 만족을 위해서 일할 뿐이라는 게 알레스의 주장이라면 나 역시 그렇습니다.”
“괜히 안 맞춰 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정말 그래요. 상당한 마정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왜 마법식 같은 걸 개발하느냐고 물었죠?”
“네, 정말 왜 그러세요?”
“앞서 말한 이유들도 있지만, 실은 라피스 때문에 많은 걸 잃었거든요.”
“……?”
“그래서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무슨 말일까? 알레스는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그의 얼굴에 해답이 있다는 듯이.
라피스 때문에 많은 걸 얻은 게 아니라 잃었다고?
“또… 나처럼 무언가를 잃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요.”
알레스는 공작의 말에 왠지 숙연해졌다.
의도치 않게 뭔가 심각한 걸 건드린 느낌.
왜 찔러도 자꾸 천년 묵은 지뢰 같은 걸 찌르느냐고.
“아, 이런. 말하다 보니 또 대단한 것처럼 포장이 돼 버렸군요. 말은 그럴싸하지만 실은, 복수하겠다는 뜻입니다.”
“네? 복수요? 정의의 심판 같은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냥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누군가가 견딜 수 없이 미워서 하는 후줄근한 복수요.”
공작님, 믿을 소릴 하셔야 믿지요.
“에이그, 카이트도 수줍음이 많은가 봐요. 세상 모든 사람을 걱정하면서 아닌 척하시긴. 좋아요, 그런 걸로 해 두죠. 그렇다 해도 마법식이랑 복수가 무슨 상관이에요?”
알레스가 던진 질문에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순간 그 웃음이 매우 서늘하게 느껴졌다.
“가장 잔인한 복수란 원래 가장 소중한 걸 빼앗거나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그렇…겠죠.”
“안타깝게도 내 원수에게 중요한 건 돈밖에 없어서요. 그게 휴지조각이 되게 해 주는 수밖에 없어서요.”
“…….”
“그가 마정석 광산을 가지고 있거든요. 또 오랫동안 라피스에 눈독을 들여 왔고요. 그 외에도 마정석으로 폭리를 취하기 위해 갖가지 농간을 부려 왔습니다.”
공작,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잖아!
돈 좋아하고 돈 불리는 재미를 최고로 꼽는 알레스는 저게 얼마나 잔인한 복수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저 개인적인 복수라고 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알레스는 마지막으로 딴죽을 걸어 보았다.
“마정석 가격을 잡기 위해 라피스를 푼다든가 아예 마정석을 대체할 마법식을 연구한다든가. 이런 걸 복수로만 보기엔 무리가 따르는데요?”
“어째서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잖아요. 복수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살기 좋은 곳이 될 거 같은데요?”
알레스의 문제 제기에 공작은 조용히 웃었다.
“그자의 부가 쌓이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빈곤이 필요하죠. 그래서 나는 빈곤을 없애기로 한 겁니다. 내 원한은 이토록 깊습니다.”
“…….”
무서운 사람 맞네.
웃는 낯으로 저리 무서운 소릴 하다니.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카이트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내 방 창문 앞에 불쑥 나타나고.
친오빠 행세를 하려 들며,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집착하고.
책도 강의도 재미없을 것 같은데 은근히 골수팬이 있고.
지위에 비해 매우 소박하지만 마력이고 마정석이고 없는 게 없는.
아, 얼마 전에 자신과 접촉사고도 일으킨.
카이트에 대해 알레스는 새삼 궁금해졌다.
“혹시… 카이트의 원수가 스노브 후작인가요?”
강하게 촉이 온다.
공작이 긍정의 뜻으로 가만히 웃었다.
“그와의 악연은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알레스는 조용히 명복을 빌었다.
스노브, 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