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내 걱정이나 할 걸
일이 왜 이렇게 커져 버린 거람?
그토록 위험하다고 소문난 일에 메르세데스까지 얽히게 하고 싶지 않은데….
알레스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실은 공작이 한 말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걸렸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이 오빠 사람 궁금해 죽게 만드는 스킬이 있네.
“뜻은 감사하지만 그러실 필요까지는….”
결국 이런 어정쩡한 사양의 말이나 웅얼거릴 수밖에.
잘나가는 마법식 천재에서 병풍으로 전락한 브린 황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이디 페레티의 파트너십 제의를 기껏 튕겼더니 정작 카이트 녀석 한다는 소리가 ‘나를 바꿀게요’?
절대로 동업해선 안 된다고 눈총을 쏘아 댈 때는 언제고, 저런 부끄러운 멘트와 함께 다 갖다 바치고 있으니.
두 사람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은 차분하게 자신의 조건을 제시했다.
“대신 이렇게 업무를 분담했으면 합니다. 메르세데스에서 마법식을 연구 개발하는 일을 맡고, 페레티에서는 그 결과를 실제 서비스에 적용하는 일을 맡기로.”
“……?”
다른 사람이 저와 같은 말을 했다면 알레스는 아마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핵심 원천 기술은 우리가 가져가겠다.
너희는 평생 로열티를 빵빵하게 지불하면서 우리 기술을 쓰렴.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공작이 저런 말을 하니 알레스는 생각이 많아졌다.
공작의 평소 성품으로 봐서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터.
알레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기술 사용료를 얼마나 드려야 하는지….”
아니나 다를까 공작은 청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용료는 필요 없습니다. 연구한 기술을 적용해 볼 데가 필요하던 참이니까. 오히려 저희가 시험료를 지불해야겠군요.”
역시! 공작은 그럴 작정이었어!
상대의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다고 여긴 알레스는 마침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트, 정말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무엇을 말입니까…?”
“혼자 다 뒤집어쓰려는 거잖아요! 내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결국은 본인이 다 하려고!”
“아닙니다, 알레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방식을 바꾸겠다더니, 나를 바꾸는 대신 자신을 바꾸겠다더니 그대로잖아요. 아니 더 심해졌어요.”
“…….”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주는, 그런 일방적인 희생 말고 같이 가는 방법을 찾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마법식 마차 개발도 개발이지만 공작의 앞날을 위해서 이참에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알레스는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지식한 도덕책으로 살다가는 남들한테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니까.
“또 혼자서 위험한 일을 감수하려고 하잖아요. 제가 마음 놓게 하고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그래 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못살아. 공작은 역시나 눈사람 종족이었어….
“어떤 게 절 아끼고 좋아하는 방법인지 알고 싶다고 하셨죠?”
“가르쳐 줘요.”
“밥값을 하게 해 주세요.”
“밥값?”
“네, 공짜 밥은 싫어요. 밥벌레가 되기 싫다고요. 노력으로 쟁취한 음식을 마음 편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어요. 보세요, 제가 먹는 데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이랍니다.”
그래, 저쪽 세상 양자강의 좌우명도 ‘밥값은 하자’였다니까.
“그러니까 카이트도 궂은일, 힘든 일, 위험한 일을 혼자서 전부 짊어지려 하지 말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알레스.”
“네네, 알아요. 카이트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카이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고요. 다 저를 위해서라는 거 알고 있다고요.”
“그게 아니라….”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주제넘은 소린지 몰라도 몇 마디 더 할게요. 제가 카이트의 매니저이기도 하니까요.”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이 부탁하자 알레스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우선 카이트는 너무 물렁해요.”
“물렁… 합니까.”
“또 너무 헤프고요.”
“헤프다….”
“네, 물렁하고 헤퍼요. 호의로 대하면 호의로 돌아오는 세상이라면 그래도 상관없겠죠. 아시다시피 현실은 그렇게 말랑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공작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엄하게 단속했던 것처럼, 이번엔 알레스가 세상 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병풍 황자 브린은 정말이지 기가 찼다.
대체 어떻게 콩깍지가 씌면 뻣뻣한 건어물 공작이 물렁해 보일 수 있는 건지.
철벽을 치다 못해 망각의 베일까지 둘러썼던 감정 구두쇠에게 헤프다니!
사납고 교활한 여자에게 사랑스럽고 유일한 예외라느니 다람쥐라느니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정말 못 들어줄 노릇이었다.
브린은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너희 둘 진짜 그렇지 않거든!’
브린이 소름이 돋든 말든 알레스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점점 닮아 가는 유사 남매였다.
“특히나 최근에 저주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잖아요. 그와 반비례해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은 점점 올라갈 거고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기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레스는 모르고 하는 소리지만, 실제로 망각의 베일을 벗었기 때문에 공작의 매력을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할 터.
“그렇게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뒤통수를 맞거나 사기당하기 딱 좋다고요. 카이트는 너무 무방비해요.”
응? 브린의 고개가 또 돌아갔다.
시작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 중간에 이상한 길로 빠졌다?
세상에 저런 나무토막 같은 소년이 어디 있어! 진짜 소년 시절에도 소년 같지 않았구만.
그리고 이중삼중으로 방비하는 수성의 제왕한테 무방비가 웬 말인가!
추수감사 축제 때 그 치 떨리는 강연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나 보지?
“눈빛이든 표정이든 결코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고요. 그렇게 다정다감한 눈빛은 안 된다고요!”
뭐? 브린이 기겁하며 이번엔 친우를 쳐다봤다.
다정다감? 너 레이디 페레티를 그런 눈으로 봤니?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알레스는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아요, 카르티에 공작처럼요! 늘 미소 띤 얼굴과 유혹적인 눈빛, 친절한 태도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자신의 마음은 절대 내주지 않죠. 글쎄 강연 초대권 한 장을 안 주더라니까요.”
“카르티에처럼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요!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카이트가 손해를 안 봤으면 해서….”
“왜요? 고객이라서?”
“네? 그렇죠….”
“유념하겠습니다.”
공작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레스는 어딘지 만족스럽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다.
“카르티에 공작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지만 자신에겐 더욱더 친절하죠.”
알레스가 왠지 쑥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공작에게 다가섰다.
“카이트도 다른 사람에게만 다정하고 친절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공작의 파란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
파랑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색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공작의 눈을 바라보는 알레스의 가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알레스의 말을 듣고서야 공작은 자신의 오랜 숙적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카이트, 독해져야, 아니 현명해져야 해요. 그러니까 우선 마법식 문제부터 냉정하고 야무지게 풀어가 보아요.”
“아, 알레스, 그건 말이죠….”
공작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레스가 우려하는 것처럼 혼자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물론 알레스를 아끼고 걱정하는 건 분명합니다.”
공작이 난처한 듯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실은 이미 연구 개발에 들어갔거든요. 착수한 지 좀 됐습니다.”
“무슨…?”
“마정석을 마법식으로 대체하는 연구요.”
“네에?”
“이미 연구 개발이 꽤 진행됐는데 중복해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희의 최종 목표도 당연히 연구한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라서. 안 그래도 적당한 곳을 찾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업무를 분담하자고….”
“네, 그렇습니다.”
“당연히 황자 전하와 함께 하셨겠네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했다.
브린 황자가 웃음을 내리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알레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꺄하하하. 그것도 모르고!
공작에게 어쭙잖은 인생 훈계까지 늘어놓으며 오지랖을 휘날렸단 말이지?
같잖고 가소로운 소리를 늘어놓았을 뿐 아니라 어이없게 김칫국까지.
드레스 입고 김칫국 들이켜지 말란 말이야!
알레스는 자신의 대 착각 쇼가 부끄러운 나머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도대체! 마력이 철철 넘친다면서 마법식은 뭐 하러 연구해요?”
부끄러움 뒤에 밀려오는 신경질.
못 한다더니 잘만 하네! 무조건 못 한다고 잡아떼던 브린 황자도 째려보았다.
“그건… 마정석 가격을 잡기 위해 언제까지고 메르세데스의 마정석을 퍼다 쓸 순 없으니까요.”
브린이 머뭇거리며 내놓은 변명에 알레스는 눈을 껌뻑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메르세데스에 마정석이 많아요?”
“네. 그것도 순도가 매우 높은 마정석이죠. 메르세데스령에만 있는 라피스라는 물질입니다.”
“라피스?”
악마의 기운을 물리치고 천사의 가호를 부른다는 ‘푸른 수호석’.
마차 등의 연료로 때는 건 마정석 중에서도 주로 질이 떨어지는 잡석이었다.
그런 저급 마정석과 굳이 연비를 비교하자면 라피스가 50배 정도 높았다.
라피스 하나가 다른 귀족들의 광산에서 캔 같은 무게의 마정석 50개와 맞먹는다는 말이었다.
물론 라피스를 연료로 때는 무식한 사람은 없으리라.
라피스처럼 순도 높은 마정석은 ‘윌스미스’라고 부르는 마정석 세공사에게 맡겨 아티팩트로 만드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었다.
여기까지 브린의 설명을 들은 알레스가 물었다.
“메르세데스에 라피스가 얼마나 있는데요?”
“매장량 말인가요? 정확히 모를 정도로 많습니다. 상당한 양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글쎄 모르죠. 메르세데스의 빙산이 전부 라피스 광산인지도.”
디리리리링.
알레스의 눈에 전구가 전부 들어왔다. 1만 룩스 광채가 머릿속을 하얗게 지웠다.
금욕주의자 공작이 알고 보니 마정석 알부자!
알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양 손바닥을 공손히 모아서 앞으로 내밀 뻔했다.
주떼요, 마정석.
“그럼, 카이트도 마정석 광산을 소유한 귀족 중 하나잖아요. 아니, 방금 들은 얘기대로라면 광산 소유주 연합의 수장으로 추대되고도 남겠는데요?”
마력이 넘칠 뿐 아니라 순도 높은 마정석을 그리 많이 가지고 있다면 정말이지 왜?
왜 마법식 따위를 연구하냔 말이죠.
“오히려 카이트는 마법식 연구를 못 하게 막아야 하는 쪽 아닌가요? 자신의 재산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저 같은 사람을 그 누구보다 싫어해야 정상인 거 같은데….”
보통 마정석도 아니고 순도가 그리 높은 마정석이라면 값도 어마어마할 텐데.
마정석이 권력이라면 카이트 당신은 제국 최고 권력자에 가장 위험한 사람?
당신, 인기 빼고 없는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