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하고 싶은 거 다 해
“지금 하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마정석 연료 대신 마법식으로 마차를 움직이는 일.
그 일은 단순히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매우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는, 자칫 위험해질 수 있는 시도라는 걸 알레스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알레스는 저렇게 답했다.
“이상하군요. 그러려면 위험한 일은 멀리하면서 몸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브린이 참지 못하고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물론 혼자 안전한 방법으로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는 일을 끌고 갈 수 있을 거예요. 소박하게 생계를 꾸리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고요.”
브린도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저는 욕심이 많은지 더 오래가고 싶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곰곰이 방법을 고민해 보았더니 주변을 더 살기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에요.”
으, 내 말투 왜 이래?
역시 맘에 없는 소릴 하려니 연기가 영 어색해지네.
알레스는 자신의 요상한 말투에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정석이 필요 없어지거나 가격이 떨어지면 백성들 삶도 덜 팍팍해지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삶이 윤택해질수록 제가 하는 사업은 더 커지게 되어 있답니다.”
이번 대사는 좀 자연스러웠나?
감정 잡고, 표정, 표정.
“그러니까 뭐랄까…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먼저 서재 청소에 공을 들이는 거와 같은 이치랄까요.”
알레스가 검지를 세우며 설명을 보충했다.
“…….”
공작은 말없이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발연기로 인한 설득 실패?
레이디 페레티가 가식적인 이미지만 획득하였습니다.
“알레스 당신은 정말….”
공작이 복잡 미묘한 눈빛을 한 채 말했다.
“언제나 백성들 걱정뿐이군요.”
어쩌면 당신은 진정 황비, 아니 황후의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결코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공작이 이처럼 고요히 자신의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알레스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화면을 되돌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공작다운 반응이었다.
공작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을 좋은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분명 고마운 일인데 왜 자꾸 ‘천적’이란 말이 떠오르는 건지….
‘상성이 안 좋아….’
그러고 보니 알레스 말고 굳어 버린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했다.
브린 황자 역시 황당한 얼굴로 친우를 쳐다봤다.
원래 마음 약한 브린을 공략하기 위해 알레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연극이었으나 그 목적마저도 달성하지 못한 터였다.
브린조차 코웃음을 치고 있었으니.
그런데 눈에 콩깍지가 낀 공작이 그 미끼를 덥석 무는 게 아닌가.
미끼를 던진 이조차 당황했는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청새치 잡으려다 청상어 잡아 버린 어부의 얼굴이랄까.
말문이 막힌 어부와 청새치는 심해 왕자가 하는 양을 꼼짝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난, 지금도 매우 이기적인 이유로 알레스가 이 일에서 손 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공작이 알레스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작 공작 본인의 눈은 대해처럼 망망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환경이 조금 오염되고 사람들 사는 게 덜 편안하고 마정석이 더 일찍 바닥을 드러내더라도 알레스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덕책 공작의 때아닌 양심선언에 알레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아니면 그 모든 위험한 일을 알레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그 일을 대신할 자격을 준다면 더 좋겠고요.”
또… 친오빠 마음입니까? 혈연 이기주의인가?
“네, 압니다. 매우 졸렬한 생각이지요.”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알레스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부끄럽지만 이게 나입니다.”
“에이, 다 그렇죠 뭐.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자꾸 졸렬하네, 이기적이네 말하면 나는 어쩌라고요!
사기꾼 알레스는 바늘방석을 깔고 앉은 거처럼 양심이 뜨끔거렸다.
괜히 자신에 관해 그럴싸하게 포장했나 싶어 약간 후회가 됐다.
“실은 공유 마차의 동력을 마법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알레스가 포기하도록 설득하려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그래서 반대하실 건가요?”
“내가 반대하면 포기할 겁니까?”
“아마도… 아니요.”
“예상했던 바입니다. 그게… 알레스죠.”
“아, 네….”
뭐야, 뭐야. 징그럽게 말 안 듣고 제멋대로인 게 나란 소린가?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불통 구제불능?
“생각해 보면 알레스는 그런 사람이죠. 나는 그런 사람인 알레스를 아끼고 좋아하는 거고.”
“…….”
“실은 막 깨달은 건데… 지금까지 내 방식이 틀렸던 거 같습니다.”
“카이트의 방식?”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퍽 서툽니다. 잘못될까 걱정하고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주고… 그런 방식밖에 몰랐습니다.”
“…엄청 훌륭하게 들리는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꽤나 괴롭혔죠. 각별히 아낀다는 이유로 각별히 괴롭힌 거 같은데….”
공작의 얼굴에 쑥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알레스의 얼굴에도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공작과는 다른 이유였다.
“당신은 좋아하지 않았죠, 내 방식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요, 당신은 분명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좀 놀랐습니다. 그때까지 내 방식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거든요.”
“아니, 전 카이트의 방식이 옳으니 그르니 따질 위치도 딱히 아니고….”
왜 이러세요, 정말.
공유 마차에 마법식을 도입하기 위해 협상 혹은 후려치기를 하러 온 사람에게….
게다가 공작이 말한 저 ‘아끼고 좋아한다’는 건 어떤 뜻일까?
알레스는 혹시 자신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겸허하게 돌아보았다.
실은 영지민을 아끼고, 눈고양이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아끼고 좋아하는’ 건데 자신이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고 보니 김칫국을 마신 지도 꽤 오래됐다.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그리스 조각상처럼 생긴 공작님 앞에서 이렇게 김칫국 마셔도 되는 건지.
자신의 혼란스러운 뇌가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멍하니 듣고 있던 알레스의 눈에 문득 들어온 게 있었다.
맞잡았다 놓았다, 쥐었다 폈다 하는 두 개의 손.
언젠가 저 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고상하고 섬세해 보이는 얼굴과는 꽤 대조적인 손이라고.
그가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는 샌님이 아니고 연중 이백 일을 전장에서 보내는 변방의 영주이며, 펜보다 검을 쥐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 날.
그날 알레스는 손마디와 힘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
그는 얼굴에 많은 감정을 담지 않는 편이었다.
눈빛도 폐쇄적이랄까, 심해처럼 그 안에 든 속마음을 가늠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언제나 얼굴보다는 손이 더 많은 걸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긴장하고 있었잖아….’
도도해 보일 정도로 단정한 얼굴과 달리 크고 투박한 손이, 담담하고 침착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이 이번에도 더 많은 걸 말해 주었다.
알레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으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공작의 손이 마치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경고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공작의 모든 움직임이 알레스의 눈엔 슬로모션으로 보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저 입을 콱 막아 버리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겠지?
“알레스.”
공작이 목소리를 내자 시간이 다시 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마 난 여전히 꽉 막힌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문득문득 잘못된 방식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걸 억지로 권하면서 내 성실함을 알아주지 않는다 원망할 수도 있겠죠.”
뭐가 뭔지 모르게 진지하고 엄숙하면서 아주 약간 오글거리지만 뭐 아직은 참을 만해.
푸른 불꽃의 고결 스타일에 이제는 나도 적응이 좀 됐지.
“지금까지 내 방식은 상대가 틀렸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었더군요. 그러니 늘 상대를 바꾸어야 직성이 풀렸죠. 그에 비해 당신은 다르다는 말을 자주 쓰더군요.”
정작 나한테는 써 주지 않아 초조하고 섭섭하지만.
공작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이었다.
이제는 손도 차분히 안정돼 있었다.
“알레스가 말하는 걸 듣고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틀리기는커녕 홀로 외롭게 옳은 길을 가려 한다는 걸.”
쓰읍, 내 연기가 폭망은 아니었나 보네.
알레스는 약간의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당신은 분명 틀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당신이 걱정됩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은 분명 옳은 일인데, 그럼에도 어떻게든 만류하고 싶습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신뢰감 가는 중저음의 목소리 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발성, 침착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호흡, 세련된 발음….
“위태롭고 험난하지만 옳은 길을 가려는 당신을 지지해 주는 것. 당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 어떤 게 당신을 아끼고 좋아하는 방법인지 가르쳐 줘요.”
청중을 빠져들게 만드는 눈빛과 표정, 곧고 당당한 자세, 겸손함과 따스함이 깃든 몸짓, 청중에게 되묻는 화술….
공작님… 어디 연극원 출신입니까?
라이벌(?) 배우이자 매니지먼트사 대표로서 공작의 연설을 깐깐한 눈으로 지켜보던 알레스는 조용히 감탄했다.
공작은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허탈감과 상실감을 주는 유형이었다.
왠지 구멍이 많을 거같이 생겼는데 전부 쓰윽 잘해 버린다.
꼭 완성형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아싸의 저주에 걸리지 않았으면 주변에 시기하는 이도 많았을 거야.
공작을 눈앞에 두고 이런저런 공작 생각에 열중하는 알레스였다.
귓가에 다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이번엔 방식을 바꾸어 볼 생각입니다. 당신을 바꾸려 하는 대신 나를 바꾸어 볼게요.”
“네?”
“당신은 나의 유일한… 예외니까.”
“예외?”
“마법식 마차 개발에 우리 메르세데스도 힘을 보태겠단 뜻입니다.”
“네엑!”
“뭐억!”
높고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가 두 군데서 동시에 터져 나왔지만 하나는 허망하게 묻히고 말았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다시 말하지만 마법식 천재인 5황자만 순순히 협조하면 되는 일인데….
왜 카이트가 메르세데스를 통째로 들고 나서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