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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74화 (74/120)

74화

위험한 돌멩이

“위험해요? 실험 같은 게 위험한가?”

생각지도 못한 거절 이유에 알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해 답답했던 브린은 비로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기세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마정석이란 이 골치 아픈 요물 뒤에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요! 그 요물을 마법식으로 싹 대체하자니까요.”

알레스가 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야무지게 허공을 휩쓸었다.

“그게 아니라!”

브린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려다 한숨을 푹 쉬었다.

“마정석은 고가의 물건이면서 생활 곳곳에 쓰이지 않는 곳이 거의 없죠. 게다가 매장량이 한정돼 있고요. 그렇다는 건 마정석이 누군가에겐 재력이면서 권력이라는 겁니다.”

“마정석은 공공재가 아니군요.”

“마정석은 광산에서 채굴하는 거니 그 광산을 소유한 가문의 재산이죠.”

“황실이 소유한 광산은 없나요?”

“미미합니다. 몇몇 귀족 가문에서 대부분 독점하고 있죠.”

브린이 갑자기 알레스의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 알레스의 소중한 비상식량이 들어있다면서요? 빵이랑 사탕이랑.”

“그런데요. 왜요?”

알레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브린이 짓궂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만약 내가 그 가방을 뺏어 달아난다면 어쩌시겠어요?”

“어머!”

알레스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가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 정돈 아니거든요. 제가 그저 먹는 데 목숨 건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누누이 말하지만 전 맛있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먹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직 별말 안 했습니다만.”

“그리고 음식 자체보다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 음식에 관한 가치관 등을 중시하는 거라고요!”

“미처 몰랐습니다.”

벌써부터 저리 사납게 목청을 높이고 있으면서….

브린은 약간의 위협을 느끼며 맞은편의 레이디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귀한 재료로 공들여 만든 장인의 빵에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내가 덥석 집어가 버린다면요?”

브린의 말에 알레스가 인상을 썼다.

“게다가 빵 맛이나 모양을 음미하는 게 아니라 탄수화물은 비만과 각종 질병을 부르는 원흉이니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는 소리나 한다면요?”

브린이 얄밉게 웃으며 물었다.

“내게 어떤 일이 닥칠까요?”

알레스가 브린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을 생각 없이 본능에만 충실한 야만인쯤으로 생각하나?

물론 소중한 빵을 모욕했으니 면상에 접시를 던지는 거까진 아니어도 당신에게 깊은 원한을 품긴 하겠지.

‘언젠가 한번 저걸 콱’ 하고 벼르다가 으슥한 곳에서 기회가 오면 뒤통수 한 대쯤은 때릴 수도.

“불쾌하네요. 그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폭력을 휘두를 생각을 하긴 했네.

브린은 흠칫하며 자기도 모르게 알레스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곁에서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지켜보는 공작 역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빵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리 시간을 질질 끌면서 꽁냥대냔 말이지.

친우의 친절함이 못마땅했다.

지난번 미리 고백했듯이, 알레스와 브린이 가까워진다면 자신은 브린 역시 질투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린은 물 만난 고기처럼 설명을 이어갔다.

“마정석이 비싸고 희귀한 만큼 그 소유자들이 지니는 힘도 막강하죠. 그런데 자기들의 힘이요 목숨 줄인 마정석을 누군가 무용하게 만들고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면?”

“가만히 있진 않겠군요.”

“가만히 있지 않는 정도가 보통이 아닐 겁니다. 자기 걸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매우 잔인해질 수 있거든요. 한두 사람이 아니라 무리라면 더욱더.”

매우 위험해질 수 있겠군, 알레스는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이걸 설명하려고 빵 얘길 꺼내다니. 내가 빵을 빼앗기면 잔인해질 거라는 건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고가에, 폐해도 많은 마정석 대신 마법식으로 마차를 움직인다면 모두가 환영하리라 생각했다.

기술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혹시 작위라도 받게 되는 거 아닌가, 김칫국을 마시기도 했는데.

이 망할 놈의 귀족들, 왜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야!

물정을 모르는 건 그들이 아니라 알레스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순진한 접근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황제나 황족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진 않겠지요. 그런 면에서 황자 전하는 유리하시잖아요.”

알레스의 말에 브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은 더 막강하고 위험합니다. 마정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때로는 황제를 능가하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네? 현 황제 폐하를 생각하면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그 성질에 그걸 용납할 수 있다고?

“그들은 황제를 자기들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익에 방해가 된다면 황제도 전혀 안전하다고 볼 수 없어요. 하물며 나 같은 한량은….”

말끝을 흐리는 황자를 알레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 정상은 아니죠. 제국은 구석구석이 썩어 있습니다. 거기에 독버섯들이 잔뜩 돋아나 있죠.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비슷하군.

알레스는 저쪽 세상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헤르메스는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일 수 있었죠?”

알레스가 별생각 없이 묻자, 순간 두 사람이 긴장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음?’

하지만 이번에도 곧 브린이 나서서 설명했다.

“자금력이라면 헤르메스도 뒤지지 않거든요. 워낙 시대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이는 조직이라서요. 즉 무시 못 할 권력 집단이란 소리죠.”

“어휴, 으리으리한 데가 왜 이렇게 많아요?”

알레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많다기보다 레이디가 찔러도 꼭 으리으리한 데만 찌르는 겁니다.”

브린도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황제의 전 부인에 카르티에의 동업자, 들이받으려는 건 독버섯 일당이요, 눈독을 들이는 건 헤르메스라.

무엇보다 메르세데스 건어물 도덕책의 유일한 레이디 예외라니.

저 레이디한테 무슨 악마나 정령이 붙은 게 틀림없지.

브린은 날카로운 눈길로 알레스를 쏘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사업자 길드이니 로비나 뒷공작에는 이골이 났죠. 아마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돈을 좀 썼을 거예요.”

“그럼 저도 로비나 뒷공작을 하면 안 될까요? 돈은 없어도 인맥은 좀 있는데.”

“뭐니 뭐니 해도 자기들 이득이 우선이죠. 헤르메스의 이륜차는 길드 안에서만 쓰는 업무용 차량이니 민간에 보급될 염려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일반 마차와는 경우가 달라요.”

그렇다. 마법식으로 운행하는 마차가 성공한다면 마차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고가의 마정석을 연료로 쓰는 대신 마법식으로 교체하려는 바람이 거세게 일겠지.

그럼 마정석의 가치는 떨어지고 그걸 소유한 가문들의 위세도 떨어지겠지.

알레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마법식으로 바꾸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들의 위세가 줄어든 만큼 환경도 숨을 쉬고 백성들도 한숨 돌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자신같이 일한 만큼 먹고사는 자수성가형 영세 귀족도 수지 타산을 맞추느라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아 놔, 온갖 잔머리와 잔재주를 동원해 어찌어찌 수지를 맞춰 놓으면 마정석 값을 냉큼 올려 버리니.

분하고 허탈한 마음에 혈당이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악녀의 오기가 발동했다.

“황제도 안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저같이 가문도 한미하고 쥐뿔, 아니 무엇 하나 가진 게 없는 이혼녀가 천방지축으로 들쑤시고 다니면 그들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란 말씀이시죠?”

그런 말씀이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그 말을 하니 듣는 사람 마음이 좀 그랬다.

특히 공작의 눈엔 벌써부터 푸른 불꽃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오해는 마십시오. 걱정돼서 드린 말씀입니다.”

브린이 누구 걱정을 해야 할지 헷갈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어요.”

알레스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말이죠. 이렇게 혈혈단신 기댈 데 없는 제가 적임자 아닐까요?”

뜻 모를 알레스의 말에 공작과 브린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차피 가문은 더 망할 데도 없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설령 위험에 처한다 해도 잃을 게 별로….”

알레스는 처연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지금부터 레이디 페레티의 연극 타임!

명배우의 산실인 샤를테론 예술단에서 귀동냥과 눈썰미로 익힌 연기를 선보일 시간이었다.

꽃미남 마부들이 그곳에서 연기 수업을 받을 때 같이 들락거리며 배웠으니까.

알레스는 이번에도 황자의 여린 마음을 공약해 볼 심산이었다.

처량한 눈빛과 동정심을 자극하는 대사와 연기를 무기 삼아 마음 약한 브린을 또 한 번 흔들어 보리라.

“…설령 위험에 처한다 해도 크게 슬퍼할 사람 없는 제가 해 보겠습니다.”

대사를 친 알레스는 눈썹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장면은 알레스가 연습한 대본과는 전혀 달랐다.

브린을 압박하기 위해 준비한 연극에 엉뚱한 남자가 걸려든 것이다.

“알레스, 어떻게 그런 말을….”

두 눈에 서운함을 담뿍 담은 공작이 알레스를 책망했다.

아니, 중요한 대목에서 왜 카이트가 튀어나와요?

당황한 알레스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공작의 눈빛을 슬쩍 피했다.

“알레스가 책임져야 할 사람, 정말로 없습니까?”

“예에?”

생각지 않은 배역의 생각지 못한 대사에 알레스의 입이 벌어졌다.

브린이 눈을 번뜩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지. 남자의 순정을 가져갔으면 책임을 져야지.

“매니저인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고객의 삶이나 미래는 어쩌고요? 상단의 직원들은요?”

아아, 그 책임….

공작이 알레스에게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그 일을 하려는 겁니까?”

위험을 자처하고, 내 마음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휘저어 놓고.

나를 질투에 찌든 못난 남자로 만들어 놓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공작의 다정하면서도 엄격하게 느껴지는 물음에 알레스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아니, 이유야 뻔한 거 아닙니까.

지금보다 더 많이 해 먹으려고요.

오래오래 천년만년 자손 대대로 해 먹으려고요!

현재에 만족하면 미래가 불만족스러울 테니까.

잘나갈 때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니까.

‘내 사업은 대부분 이미지 장사야.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이 필요하다고.’

스토커 남작과도 차기 홍보 콘셉트를 잡아 두었단 말이지.

공유 마차의 다음 이슈는 ‘마정석 프리, 마법식 혁명’이라고.

알레스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걸 도덕책 번역기로 잘 바꿔서 설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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