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뉴 비즈니스 파트너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제 부탁을 수락하시는 건가요?”
알레스가 확인하듯 묻자 브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느낌이 싸하다.
어째 비슷한 일을 이미 당한 적 있는 거 같은데….
‘이래서 한 번 사기 당한 사람이 또 당하는 건가.’
알레스가 그 엉성함이 놀랍다는 듯 브린을 쳐다보았다.
주둥이를 가볍게 놀린 죄로 그렇게 당해 놓고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다니.
“아하하, 설마 레이디 페레티가 나를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겠습니까. 안 그래요?”
브린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동의를 구했다.
지난번엔 교활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함정을 판 게 맞는데요?
알레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 브린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사실 브린이 다른 이보다 유독 허술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황족치고는 세상 물정에 밝은 편이었다.
이런저런 직함도 갖고 있고, 공작의 곁에서 이런저런 훈수도 둘 만큼.
그런데도 알레스 앞에서 이처럼 속절없이 망신을 당하는 건 그에게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알레스가 일종의 변칙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에겐 어쨌든 명예라든가 체면이라든가 예의범절 등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적인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는 건 천박한 짓으로 여겼다.
물론 뒤로는 별별 호박씨를 다 까지만.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온 귀족들에겐 지켜야 할 통념이라는 게 있었다. 그것이 허울에 불과할지라도.
‘그래서? 어떡하라고?’
하지만 알레스는 이런 말로 그들의 룰을 가뿐히 무시해 버리는 위인이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코뿔소란 뜻이었다.
안전장치에 익숙해진 귀족들은 어어어 하다가 뿔에 들이받혀 온몸이 공중에 붕 뜬 후에야 사태 파악이 됐다.
사람에 따라서는 두어 번은 날아야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 한 경우도 있을 테고.
알레스의 콧등에 솟은 무자비한 뿔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처럼 그리 인정사정없이 굴 생각은 없었다.
브린 황자는 공작의 친우니까.
물론 면죄권으로 등쳐먹을 때도 그는 공작의 친우였다.
그렇지만…, 알레스는 생각했다.
그때의 공작과 지금의 공작은 같은 공작이 아니니까.
지금의 공작은….
‘나를 알레스라고 부르고 내가 카이트라고 부르는 공작이니까.’
그때와 지금은 우주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 그가 특별한 공작이 되면서 그의 친구도 덩달아 지위가 격상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럼요, 전하. 전 사업가로서 의논을 좀 드리려는 거뿐이에요.”
알레스가 진지하게 말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업 파트너로 함께 일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네? 대체 무슨 일을요?”
브린은 자기도 모르게 공작의 눈치부터 살폈다.
친우의 미간에 벌써 거대한 저기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버썩 마른 사막 모래 같던 친우가 어느 날부터인가 음습한 질투 대마왕이 되었으니까.
괜한 불똥을 맞을 수 있었다.
공작의 가슴속에선 정말로 스산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나에겐 고객이라고 하더니 브린에겐 파트너….’
뭔가 파트너 쪽이 능력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라 고객은 거리감이 있는 데 비해 파트너는 더 친근하고 끈끈한 느낌이지 않은가.
서운함인지 질투인지 모를 뒤숭숭한 감정을 느끼며 공작은 요즘 부쩍 건강이 나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해지려고 했는데,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 작지만 변덕스럽고 성질 급한 장기가 느닷없이 낯설고 불편하게 움직였다.
그는 전장에서 단련돼 야성이 숨쉬는 넓고 단단한 가슴을 지녔지만, 그 가슴속은 매우 좁아져 있었다.
자신 안에 그처럼 작고 초라하고 너그럽지 못한 마음이 들어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공작은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파트너보다 더 가깝고 끈끈한 건 친오빠지. 역시 친오빠로 밀고 나가야 하겠군.’
전혀 엉뚱한 쪽으로 남몰래 승부욕을 불태우는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카이트도 함께 듣고 조언해 주면 고맙겠어요.”
그나마 알레스가 이렇게 말한 덕분에 작은 위안을 얻고 꽁한 마음이 조금 풀렸지만.
“차근차근 말씀을 드려 볼게요.”
알레스는 말과는 달리 조금 긴장되는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희 공유 마차가 요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폭발적인 반응이죠.”
음, 그래. 제도를 씹어 먹었지.
“과찬이세요. 모두 저희 공유 마차에 담긴 소박한 생각에 공감해 주신 덕분이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꽃미남 마부들과 화끈한 서비스로 유혹한 덕분이지.
“가장 잘나갈 때야말로 잠깐 멈춰 서야 할 때란 말이 있잖아요.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점검해 보고 주변도 한번 둘러보고요.”
알레스의 설명을 듣자, 방금까지 요상한 감정으로 들끓던 공작의 눈에 푸른 불꽃의 고결다운 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공유 마차 사업을 시작했나 생각해 봤어요.”
귀족들 돈을 삽으로 퍼 담고 자루로 쓸어 담으려고 시작한 게 크지만.
“마정석을 연료로 쓸 때 좋지 않은 물질이 나온다면서요? 공기도 오염되고 사람들 건강도 해치고요. 게다가 매장량도 한정돼 있어서 자원고갈 문제도 심각하고요.”
“따로따로 마차를 운행하는 것보다 공유 마차를 이용하면 마정석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그 말씀?”
“네. 그런데 기왕이면 줄이는 거보다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어요?”
“마정석 없이 마차를 움직인다고요?”
“네, 그러고 싶어요.”
“아예 안 쓴다는 게 아니라 혹시 마정석 세공 같은 걸 얘기하는 건가요? 마정석을 연료로 때는 게 아니라 아티팩트로 만들어서 마력을 이용하는 방식.”
“아, 그런 방식도 있군요.”
“레이디, 그건 너무 고급 기술이라 비용도 많이 들고 대중화하긴 힘들어요.”
“흠, 아쉽네요. 하지만 제가 생각한 방식은 그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첨단 기술이면서 비용도 적게 들죠.”
“그래요?”
“공해도 없고 초기 개발비가 조금 들까, 유지비도 거의 들지 않거든요.”
브린의 눈에 경계의 빛이 살짝 감돌았다.
“어떤… 기술이기에….”
“천재 한 명만 있으면 되는 일이거든요.”
“누구….”
너님이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마법식 천재라면 제국에 단 한 분뿐이시죠.”
브린이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알레스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마법식으로 마차를 움직이겠단 말입니까?”
“네, 황자 전하가 도와주신다면 가능한 일이잖아요.”
내가 말이죠, 당신이 마법식 천재라는 걸 알게 된 후 여태 이날만을 기다려왔단 말이죠.
당신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마도구나 마법식을 싼값에 후려치는 순간을!
알레스의 눈이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번쩍 빛났다.
브린은 알레스의 기세에 멈칫했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이번엔 절대로 넘어가선 안 돼.’
그런데….
뭔가 싸늘하게 옥죄어 오는 느낌이 어째 맹수가 한 마리가 아닌 거 같다?
헉! 소 맹수 뒤에서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는 저 거대 맹수는 뭐야?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뜨거운 입김이 날카로운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듯했다.
한 쌍의 맹수 앞에서 눈치를 보느라 브린은 식은땀이 났다.
무시무시한 네 개의 안광이 자신을 노려보았다.
도와주란 말이야? 도와주지 말란 말이야?
도와줘? 도와주지 마?
해? 하지 마?
브린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동안 공작은 질투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도 마법식을 할걸!’
사실 강한 마력과 뛰어난 마법 실력 때문에 굳이 마딩(마법식 프로그래밍)을 익힐 필요가 없었을 뿐, 아카데미 시절 만점을 받을 만큼 소질이 있지 않았던가.
공작은 마법식을 더 연구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물론 알레스를 말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다.
마력보다 마법식이 더 환영받는 세상이라니….
“안 됩니다. 아니, 못 합니다!”
브린이 대 맹수와 소 맹수를 향해 소리쳤다.
“거짓말 마세요. 황자 전하는 할 수 있고도 남으시잖아요.”
소 맹수가 으르렁거렸다.
“못 해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봤는걸요. 아무렇지 않게 대량으로 사용되는 걸.”
“어, 어디서… 그런 걸 보고 다니는지!”
“헤르메스요. 뉴 탈라리아라는 소형 이륜차를 백 프로 마법식으로만 움직이는 걸 봤어요!”
헤르메스는 역사가 깊은 전령 길드였지만,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해 여론 조사나 정보 수집 쪽으로 조합원들이 사업 방향을 틀었다.
특히 자체 개발한 통신 마도구인 ‘탈라리아 메신저’는 여론 조사와 정보 취급 분야의 판을 바꾸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빌보아 차트>.
젊은 귀족의 인기 순위를 매기는 그 유명한 차트가 바로 헤르메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무역도 늘면서 물자의 이동이 늘어나리라 생각한 헤르메스의 조직원들은 다음 사업으로 저쪽 세상의 택배 서비스 같은 걸 구상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전언과 물건 배송을 위한 소형 이륜차를 자체 개발해 조합원들에게 보급했는데, 그게 ‘뉴 탈라리아’였다.
“뉴 탈라리아는 구조가 간단해서 마법식만으로 작동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저도 유모에게 한 대 장만해 줬거든요.”
“샀다고요, 그걸? 줬다고요, 유모한테?”
“네, 헤르메스라는 길드가 굉장한 거 같아요. 트렌드를 읽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기술력도 대단하고요.”
저쪽 세상으로 치면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IT 기업쯤 될까?
여기 주식을 사야 하는데.
“만약 투자할 일이 있다면 전 헤르메스에 투자할 거예요. 두 분도 혹시 여윳돈이 있으면 생각해 보세요.”
알레스의 후한 평가에 공작과 황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렇습니까. 생각해 보지요.”
공작이 왠지 부자연스런 태도로 대꾸했다.
“그렇죠. 헤르메스는 매우 괜찮은 조직이죠. 평판도 좋고 전망도 밝고.”
기분 탓인가. 브린이 왠지 웃음을 참고 있는 거처럼 보였다.
“마차는 그 배달 이륜차보다 덩치도 크고 더 복잡하지만, 황자 전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실실 올라가던 브린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축 내려왔다.
“난 못 한다니까요.”
“우선은 저희 공유 마차에 적용해서 시범 운행을 해 보고, 안정된 결과를 얻으면 일반 마차들에도 보급하는 거죠. 제국 내 모든 마차의 마정석 제로화!”
알레스가 야심만만한 포부를 밝히자 브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 마차뿐만 아니라 마정석 연료가 필요한 모든 도구와 장치에 마법식을 주입하는 거예요. 마정석 프리!”
이 레이디가 점점 더 위험한 소릴….
브린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쩜 저 소 맹수, 대 맹수가 자신에게 바라는 점마저 징그럽게 똑같은지.
인정. 운명이다 운명. 두 사람은.
“여하튼 난 모릅니다, 몰라.”
브린이 생각했던 것보다 완강히 뻗대자 알레스는 난감해졌다.
“잘 좀 생각해 보세요, 전하. 황족으로서 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기회인데, 천재적인 재능을 아깝게 썩히시려고요?”
알레스도 쉽게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알레스, 실은….”
대치중인 두 사람 사이로 공작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