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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72화 (72/120)

72화

첫 춤은 나와

“카이트의 인기가 올라가면 당장 저서의 판매량도 늘어난다는 걸 강연회 때 경험하셨잖아요?”

알레스의 목소리가 브린의 귀에 야무지게 꽂혔다.

그렇긴 했지. 간만에 좀 나가긴 했지.

“물론 모든 걸 카이트의 매력에 기댈 수는 없겠죠. 카이트가 차트 꼭대기를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는 동안 우리도 힘을 보태야죠.”

“어떻게 보태려고요?”

“우선은 공유 마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을 대상으로 메르세데스 공작령에 대해 홍보하려고요.”

“아, 요즘 공유 마차가 매우 인기라죠? 로잘린도 입이 닳도록 얘기하더라고요. 다양한 이슈로 연일 신문과 잡지를 장식하고요.”

공유 마차 얘기가 나오자 공작의 심해안도 조용히 빛났다.

공유 마차에 볼일이 하나 있었다.

“네,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고맙죠. 저희 마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귀족 중에서도 젊은 영애들, 호기심 많고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에요.”

“사회 변화에 관심이 많으면서 열성적으로 유행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훌륭한 홍보 요원이고.”

“네, 겨울은 가장 혹독한 계절이면서 메르세데스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계절이잖아요? 사람들이 그곳에 가고 싶게 만들 거예요.”

“책도 함께 홍보하면 좋겠군요.”

브린이 냉큼 숟가락을 얹었다.

“그럼요. 전 곧 있을 무도회도 가려고요. 가서 사교계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 거예요.”

“무도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공작이 불쑥 외쳤다.

“헙….”

“곧 있을 무도회라면 설마 황비 간택 절차의 일환인 그 황실 무도회?”

촉새 같은 브린 황자가 콕 집어 매우 자세히도 까발렸다.

“아, 그게….”

“레이디 페레티, 그건 좀 무리한 모험 같은데요.”

브린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보수적인 사교계에서 소문이 별로 좋지 않은 알레스는 일반적인 연회에 가서도 좋은 대접은 못 받을 터였다.

하물며 황실 연회라니. 게다가 황비 간택을 위한 행사에.

황제의 전 부인이 그 연회에 등장하는 퍼포먼스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겠지만 결코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뭣보다 폐하가 허락하겠습니까?”

브린이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을 던지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공작은 전혀 다른 쪽으로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가 보기에 황제는 분명 알레스에게 이상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밤비가 보고한 황제의 동태도 그렇고, 아까도 황궁에서 둘이 함께 있지 않았는가.

황비 간택을 청원하는 회의가 열리는, 그 예민한 시기에 황제는 알레스를 일부러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상의할 게 있다면서.

대체 무엇을?

공작의 눈이 황제를 향한 적개심으로 조용히 타올랐다.

말실수를 하고 진땀을 흘리던 알레스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세 번 차고는 적당히 털어놓기로 했다.

“실은 폐하가 비밀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래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겁니다.”

두 사람 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진정 미친 걸로도 황제다.

“아무리 황명이라도 그렇죠.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아니 귀족 사회 전체가 납득하겠습니까?”

브린이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물론 그런 부탁을 한 게 가장 정신 나간 짓이지만, 사람들이 감히 폐하를 욕하겠습니까? 결국 레이디 페레티만 곤경에 처하겠지요.”

딱딱거리는 건 브린인데, 알레스는 왠지 자꾸만 공작의 눈치를 보게 됐다.

밤새 오라버니의 훈계를 듣게 될까?

“그래서 무도회를 프림로즈인가 뭔가로 연대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면 된다고….”

알레스가 웅얼거리자 브린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황제가 작정하고 조치를 취했군.

프림로즈라면 젊은 귀족들만 참석하는 데다 반가면을 착용할 수 있으니.

음? 그런데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건 아직 데뷔탕트 볼을 치르지 않은 영애의 경우인데?

원칙적으로 이들은 황실 연회에 참석할 수 없지만, 제국의 경사를 앞두고 열리는 프림로즈 무도회만은 특별히 참석할 수 있었다.

대신 반가면을 쓰는 걸로 구별을 두었다.

가만있자. 레이디 페레티가 데뷔탕트 볼을 치렀던가?

“설마, 레이디 페레티, 무도회가 처음입니까?”

브린의 얄미운 주둥이를 향해 알레스가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눼.”

“어이쿠, 이런, 세상에나.”

알레스가 브린을 째려보는데 차분해서 한기가 도는 느낌을 주는 중저음이 들려왔다.

“알레스.”

공작이 부르는 소리에 알레스는 괜히 켕겨서 어벙하게 대답했다.

“예? 예에?”

하지만 공작은 날을 세운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가 맡긴 임무라는 거, 역시 비밀이겠지요?”

“네에….”

황비 후보자인 네슬라 영애를 뒷조사하는 남사스런 임무를 어떻게 말하겠어요!

“그 임무 꼭 맡아야 합니까? 거절할 순 없는 일인가요?”

사실 공작은 좀 복잡한 심경이었다.

자꾸만 황제와 얽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알레스가 아무렇지 않게 황제와 거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별 감정이 없다는 뜻 아닌가.

황제는 분명 감정이 있겠지만.

더욱이 황비 간택 소식을 접한 알레스에게선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야 할지, 기뻐야 할지 헷갈리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언제나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공작을 보고 있자니 알레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은 황제의 의뢰도 의뢰지만, 사업 욕심 때문에 연회 참석을 마다하지 않은 면이 큰데….

양심이 간질간질해진 알레스는 억지로 가는 것만은 아님을 슬쩍 비치기로 했다.

“임무도 임무지만… 실은 무도회에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그 말에 공작의 눈이 커지더니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응? 갑자기 왜 저러신담?’

공작이 입에 주먹을 갖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그럴 수… 있겠군요.”

“……?”

잠깐만요. 기분 탓인가? 왜 갑자기 나를 하찮고 귀여운 강아지 보듯 하는 거죠?

내 말은 그러니까 기왕에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라면 언제까지고 사교계를 피해 갈 수 없단 거죠.

무도회 같은 데도 침투해서 그들만의 세상을 직접 경험해 봐야 유리하다, 자료만 보고 어림짐작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런 말씀을 드린 건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조금 짜증스럽지만 기왕 연회에 간 김에 황제가 깔아 준 멍석을 사뿐히 지르밟고서 명함도 돌리고, 홍보도 하고, 샘플도 보여 주고, 바람도 잡으면서 일 타 이삼사오 피를 할 욕심이다, 이런 얘긴데….

뭘 상상하시는 거죠!

“아시겠지만 제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교계 출입이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이번 무도회가 제겐 좋은 기회란 거죠.”

“이해합니다, 알레스.”

안타까움이 담뿍 담긴 음성이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매우 불길하게 느껴지는 다정함이었다.

게다가 도톰한 부피감이 있어서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매우 육감적이고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아랫입술은 왜 자꾸 잘근잘근 씹는 건데요?

그날의 그… 접촉 사고가 생각나게.

카이트는 까맣게 잊었는지 모르지만,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지만.

난 며칠 밤을 설쳤다고요.

접촉 사고 후유증이 오래갑디다.

“내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예? 카이트가요?”

당신이 짧긴 뭐가 짧아요?

당신이 짧으면 저밖에 모르는 황제나 촐싹 방정 브린 황자는 어쩌라고요.

당신은 길고 길고 너무 길어서 탈인 사람이라고요!

“알레스가 원한다면 아무도 그걸 막을 권한은 없지요. 무도회, 가고 싶다면 주저 말고 가십시오.”

뉘앙스가 어째 계속 불길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알레스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카이트가 저한테요?”

“네.”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알레스의 첫 춤을 함께할 영광, 부디 나에게 주겠습니까?”

알레스와 브린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춤이요?”

아니, 춤이 왜 거기서 나와?

물론 무도회란 춤을 추는 파티를 지칭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내가 왜 거기서 춤을 춰요?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레스는 무언가를 와르르 깨닫고는 악 소리가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알레스는 현재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잘 잊었다.

새삼 떠올리니 자신은 한창 꿈 많을 풋풋한 열아홉 영애.

그런 영애가 순진한 녹안을 일렁이며 이런 대사를 읊는다면?

「무도회에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공작이 왜 아련한 눈빛으로 자신을 봤는지, 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움찔거렸는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처음 가는 무도회가 걱정된다면 나라도 알레스를 에스코트할게요.”

공작의 눈빛과 대사로 불길한 예감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알레스가 뭐라도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브린이 먼저 가로챘다.

“무도회에 가겠다고? 카이트 자네가?”

“그런데?”

“무도회는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이후 처음 아닌가?”

“아니야.”

맞잖아…. 무도회 같은 건 질색팔색이잖아.

“나만큼 폐하의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 그러니 기꺼이 참석해야지.”

브린 황자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글거리는 대사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르는, 생각보다 강적인 친우의 낯가죽 두께가.

솔직히 지난번 레이디 페레티에 대해 말할 때도 소름 돋아서 못 들어 주겠더니.

도덕책 공작, 건어물 공작의 엄근진은 망각의 베일이 벗겨지며 함께 벗겨져 버린 걸까?

유치함으로 따지면 카이트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점점 젊어지고 어려졌다.

이제 덜 산송장 같아진 건 좋은데, 저러다 아예 갓난아기가 돼서 레이디 페레티 품에 안기려 들지도 모르겠군.

브린은 자신의 상상에 또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은 놀랍게 생각하는 점이 또 있었다.

카이트의 건강한 사고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지난번에 묻지도 않았는데 뻔뻔한 얼굴을 하고 레이디 페레티를 향한 연심을 줄줄줄 고백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두 사람의 성향이나 평소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당연히 저 당돌하고 사나운 레이디 페레티가 순하고 점잖은 카이트를 쥐고 흔들 줄 알았다.

‘상대가 악독한 페레티라니, 우리 카이트 꽤나 구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친우의 명복을 빌었건만….

지금 가만히 보니 어째 카이트가 그녀를 조련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거 실화?

사납게 날뛰는 야생마를 대수롭지 않게 툭툭 쓰다듬는 무심함을 가장한 대범함에다, 주변 사람을 몸 둘 바 모르게 만드는 철면피 애교까지.

카이트, 너 그런 사람이었니?

브린이 혼란과 감탄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알레스는 화제를 돌려서 이 엄한 분위기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안 그래도 황자 전하를 한번 찾아뵈려 했거든요.”

알레스가 갑자기 꺼낸 말에 브린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절 왜요?”

“카이트의 친우시니 상의드릴 것도 있고 부탁드릴 것도 있어서요.”

부탁? 왜? 나한테서 뭘 또 빼먹으려고, 이 사악한 레이디야.

피 말리던 면죄권 소동을 떠올린 브린은 이가 부득 갈렸지만,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느긋한 척 대꾸했다.

“첫 춤 상대가 돼 달라는 것만 아니면 뭐든지요, 레이디.”

그 말에 알레스는 브린의 코앞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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