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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71화 (71/120)

71화

행복해지기로 했어

‘마법이구나!’

스노브 후작은 비로소 깨닫고 신음을 내뱉었다.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처음엔 간담이 서늘했고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그 꼬마 녀석이 캄파넬라의 아들이었지.’

궁지에 몰린 쥐새끼답게 그의 뇌세포가 어느 때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파악이 됐다.

‘이 지경이 되려면 망각의 베일밖에 없지….’

어린아이라고 방심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당장 쫓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앴을 텐데.

충분히 겁을 줬다고 생각한 데다 동방 종족인 잉친족의 사술까지 걸어 두었기에 여유를 부린 게 패착이었다.

공자를 없애는 일보다는 공작 부부가 사라진 틈을 타 영지를 차지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황제도 신탁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니.

신탁에 관한 오역이야 멍청한 신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조용히 없애면 그만이지만, 명분이 사라진 황제가 언제까지 자신을 지원해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약발이 다하지 않았을 때 취할 수 있는 건 모두 취해야 한다.

거기다 연약한 어린애가 도망가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공자 일행이 힘도 영향력도 없는 가문인 페레티 백작가에 숨어들었다는 보고도 들은 터.

당시 스노브는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했다.

겁먹은 꼬맹이가 망각의 베일 같은 최상급 마법을 쓸 수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를 잊다니, 라피스를 잊다니!

그 청자색 형형한 마정석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떠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거늘!

스노브 후작은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껏 마법에 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지냈다니….

그토록 탐내던 라피스도 잊고 자신의 계획도 잊은 채!

그러면서 딴에는 다시 한번 황실을 손에 쥐고 흔들겠다는 야심으로 황비 간택을 모의해 온 꼴이라니.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남들 또한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돌한 메르세데스 애송이 녀석이 영지에 망각의 베일을 두른 덕분에 영지와 라피스가 사람들 관심 밖에 조용히 묻혔으니 말이다.

망각의 베일.

대마법사도 성공할까 말까 한 강력하지만 섬세한 최상위 마법.

그렇다고 메르세데스 가문이나 성, 영지나 영지민이 눈앞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멀쩡하게 메르세데스령에 갈 수도, 성과 영지를 볼 수도 있었다.

공작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대화도 하고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과거 공작은 열다섯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3년간 제도의 아카데미에 다니며 다른 귀족 자제들과 교류했다.

5황자나 카르티에 공작, 로잘린 황녀와도 그때 알게 됐다.

이후 본명으로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고, 아주 드물지만 귀족 회의나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즉 성에 틀어박혀 아예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것도 아니고, 투명인간처럼 정체를 숨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메르세데스에 관한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뻔히 보았어도 돌아서면 잊었고, 다시 대면하면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메르세데스에 대해 알고 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

망각의 베일은 단순히 대상을 숨기거나 없애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지닌 가치를 잊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가치가 없는 것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것.

망각의 베일은 그런 유령을 만드는 마법이었다.

“대체 한 사람도 아니고 영지 전체에 망각의 베일을 씌우다니. 악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그런 무모한 짓을….”

그것도 아홉 살 어린애가.

오후 회의 전까지 귀족들이 쉴 수 있도록 별궁에 마련한 프라이빗 룸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스노브는 중얼거렸다.

지금껏 애송이에게 놀아났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왜 이제 와서 망각의 베일을 벗었느냐 하는 지점이었다.

십수 년 동안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다 왜 지금 자신을 드러낸 걸까.

하필 황비 간택을 앞둔 이 시점에.

옛일을 복수하려는 걸까?

그동안도 복수하려 들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더욱이 보통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복수하는 게 유리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굳이 지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건 어떤 잔악한 복수를 계획하기 때문일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교활하고 더러운 모리배에게 적의 교활하고 더러운 모략을 유추하는 일만큼 괴로운 건 없었다.

더군다나 정작 상대는 그렇게 심오하고 원대한 의도나 각오가 없을 때, 실타래는 더욱 엉키게 마련.

다소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고 유치하기까지 한 이유로 공작이 망각의 베일을 벗고 자신을 드러냈다는 걸 결코 알 길이 없는 스노브는 점점 깊은 미궁에 빠져들었다.

스스로 삽질 고문을 하는 꼴이었다.

“사술, 잉친족의 사술은 실패한 건가?”

스노브는 문득 소리쳤다.

사술이 모두에게 듣지는 않는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어린아이가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해내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공로자가 다름 아닌 후작 자신과 그 사술이라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 카이트, 잊었어? 넌 웃으면 안 돼. 기뻐도 안 되고.

암청색 머리칼에 파란 눈을 지닌 소년이 공작에게 말했다.

아홉 살 무렵 공작 자신의 모습을 꼭 닮은 소년이었다.

- 넌 소중한 걸 가져서도 안 되고, 누군가를 좋아해서도 안 돼.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안 돼, 절대 안 돼.

-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

- 불행해질 거야. 오직 너 때문에!

- 그 사람이 바라고 있어. 내가 행복해지길.

- 넌 미쳤어! 네가 해야 할 건 속죄와 희생이야! 죄책감을 잊지 마! 너를 용서하지 마! 넌 절대 행복해지면 안 돼!

- 난 행복해질 거야. 이제 너와 작별해야겠어.

“알레스 말대로 정말 내가 저주에 걸렸던가 봅니다.”

공작이 간밤의 꿈을 떠올리며 알레스에게 말했다. 벌써 몇 달째 같은 꿈이었다.

“그렇다니까요. 제가 뭐랬어요. 저주에 걸리셨다니까.”

“알레스 덕분에 점점 저주에서 벗어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제 덕분은 아니지만, 그렇죠? 확실히 저주의 기세가 약해진 거 같죠?”

서로가 생각하고 지칭하는 저주란 게 전혀 달랐지만, 대화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공작은 최근 자기 안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진 걸 느꼈다.

아마도 알레스가 보낸 편지의 어느 구절을 읽은 후, 또 신문에서 카르티에의 인터뷰를 보고 난 직후였던 거 같다.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하면 즐겁고 평화롭고 기분 좋은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히려 초조하고 불안하고 불쑥불쑥 화가 나고 질투로 조바심이 나는 일이 많아졌다.

조금도 평화롭지 않았다.

알레스 주변의 껄떡쇠들을 떠올리다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게 치솟았고, 불덩이가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던 어느 날, 변했다.

뭐랄까 다른 인격으로 바뀐 기분이었다.

그건 뭍에 살던 동물이 갑자기 심해로 가라앉거나 심해에 살던 동물이 뭍으로 패대기쳐졌을 때 느낄 법한 낯설고 이상하면서 공포스럽기까지 한 감정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제야말로 제대로 저주에 걸린 기분이었다.

공작은 자기 안에서 툭 끊어진 게 건전한 이성이 아니길 바랐다.

“보세요, 10위권이잖아요. 어쩜 단기간에 이럴 수가 있죠? 강연도 성공적이었고요.”

알레스가 <빌보아 차트>를 흔들면서 말했다.

황궁에서 마주친 다음 날, 귀족 회의를 마친 공작과 브린 황자, 그리고 알레스가 아네모네 저택의 응접실에 모였다.

황자의 사무실 겸 놀이터 겸 숙소인 아네모네 저택은 원래 선황의 아우, 즉 브린의 숙부인 헤스턴 후작이 타운하우스로 쓰던 곳이었다.

평생 독신이던 그가 죽자 생전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브린이 아네모네 저택에 들락거리다 오늘에 이른 거였다.

“레이디 페레티, 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어요.”

브린이 풀죽은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카르티에랑 폐하는 여전히 1위, 2위네.”

축제 후 혜성처럼 나타나 3위를 차지한 로잘린 황녀를 제외하면, 차트가 역동성이 없다. 너무 고인물 웅덩이다.

“공작 전하, 아니 카이트는 오랫동안 아싸의 저주에 걸려 있었던 걸 감안하면 매우 훌륭하신 거죠.”

1, 2위에 있는 저 변태들보다 훨씬!

알레스가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의 고객을 변호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브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주는 무슨. 자발적 아싸인 걸.

아니, 전략적 아싸라고 해야 하나?

“실은 예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어요.”

알레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 저주가 어떤 사람들한테는 안 통한단 말이죠. 로잘린 황녀님도 카이트를 잘 따르고, ‘푸불고’ 연모인 클럽 멤버들 역시 카이트의 수려한 외모나 매력적인 진면목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나도 한눈에 알아봤고.

그런 예외는 어째서 생기는 걸까?

알레스는 전부터 의아하게 생각해 오던 바를 물었다.

공작은 웬일인지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어오른 채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레스가 자신이 수려하고 매력적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면전에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공작은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곁에서 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브린은 우습기도 하고 소름이 오소소 돋기도 했다.

둘 다 남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점에서, 미래에 한 쌍의 바퀴벌레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망각의 베일은 매우 섬세한 마법이었다.

섬세하다는 건 세부 옵션을 설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조건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공작이 만든 망각의 베일은 그에게 강력한 호의를 지닌 사람에겐 통하지 않았다.

또 공작 스스로 누군가에게 직접 자신을 소개하면 베일 효과가 사라졌다.

로잘린이나 ‘푸른 불꽃의 고결’ 멤버는 전자의 경우고, 브린은 후자의 경우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순 없기에 사정을 아는 브린이 대충 얼버무렸다.

“원래 저주란 건 늘 예외가 있다잖아요? 일부러 남겨 두는 숨구멍 같은 거죠.”

아시겠습니까, 카이트의 레이디 예외시여.

“그건 알겠는데, 예외의 기준이 뭘까 궁금한 거죠.”

“아싸의 저주니까 아무래도 모든 걸 뛰어넘는 호의 아닐까요? 그러니까 팬심 같은 거?”

브린은 대체로 진실과 일치하는 말을 했다.

알레스가 듣기에도 매우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역시 저주도 뚫는 팬심이란 건가.

그 맹목적이고 순도 높은 애정은 세상에 넘지 못할 벽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도 궁금한 게 있어요. 대체 카이트가 빌보아 차트 상위권에 올라서 얻을 게 뭐죠?”

브린 황자가 따지듯 물었다.

‘당신의 빌보아 차트 타령 때문에 카이트가 발가벗게 됐다고 지금.’

아직 복수건 응징이건 착수도 못 했고 여전히 몸을 사려야 하는 판국인데.

느닷없이 망각의 베일을 벗어 재끼고 말았다고!

브린이 살짝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알레스는 그걸 모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황자 전하는 10위권 귀족으로서 뭘 얻으셨죠?”

“…….”

“1위인 카르티에 공작, 2위인 황제 폐하는 어떻고요? 인기가 중요해서라기보다 거기서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에 다들 차트에 신경을 쓰는 거잖아요.”

“아뇨, 난 인기도 소중해요.”

브린이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인기가 빠져나가서 피가 빠져나간 거처럼 기운이 없다고.

웬만한 미녀 뺨치는 미모를 자랑하는 그를 바라보며 알레스는 혀를 찼다.

로잘린 황녀도 그렇고, 둘 다 순진한 허영심이 가득한 게 남매는 남매야.

“그래서 카이트한테는 어떤 이득이 있는데요?”

이득은커녕 손해를 보게 생겼구만.

그리고 카이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인기가 더 치솟기 전에 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한참 어린 로잘린도 아는 걸 어찌 모르는지. 가만 보면 레이디 페레티는 헛똑똑이야 헛똑똑이.

일 생각밖에 없는 알레스를 바라보며 브린도 혀를 찼다.

양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저택을 가득 채울 기세였다.

“어떤 이득이 있긴요. 영지를 알리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영주의 매력을 어필하는 거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다고요.”

저쪽 세상에서도 기업 총수나 가족의 이미지가 기업의 이익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연예계나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메르세데스는 영주와 영지민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아닌가.

서로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서로를 띄워야 할 운명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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