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삼자대면은 유치하게
정말로 괜찮은 걸까?
빙벽처럼 투명하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눈을 보며 검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저주가 작동하지 않았을지 모르지.
자세히는 몰라도 황사마독이 듣는 사람과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저주의 씨앗이 발아하는 듯했다.
그가 아는 건 누군가를 향한 질투와 미움, 원망이 저주가 힘을 발휘하게 하는 자양분이라는 사실이었다.
황사, 노란 뱀은 동방에 있는 그의 고국에서는 질투를 뜻했다.
질투라는 노란 뱀이 마음을 온통 헤집고 물어뜯게 만드는 사술이었다.
사실 황사마독은 사술 중에서도 수준이 낮은 잡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우습게 볼 수 없었는데, 그건 주술사의 경지와 무관하게 주술에 걸린 이 스스로 효력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주술이랄까.
검사는 다시 공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긴 저 어린 공자가, 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누굴 미워하고 질투하겠는가.
아직 세상의 어두운 면에 대해 알지도 못할 텐데.
아마도 미워하고 파괴하고 싶은 대상이 없어 그 사술이 효력을 잃었으리라.
검사를 포함한 가신들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저주는 공자 안에서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공자가 누굴 없애야 할 적으로 삼았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
검사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전까지는 공자가 그저 지나치게 어린아이답지 않다고, 애늙은이 같다고만 생각했다.
* * *
브린 황자가 곁에서 보기에도 공작에게 매우 가혹했다.
하필 두 사람을 한곳에서 동시에 맞닥뜨리게 된 이 상황이.
소중한 것을 모두 앗아간 숙적과 난생처음 애틋한 욕심을 품게 만든 여인.
공작의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흔들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
그들을 한자리에서 보고 있는 카이트의 심정은 어떨까.
게다가 황궁 한복판에서.
브린은 괜히 제가 다 현기증이 나고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쿵덕거렸다.
바로 전날까지도 친우는 들뜬 얼굴로 바보 같은 소릴 늘어놓았고, 그걸 듣는 자신은 반은 어이없고 반은 신기한 기분이었는데….
전에 없던 그의 일탈이 걱정돼 현실의 벽을 알려 주며 그의 결심을 만류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에도 카이트는 사랑스러운 예외니 어쩌니 하며 헛소리를 지껄이고 청혼할 꿈에 부풀었는데.
브린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황했다.
자신도 그러한데 당사자인 카이트는 오죽하겠는가.
무척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이겠지?
무엇보다 수년간 복수의 칼을 갈아 오던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했으니.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 건 아닐까.
브린은 걱정스런 맘에 공작의 얼굴을 흘깃 쳐다봤다가 흠칫했다.
‘카이트,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노려보고 있잖아!’
게다가 스노브 후작이 아니라 황제에게 불꽃을 쏘아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불꽃의 방향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한편 메르세데스 공작과 황제 그리고 스노브 후작이라는 마의 트라이앵글에 갇힌 알레스 역시 식은땀이 삐질 났다.
프로로서 정직한 거래를 위해 이곳에 왔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잘못한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켕겼다.
정말로 몰래 못된 짓 하다 큰오빠한테 딱 걸린 철없는 막내 여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북부 전장에 있어야 할 메르세데스 공작이 왜 거기서 나와? 벌써 겨울 평화 시즌인가?
아, 공작도 황비 간택을 청원하는 귀족 회의에 참석하러 온 건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비 간택을 위한 막후교섭이라도 열리고 있는 겁니까?”
브린 황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너스레를 떨곤 알레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레이디 페레티께선 어쩌자고, 아니 어쩐 일로 오늘 같은 날 이곳에 계십니까?”
농담인 듯 웃으며 황자 특유의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거기엔 분명 비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알레스는 심히 억울했지만 뭐라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알레스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황제가 나섰다.
“할 얘기가 있어 짐이 불렀다.”
“폐하도 참, 오늘 같은 날에요? 너무 짓궂으신 거 아닙니까?”
브린이 싱글거리면서도 정곡을 찔렀다.
맞아! 황자 너 간만에 말 한번 잘했다. 저거 제정신이냐고오!
알레스는 속으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황제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무심하게 응수했다.
“페레티에게 꼭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황제를 제외한 모두의 낯빛이 일제히 흙빛이 됐다.
‘황제가 나를 생매장하려는 게 분명하다.’
알레스는 이를 부득 갈았다.
“폐하, 말씀은 다 끝나셨습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제가 레이디를 모셔도 되겠습니까?”
뜻밖에 성큼 나선 이는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공작은 황제에게 예를 갖춘 뒤 알레스를 보며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알레스와 브린이 동시에 귀신이라도 본 듯 흠칫했다.
“나와도 함께 상의할 일이 있잖아요, 알레스.”
“예? 아, 아 네에….”
뭐 따지자면 공작과도 황제와 같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지 않았는가.
정말로 상의할 일이 있기도 하고.
“막 볼일을 끝내고 귀가하던 참이었습니다.”
“잘됐군요. 폐하,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갈까요, 알레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이름을 부르세요?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부담스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공작이 손을 내밀자 알레스는 얼떨결에 황제와 스노브 후작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저, 공작 전하….”
앞만 보며 걷는 공작을 알레스가 불렀다.
그러자 공작은 우뚝 멈춰 서더니 고개를 기울여 알레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알레스, 카이트라고 불러요. 늘 부르듯이.”
예에? 내가 언제 늘 카이트라고 불렀다고요!
알레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공작을 올려다봤다.
게다가 알레스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공작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우렁찼다.
어쩐지 황제와 스노브 후작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한 기분이랄까.
“그럼, 오후 회의 때 뵙겠습니다, 폐하.”
그제야 정신을 챙긴 브린이 두 사람을 쫓아가기 위해 황제에게 작별을 고했다.
“페레티와 가깝게 지내나 보군.”
황제가 공작과 알레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왠지 서늘하게 말했다.
“생각이 있다면 과거 형수였던 여자와 어울리는 일은 자제할 텐데 말이다.”
“…….”
“네 괴짜 친구 좀 말려 보지 그래?”
멈칫했던 브린이 이내 아름다운 얼굴에 사교적인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 과거 아내였던 여자를 부르는 터프한 분도 계신걸요. 정말이지 말리고 싶습니다, 폐하.”
브린이 웃는 낯으로 직언했다.
언제나 약한 척 납작 엎드려 있으면서도 입은 살아 있는 5황자였다.
‘지금은 제국의 황비이자 폐하의 새 아내이자 제 새 형수를 간택하는 일에 집중하시지요.’
입이 근질거렸지만 이 말까지는 꺼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카이트와 레이디 페레티가 멀어졌으면 했고, 카이트의 청혼이 실패하기를 바랐다. 솔직히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아가판투스와 카이트가 맞붙는다면 브린 자신은 당연히 카이트를 지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둘 다 그녀를 포기하면 가장 좋겠지만.
브린은 황제에게 인사하고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얼른 꺼져 주었다.
별별 인간들의 방해로 알레스를 배웅하는 데 실패한 황제가 입꼬리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일이 재밌게 돼 가는군.”
* * *
잠시 말없이 걷던 공작이 시선을 여전히 앞에 둔 채 알레스에게 물었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아까의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살짝 째려본 듯한 기분인데?
분위기가 냉랭한 게 아무래도 그분이 오신 듯했다.
철부지 누이 잡는 카이트 오라버니.
알레스는 그 엄격한 말투에 죄라도 지은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꼴이 매우 어이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함정을 판 나쁜 놈은 황제고 자신은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가의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애초에 황제와 거래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솔직히 황실만큼 짭짤한 거래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알레스는 혼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변명을 해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작에게 일일이 설명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공작의 반복된 세뇌 효과인지 뭔가 해명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알레스의 전두엽을 압박했다.
알레스가 손을 뻗어 공작의 옷소매를 톡톡 잡아당겼다.
“저, 오해십니다.”
공작이 알레스의 손에 쥐어진 자신의 소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우선 저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전혀 몰랐고요. 아니, 황비 간택 청원 자체를 몰랐어요.”
알레스가 두어 번 더 공작의 소매를 조몰락거리면서 말하자, 공작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오해 안 합니다.”
“아, 맞다. 오해 안 하시죠.”
“그런데 폐하와는 무슨 일로…. 상의할 일이란 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끄흠….
‘상의할 일이 대체 뭐냐?’라고 따졌으면 ‘내가 왜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데?’라며 맞받아쳤을지 모른다.
그런데 ‘뭔지 물어봐도 되냐’는 뭔가 응수하기 애매했다.
그렇지만 황비 후보자인 네슬라 영애를 뒷조사하는 일을 맡았다는 말은 혀를 깨물지언정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전남편이 전처에게 재혼할 여자의 평판 조사를 시킨 건데….
알레스 입장에선 황제가 누구랑 재혼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다른 이도 그렇게 생각할까?
솔직히 털어놓자니 왠지 야단맞을 거 같은 느낌?
황제만 이상한 놈이라고 할 게 아니었다.
“음, 공작 전하, 아니 카이트와 같은 계약을 황제 폐하와도 맺었어요.”
“나와 같은 계약?”
“말하자면 매니지먼트 계약이죠.”
“그렇다면 나한테 했던 걸 황제에게도 해 준단 말인가요?”
내가 자기에게 뭘 했단 건지.
강연 지원 말고는 딱히 뭘 해 준 게 없어서….
“사람마다 바람이나 고민이 다르니 세부적인 계약 내용이 같을 순 없겠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죠.”
“같은 서비스….”
“물론 구체적인 의뢰 내용은 밝힐 수 없어요.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카이트에 대해 제가 동네방네 발설하고 다니길 바라지는 않겠죠?”
귀공자 엑스파일 같은 게 유출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아니, 그런 건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더구나 지체 높고 까다로운 귀족들을 상대로 이 일을 하려면 철저한 비밀 유지가 생명이었다.
사업 원칙을 새삼 되새기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알레스는 공작이 자신의 이마께에 시선을 꽂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째 공작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이거… 노려보는 거 맞는데?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걸까?’
속없이 황제랑 계약 맺은 거? 의뢰 내용 안 가르쳐 준 거?
돈에 눈이 멀어 오늘 같은 날 조심성 없이 황궁에 발을 들인 거?
그보다… 공작이 원래 저렇게 감정 표현이 분명한 사람이었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꼭 토라진 햄스터 같은 얼굴인데….
알레스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공작이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당신은 유일한 예외인데, 당신에게 나는 똑같은 고객 중 하나군요.”
“……?”
몇 발짝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관전하던 브린이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까지의 공작은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건조했는데, 이번엔 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하잖아?
‘대체 왜 중간이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람은 공작도, 알레스도, 브린도 아니었다.
어느덧 이야기 밖으로 밀려나 까맣게 잊힌, 스노브 후작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메르세데스 공작? 이게 어떻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