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15년 전의 은원 (3)
검사는 툴툴거리며 시장 길을 걸었다.
자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유롭고 싶어 떠난 방랑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기 싫었고, 무엇에도 굴복하기 싫었다.
‘나와 무슨 상관이람.’
솔직히 한 귀족 가문이 망하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국의 황실이며 귀족 따위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공자를 피신시킨 건 그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받아 준 한 남자에 대한 호의였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종자인지 알 수 없는 이방인을 그는 쫓아내거나 감옥에 가두지 않고 선뜻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고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는 아니었다.
「네 능력이 궁금하다. 쓸 만해 보여.」
메르세데스 공작은 차가운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공작부인은 소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인에게 폭 빠질 수밖에 없는 따스함이 있었다.
귀족 사회인 이곳에서 부인의 그러한 면모는 매우 드물고 특별한 것이었음을 검사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저런 성품을 지녔으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공작을 감당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 공작부인이 그처럼 가공할 만한 마법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반대로 공작이니까 공작부인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건지도….
어찌 됐든 기사단이나 가신들은, 그리고 페레티 백작처럼 메르세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문이 위기에 처한 게 무척 안타깝고 애끓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메르세데스 가문에 딱히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국의 계급 제도 자체에 충성심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귀족이라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냔 말이다.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메르세데스를 지키려는 최후의 결사대라도 된 거 같은 요상한 모양새가 됐다.
“쯧, 괜히 멋진 체하려다 망한 거지.”
쓸데없이 잘난 척 나섰다가 제 무덤을 판 꼴이다.
페레티 백작이 좋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그런 걸 부탁이라고 할 줄이야.
본인도 위기에 처한 거 같은데 자기 앞가림이나 할 것이지.
매우 실속 없는 귀족 나리였다.
검사는 어제 오후 내내 고민하다 결국 공자에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오늘 한 번 더 정보 길드에 들러 소식을 알아본 후 얘기해 보자 싶어 저택을 나섰다.
공격받았던 일을 기사단장에게 전하며 그곳 형편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 줄 것을 요청했는데, 답장이 도착했을까?
고가의 텔레포트 송신권을 휴지조각처럼 불태워 가며 전언을 보냈는데 말이다.
물론 착불로.
떠도는 소문이 아닌 영지의 실상을 알아야 공자의 거취도 결정할 수 있을 터였다.
검사는 시장 한 귀퉁이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식당 한쪽엔 커다란 찜통 두 개가 모락모락 김을 올리고 있고, 다른 쪽엔 사발처럼 생긴 손잡이 없는 작은 컵들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검사는 구석진 자리에 털썩 앉은 후 주문했다.
“전언 17. 차가운 거 하나랑 따뜻한 거 하나.”
“입에 맞으시나 보군.”
구릿빛 피부에 두툼한 어깨와 두꺼운 팔뚝을 지닌 주인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엔 흉터가 가득했다.
“어제 생전 처음 먹어 봤는데, 맛있는 거 맞소?”
“식당 꼴은 칙칙해도 푸딩 맛은 알아주지. 가끔 귀족 영애들도 하인들을 시켜서 몰래 사 가곤 하니까.”
“달고 부드럽군.”
평민식 푸딩을 파는 간판도 없는 이 식당은 비밀 정보 길드의 지부였다.
검사가 컵에 담긴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푸딩을 호록거리고 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주인장이 전언을 가지고 왔다.
“여깄수다. 읽고 난 후 바로 처리하겠소.”
“서신 화력이 좋은가 보군. 저렇게 큰 찜통을 데울 수 있으니.”
“그럼, 얼마짜린데.”
주인장과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검사는 식탁 위로 슬그머니 밀어주는 전언을 읽었다.
“…….”
검사는 전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는 푸딩을 떠먹던 작은 스푼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내가 이방인이라 이곳 정서를 잘 몰라서 말이오. 이런 게 여기선 흔한 일이오?”
검사가 전언을 주인장 쪽으로 디밀었다.
사내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보여? 나더러 쥐약 먹고 뒈지란 소린가?”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지부장이 이 전언 내용을 안 봤다고?”
“알아도 모른 척,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게 우리 덕목이오.”
“됐고. 여기 제국에선 이게 흔한 일인지 어떤 건지만 말해 주시오.”
“흐음….”
잠깐 고심하던 사내가 말했다.
“전혀. 이런 건 살면서 처음 듣수다.”
“역시. 해괴한 일이 맞군. 제정신들이 아니야.”
“거기 살 만한가? 메르세데스령 말이오.”
“그건 왜?”
“거기 주민들도 남부식 푸딩 좋아하려나? 거기서 푸딩 가게나 열어 볼까 해서.”
“제정신 아닌 사람 여기 하나 더 있네.”
검사는 손수 화덕 아래로 서신을 던져 넣었다.
불꽃 속에서 재가 되어 가는 서신엔 믿기 힘든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경 지역은 적군이 위협하고, 성문 앞은 황실과 귀족 연합군이 진을 친 상황.
메르세데스 공작 부부가 사라진 사실이 새어 나가자 영지를 먹어 치우기 위해 몰려온 자들이 분명했다.
가문의 승계자인 공자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대체 누가 성을 지킨단 말인가.
기사단과 가신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고, 며칠째 연합군과 대치 중이라 했다.
영지민들이 나서서 민병대를 조직해 성을 지키고 있다는 거였다.
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성의 주인이 누가 되든 영지민들에겐 아무 의미 없을 텐데.
뭔가에 단단히 홀리지 않고서야.
사실 검사는 이번 전언을 확인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정신 나간 정보 길드원처럼 메르세데스령에 정착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으니.
메르세데스 공작. 오직 사람의 재능과 능력에만 관심 있고 그 외엔 개의치 않던 영주.
쌀쌀맞고 차가운 얼음 공작은 영지민들에게도 차별 없이 고루고루 쌀쌀맞고 차갑게 대해 주었을 텐데.
물론 공작부인이 민심을 어루만져 주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지민이 성을 지키다니….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저택으로 돌아온 검사는 마침내 공자와 마주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이래저래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아는 대로 다 말하자’였다.
결국은 공자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에겐 결정을 내리거나 영향을 미칠 자격이 없었다.
아홉 살 아이조차도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 운명의 무게가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져 줄 수 없는.
검사는 공작 부부가 행방불명된 일부터 가문이 어떤 이유로 모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 공자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영지민들이 성을 지키고 있는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공자는 호수같이 파란 눈을 깜빡이며 얌전하게 귀를 기울였다.
어린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한 모습이었다.
꽉 다문 입가와 꼭 말아 쥔 작은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공자가 울면 어떻게 달래나 고민하던 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도 애처롭긴 마찬가지였지만.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침내 공자가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낫겠습니까?”
“예… 돌아가서 제가 할 일이 있을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여기까지 타고 온 말이 쉬지 않고 남부에서 북부까지 달릴 수 있는 말입니다.”
“경과 빨간 말에게 미안하지만 곧장 출발할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그들은 만류하는 페레티 백작 부부에게 인사를 고하고 급히 저택을 떠났다.
생각해 보면 하루라도 빨리 백작가를 떠나는 게 그들을 위해서도 나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하고도 한나절을 쉬지 않고 꼬박 달려 비밀리에 성으로 돌아왔다.
가신들과 기사단이 공자의 귀환을 환영하는 동시에 주치의들이 달려와 공자를 둘러쌌다.
곱게 자란 공자가 그간 외지에서 험한 생활을 한 데다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으니 탈이 날 만도 했다.
게다가 앞서 받은 전언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독에 당했다지 않은가.
곧장 안정을 취하며 진료받기를 좌우에서 권했다.
하지만 공자는 녹초가 된 몸으로 고집을 피웠다.
늘 고분고분하고 얌전하던 공자로서는 드문 모습이었다.
“시간이 없잖아요. 제가 할 수 있을지 몰라요.”
“카이트 도련님, 무엇을 말입니까?”
“망각의 베일….”
“예에? 도련님이 그걸 어떻게….”
“아마 어머닌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망각의 베일을 시도하셨을 거예요. 그러다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그렇다면 더욱 만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작부인이 실패하신 일을….”
“어머니께 직접 배웠어요. 할 수 있게 해 줘요.”
검사는 그제야 왜 황제가 어린아이까지 반역자로 몰아 공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공작부인과 같은 마법력을 저 어린 공자가 이미 지니고 있다면?
황실에서 크게 위협을 느낄 만도 했다.
반대로 메르세데스에서는 공자의 재능을 필사적으로 숨겼을 테고.
공자의 천진한 고집에 신하들이 난감해했다.
사실상 성은 포위된 상태였다.
영지민까지 합심해서 저항하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모두 머리를 쥐어짜며 돌파구를 찾던 참이었다.
정말로 공자가 망각의 베일을 불러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미카엘과 캄파넬라의 핏줄이라도 이제 겨우 아홉 살인걸….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밑져야 본전이었다. 다른 뾰족한 수도 없고.
소영주께서 저리 원하기도 하고.
“그럼 약속해 주십시오. 힘들거나 아프거나 어려움에 부딪히면 반드시 중단하신다고요.”
결국 나이가 지긋한 원로원 의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말에 공자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곤 마치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똑같이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얼마 후, 거기 있던 대부분이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꼈다.
어떤 이는 수백수천의 나비가 날아가는 환각을 보기도 했다.
공자는 한 달이 지난 후에 깨어났다.
* * *
“도련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라도 좋습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누군가가 밉다거나 뭔가에 화가 난다거나, 아니면 두렵거나 싫다거나 뭐든지요.”
소공작의 스승으로 추대된 검사가 물었다.
“전 괜찮아요, 마스터 현.”
공자는 말간 얼굴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