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15년 전의 은원 (2)
공작 부부의 행방불명.
기사단장의 전언을 받은 검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공작 부부는 국경을 넘어온 타국 군대를 맞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부상도 전사도 성의 함락도 아닌 행방불명이라니….
잠시 휴식을 취한 검사는 메르세데스령의 소식을 듣기 위해 홀로 외출한 참이었다.
메르세데스가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비밀 정보 길드를 통해 영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전언이 와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뜻밖이었다.
검사는 복잡한 얼굴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더듬어 보았다.
메르세데스령과 접한 국경 지역은 공작 부부가 강력한 마법으로 결계를 쳐 놓았기에 그처럼 적군에게 쉽게 털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결계는 영지에서 나온 순도 높은 마정석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부자의 배신과 적과의 내통 가능성은 적군의 침입 직후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공작 부부는 갑자기 사라졌다.
백방으로 수색 중이나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모두 실력자였다.
공작은 이른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술의 천재였고, 공작부인은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닌 위저드 마스터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사기급 부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렇다면 메르세데스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며 영지는 어떻게 되는 건지….
검사는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피신시킨 공자가 바로 그 메르세데스 가문의 유일한 승계자 아닌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타지에 숨어 있을 일이 아니었다.
‘한시바삐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찜찜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고위 귀족인 듯한 생선 대가리가 지껄인 말들이 그랬다.
반역이 어쩌고 했던 말.
그자는 황명을 받아 반역자를 잡으러 온 거라고 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상대로 ‘황사마독’까지 썼다.
그 사술을 쓰며 지껄인 말들도 마음에 걸렸다.
도움을 줄 거라던 가문들도 공자를 외면했고.
아무래도 메르세데스령을 공격한 건 적국의 군대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황제가, 이 제국이 메르세데스의 멸문을 바라는 게 아닌가.
공작 부부는 사라지고, 누군가 가문의 승계자인 공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더러운 모략은 여기나 저기나 그 모양새가 다를 바 없군.’
동방에서 온 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피신했던 여관에서 겪은 일들을 기사단장에게 써 보냈다.
정보 수위에 ‘특1급’이라고 표시했다.
정보를 전달하는 이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페레티 백작저로 돌아온 검사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겨우 아홉 살인 공자에게 어디까지 알려야 할까?
메르세데스 가문과 영지가 아직 존재하긴 하는 걸까?
자신은 대체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 걸까?
그저 위험에 빠진 영지를 잠시 떠나 공자의 신변을 보호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다.
뜻밖의 음모와 함정, 머리싸움이라니.
“주인님께서 면담을 청하셨습니다.”
고민하던 그에게 마침 백작의 호출이 떨어졌다.
시종은 그를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페레티 백작은 언뜻 유약해 보이지만 은근히 고집 있는 인물일 거라고 검사는 생각했다.
백작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메르세데스 공작가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하오.”
황실과 귀족들의 동태를 파악해 본 모양이었다.
“백작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니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사람의 결심과 행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보오.”
“평소 공작 전하의 성품으로 미루어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그렇소.”
“외람된 소견입니다만, 반역이란 꼭 한 사람의 그릇된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오히려 세력 간의 충돌이나 이익 다툼 등 상황이 몰고 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정치적 음모가 있고, 누군가 메르세데스 가문을 모함하고 있다는 뜻이오?”
검사는 대답을 앞두고 잠시 고민했다.
앞서 찾아간 가문들도 메르세데스 공작을 의심하여 공자를 외면한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자신들이 당할지 모를 불이익을 우선 따져 본 것이리라.
백작이 모함의 어마어마한 배후가 누군지 알면 어떻게 나올까.
공자는 이곳에서도 쫓겨나게 될까.
“저 또한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몇 차례 겪었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거 같긴 하오.”
“대체 죄목이 뭡니까? 반역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검사의 물음에 백작은 난처한 얼굴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적과 결탁하여 국경을 열어 주었다는 죄목이오.”
“그럴 수가….”
메르세데스 공작가는 북부 국경 지역을 지켜 온 ‘제국의 방패’였다.
오랫동안 중앙 권력과 멀리 떨어져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 왔음에도 메르세데스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검사가 제 눈으로 목격한 것도 공작 부부가 제국을 침입한 적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이었다.
“지금껏 제국을 지켜 온 분들에게 매우 불명예스럽고 모욕적인 죄목이로군요.”
“믿기 힘든 얘기인 건 분명하오.”
“유서 깊은 명문가가 적국과 결탁하려면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르세데스가가 그럴 만한 이유가 저로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렇소.”
“실은 공자를 공격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고위 귀족인 듯한 자가 직접 이끄는 자객단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그들 말이, 황명을 받아 반역자를 잡으러 왔다더군요. 공자를 해치려는 게 분명했습니다.”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은… 제국엔 오래전부터 떠도는 소문이 하나 있소….”
고심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황가와 관련된 신탁이오.”
“신탁…이라고 하셨습니까?”
“공자를 해치려 했다니 문득 그 소문이 떠오르는군. 꼭 한번 조사해 보시오.”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검사가 확인차 물었다.
“그러니까 백작님 말씀은, 적과 내통해 국경을 열어 주었다는 건 메르세데스 공작가를 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백작의 입매가 굳어졌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뜻입니까?”
“…내 느낌은 그렇소.”
제국은 바야흐로 정치와 지식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신전은 일찌감치 쇠퇴했고 마법적인 전통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원래 제국의 귀족들은 타고난 마력을 혹독한 수련으로 갈고닦아 뛰어난 마법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다.
자신이 가진 마법 실력으로 건국을 도왔고, 그 공로로 작위와 영지를 얻은 게 선대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마법은 기술로 점차 대체되었다.
마법이 선사하던 일들을 자본과 기술과 지식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마탑이 도서관으로 바뀐 건 그와 같은 변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국의 전반적인 마법 능력과 수준은 점차 낮아졌고,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메르세데스는 강한 마법력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제국의 북쪽 끝,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지는 춥고 척박한 환경 탓에 외부와 단절되기 쉬운 조건이었다.
그와 같은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메르세데스령의 북부인들은 투박하고 고집스럽고 금욕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공작 역시 매우 고고하고 까칠한 인물로, 검술과 마법 양쪽을 연마하는 데 스스로 엄격했다.
하지만 사실 메르세데스의 마법력을 한 단계 격상시킨 건 공작부인인 캄파넬라였다.
공작부인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비밀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메르세데스의 두 가지 비밀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메르세데스령에만 매장되어 있다는 순도 높은 마정석 ‘라피스’에 관한 거였다.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의 이 돌은 악마의 계략을 물리치고 천사의 가호를 부른다 하여 ‘푸른 수호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마정석이 영지 어디에 얼마나 묻혀 있을지도 세간의 관심사였다.
공작부인과 순도 높은 마정석.
이 두 가지 마법력의 원천은 메르세데스에 ‘제국의 방패’, ‘수성의 명가’ 외에 ‘마법 명문’이란 별칭을 더해 주었다.
여기까지가 검사가 대략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곱씹고 있자니 어떤 직감 같은 게 발동했다.
행운은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는 법.
메르세데스 최대의 행운이 최악의 불행을 몰고 왔을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스쳤다.
막강한 귀족 가문과 황가를 위협할 신탁이라….
버리고 떠난 모국에서 경험한 일들을 떠올리자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누가 신탁 같은 데 목을 매겠는가.
하지만 신탁이란 어린아이 투정처럼 유치하고 단순하면서도 인간 밑바닥의 불안과 원초적인 감정을 휘젓는 면이 있었다.
그따위 헛소리 대수롭지 않다며 호기롭게 말하지만 결코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
다시 말해 누군가 이용하고자 든다면 얼마든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검사가 깊은 한숨을 참고 있는데 백작이 물었다.
“그곳의 형편은 어떻소? 공작 전하는 어떻게 대응하신다 하오?”
“…공작 내외분이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기사단이 백방으로 찾아 헤매고 있지만 행방이 묘연하시다고….”
“그런 일이….”
백작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검사가 아까부터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실은 백작님께 무척 죄송합니다. 공자를 거두어 주신 일 때문에 곤경에 처하실지 모릅니다. 방패가 돼 주실 공작 전하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내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검사가 솔직히 털어놓으며 백작의 처분을 기다렸다.
백작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부끄럽소만, 이런저런 경우를 따져 보지 않은 게 아니오. 하지만 내 아내 올리비아가 말하더군. ‘저 빗속에 지금 어린아이가 있대요, 에드워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가장 중요한 거였소.”
“…….”
“그나저나 큰일이군. 공자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소?”
백작이 걱정스레 묻는데 검사는 그 말엔 대답할 생각도 않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시오? 메르세데스의 기사여?”
백작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공자를 내칠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러시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시오. 나는 아내의 말을 매우 잘 듣는 남편이라오.”
백작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검사는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백작께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경의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소만?”
“백작께선 제가 제국에서 만난 그 어떤 분보다 고귀한 분입니다.”
“그럴 리가. 듣는 내가 민망해지는군.”
“제가 바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지만요.”
“그마저도 내 것이 아니오.”
“저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입니다. 제국의 룰도, 귀족의 룰도 잘 모릅니다.”
어리둥절한 백작에게 검사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스스로 정한 룰에 따를 뿐이지요. 그 룰에 따라 백작께 존경을 바치고 분부하시는 바를 받들겠습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백작이 인자해 보이는 두 눈 사이에 주름을 만들며 고심하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소, 정 그렇다면. 이방인인 경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면목이 없지만….”
검사는 백작의 분부에 귀를 기울였다.
“공자를 부탁하오. 끝까지 공자의 곁을 지켜 주시오.”
“…….”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백작을 올려다보던 검사는 이내 예를 갖추고 정중히 말했다.
“백작님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선의가 영원히 흐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