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15년 전의 은원 (1)
선황 프란시스 16년.
“카이트,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탁한 목소리가 여관의 낡은 복도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트, 나오렴.”
욕망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음성이 달래듯 말했다.
“카이트, 넌 착한 아이잖아.”
뻐걱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남자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연극적인 한숨이었다.
“부친과 모친이 누구 때문에 희생하셨는지 알고 있지? 영지민들은 또 어떻고.”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9세.
소년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겁에 질린 숨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작은 손으로 제 입을 절박하게 틀어막았다.
“성과 영지가 모두 엉망이 됐더구나. 너만 내놓으면 될 일인걸. 하긴 부모 마음이 어디 그렇겠니.”
조금 전 붉은 말의 기사가 마른 옷과 음식을 구하러 나가며 카이트에게 신신당부했다.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카이트는 커다란 빨래 바구니 안에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무척 가슴이 아프구나. 부모님과 가신들과 영지민들이 오로지 너 하나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단다.”
눈을 감고 입을 막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어때? 너도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지? 모두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잖아?”
눈물이 카이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랐다.
“너만 황궁으로 가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단다. 나랑 같이 가지 않겠니? 그들을 구하고 싶잖아?”
마침내 조그마한 인영이 움직였다.
카이트가 가녀린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머뭇거리며 걸어 나오자 남자가 입꼬리를 찢으며 섬뜩하게 웃었다.
“옳지, 카이트. 넌 착한 아이야.”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카이트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은 순간.
굉음과 함께 깨진 유리와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복도로 쏟아졌다.
위험을 감지한 남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순간, 쏟아지는 파편들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림자는 재빨리 카이트를 낚아채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
“정말 비열한 작자로세.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런 더러운 수작을 부리다니.”
요란한 소리를 듣고 어느덧 복면을 한 무리들이 몰려왔다.
“네놈이야말로 감히 겁도 없이! 그 녀석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제국을 위협하는 반역자야!”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남자가 가식적인 웃음을 버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턱짓을 하자 복면인 몇이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바닥에 쓰러진 것 역시 그들이었다.
카이트를 감싸 안은 그림자는 그저 가볍고 우아하게, 흡사 춤을 추듯 움직였을 뿐이었다.
물론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제국의 검술이 아니야.’
외국 문물에 밝은 그는 상대가 범상치 않다는 걸 금세 눈치챘다.
“메르세데스의 기사인가 본데, 너도 잘 생각해 보라고. 설령 여기서 빠져나간다 해도 반역자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그 도주가 얼마나 갈 거라 생각하나?”
남자는 회유책을 써 보기로 했다.
“반역자를 돕는 것 역시 반역이다. 어리석게 중죄인이 되고 싶은가? 네 재주가 아까워서 해 주는 충고다.”
그림자 검사의 팔 안에 있던 카이트는 두려움에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 작은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림자 검사가 그 손을 힘껏 잡아 주고는 싱긋이 웃었다.
“별 개소리를 다 듣겠네.”
“뭐?”
“이 아이가 어딜 봐서 반역자라는 건가? 생선 대가리같이 생겨서는 하는 말마다 비린내를 풀풀 풍기더니 눈까지 완전 맛이 갔구나. 우리 동네에선 그런 걸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하는데.”
“뭐, 뭐라고?”
생각지 못한 그림자 검사의 찰진 입담에 당황한 생선 대가리가 뭐, 뭐만 연발했다.
“어이, 대체 얼마나 구린 짓을 꾸미기에 이런 어린아이까지 반역자로 몰아?”
웃으며 던진 말에 상대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어라? 정곡을 찔렀나 보네? 자네, 부끄러움을 잃었군. 수치심을 잃은 사람은 괴물이 된다네.”
그러자 정식 기사인 듯 복면을 하지 않은 자가 나섰다.
“너야말로 주제넘게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각하는 황명을 받들어 여기 오신 거다. 메르세데스의 기사 나부랭이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흠, 뭔가 단단히 잘못됐군.”
그림자 검사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뭣이?”
“잘못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못된 건.”
검사가 카이트를 부드럽게, 그러나 멀찍이 뒤로 밀치며 날아올랐다.
“나는 메르세데스의 기사가 아니다!”
그는 가장 먼저 무리의 수장이자 고위 귀족인 듯한 생선 대가리를 노렸다.
하지만 귀하신 몸답게 마력이 주입된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놈의 제국은 여전히 마법이 남아 있어 매우 성가셨다.
그는 할 수 없이 복면인들부터 쓰러뜨리며 도주로를 만들었다.
검이 닿기도 전에 적들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공자!”
검사가 카이트를 낚아채 창밖으로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몸을 피한 줄 알았던 귀족 나리가 악귀 같은 얼굴로 달려들었다.
남자의 표적은 검사가 아니었다.
그는 유리병을 움켜쥔 손을 카이트를 향해 휘갈겼다.
허리가 잘록한 병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검푸른 액체는 카이트에게 날아가 몸에 닿기 직전에 검은 연기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건!’
검사는 재빨리 카이트를 살폈다.
아이는 놀라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귀족답지 않은 천박한 웃음을 킬킬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황제한테도 줬으니 너한테도 줘야지. 그래야 공평한 거 아니겠니?”
검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거… 설마 황사마독인가?”
동방의 사술이 어째서 이런 곳에….
동방의 몇몇 지역에선 주술로 만든 마약을 구할 수 있었다.
“제국의 검술이 아니다 했더니 역시 동방에서 흘러들어온 놈인가 보군.”
남자가 심술궂게 웃더니 카이트에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카이트, 그거 솔직해지는 약이야.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거란다. 너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복수해라. 이런, 복수 대상이 너무 많아지려나? 평생 미워하고 복수하며 살려무나, 크크큭.”
사술의 정체를 확인한 검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카이트를 안은 채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타는 듯 붉은 말 위에 올라 빗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 널 받아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거다!”
저주와도 같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검사는 메르세데스 성을 떠나기 전 기사단장이 건넨 명단을 떠올렸다.
기꺼이 도움을 줄 거라는 가문들의 명단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곧장 그 가문들의 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암흑 속에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지만 비를 피할 시간이 없었다.
그 악독한 생선 대가리가 곧 전열을 정비해 뒤쫓아 올 게 분명했다.
멀리 성의 본관에 불이 켜진 걸 보니 전언을 가지고 간 경비병이 당도한 모양이었다.
검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공자는 장거리 여정에 지쳐 깜빡 잠든 듯했다.
어린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잠시 후 건물의 불이 모두 꺼지고 사방이 어둠과 고요에 휩싸였다.
“하….”
검사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벌써 네 번째 거절이었다.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던 가문들을 찾아가 공자의 신변을 의탁했지만, 성문 앞에서 번번이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널 받아 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을 거다!」
그 악당이 말한 대로였다.
자신들보다 먼저 그자들의 전언이 성마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반역은 중죄 중의 중죄.
반역자를 돕는 것 역시 반역이었다.
잘못하면 가문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심각한 사안 앞에 모두 메르세데스의 후계자에게 등을 돌렸다.
어쩌면 메르세데스는 이미 멸문했는지 모를 일 아닌가.
멸문한, 그것도 반역죄로 멸문한 가문의 아홉 살짜리 공자를 위해 자신의 가문과 가솔, 영지를 몽땅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개국공신 명문가이자 제국에서 가장 힘 있는 가문으로 꼽히던 메르세데스 공작가가 왜 이렇게 몰락하게 되었는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더욱이 당대 공작은 현 황제와 아카데미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우 사이가 아니었던가.
메르세데스가 힘 있는 대귀족 가문임에도 중앙 정계에서 멀찍이 물러나 늘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으나 황궁에서 불어 닥친 광풍은 잔인하고도 단호한 결정을 종용했다.
여러 목숨이 걸린 선택 앞에 의문을 곱씹으며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검사는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야속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저주라도 내린 건지, 이 지역 저 지역을 전전하는 며칠 동안 마른 날 하루 없이 계속해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차가운 빗물이 붉은 말의 몸을 타고 핏빛으로 흘러내렸다.
이러다 어린 공자가 길에서 병이라도 얻는 게 아닌가 염려될 정도였다.
그때 황사마독을 맞은 것도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어떤 증상이 나타날까, 검사는 틈틈이 공자의 상태를 살폈지만 공자는 시종 조용했다.
호수같이 파란 눈을 가만히 깜빡일 뿐.
곱게 자랐을 귀족가의 자제치고는 참을성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검사는 도움을 구할 마지막 가문을 떠올렸다.
‘페레티 백작가….’
그곳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차라리 국경을 넘어야 할지 그는 고민했다.
페레티 백작저는 규모가 소박한 편이었다.
제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가문이었지만, 페레티가 사람들은 대외 활동이 거의 없이 영지 내에만 조용히 머무는 편이었다.
그나마도 재정이 어려워 영지를 조금씩 팔아치웠다던가.
막상 도착해서 보니 공자의 신변을 의탁하기 조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거절하면 곧장 국경을 넘어 동쪽의 사막 지대로 숨어들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저택 1층의 창문들에 하나둘 등불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 환한 불빛의 행렬은 괜한 희망을 품게 했다.
희망을 품은 뒤의 실망은 더 깊고 아득할 것인가.
검사는 저택의 불빛을 무시하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
멀리 램프 하나가 반짝반짝 짧은 신호를 보냈다.
문지기가 정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이 길을 죽 따라서 가십시오.”
너무 쉬운 허락에 잠시 멍해졌던 검사는 곧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가까이에 다다르자 고용인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달려 나왔다.
검사는 함께 고생한 애마를 각별히 잘 먹이고 보살펴 달라고 풋맨에게 부탁하고는 공자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선량한 인상의 백작 부부가 로비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트, 어서 오너라. 경도 고생 많았소.”
백작부인이 가벼운 탄식을 내뱉으며 스스럼없이 다가와 카이트의 손을 꼭 쥐었다.
“이런, 흠뻑 젖었네. 손이 너무 차가워.”
“두 사람 다 먼저 따뜻한 물로 목욕부터 하지. 그다음에 식사를 하고.”
백작이 고용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은 마침내 천국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