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호랑이굴로 들어왔다
무도회라.
주도면밀한 인간 같으니. 계획이 다 있었구만.
“예, 그럼 무도회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알레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그럼 무도회에서 보지.”
“예?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여기 그대 말고 누가 있나.”
알레스는 2차 동공지진이 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제가… 왜요?”
“왜라니.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고 귀족의 동태를 파악하겠다고? 더구나 오하라 가넷 네슬라를 조사하겠다면서? 무도회가 아니면 그대가 어디서 그녀와 접촉하겠나.”
“하지만 폐하와 저는 그런저런 사이가 아닙니까? 그런 제가 다른 데도 아니고 황실 무도회에 떡하니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들 미쳤구나 할 겁니다.”
“그런저런 사이….”
“여하튼 거긴 제가 갈 곳이 아니에요.”
그런 데서 얼쩡거리다 너구리 3인방에게 걸리기라도 해 봐.
황제 당신이 책임질 거야?
그들에게 알랑거리거나 최대한 볼썽사납게 싸워야 하는데, 나도 모기 다리만 한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라구.
아무리 오징어라도 전남편 앞에서 초라해지는 건 좀 그렇다는 얘기지.
“그 무도회는 프림로즈로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저런 사이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황제가 인심 썼다는 얼굴로 거만하게 말했다.
프림… 설탕과 크림을 잔뜩 넣은 ‘맥모골’ 먹고 싶다….
알레스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프림로즈가 뭔지 모르나? 그래도 데뷔탕트 볼은 치렀겠지? 설마… 그것도?”
글쎄요…. 데뷔탕트라는 거 책에서 보긴 했는데 이 아가씨가 그걸 했을라나 어쨌을라나. 마사한테 물어봐야 할 듯싶은데.
여전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 알레스를 보며 황제가 숨을 흡 들이켰다.
엉망진창이라고는 들었지만….
그래서 황태자와 모넬라 선황비의 희생양이 됐겠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긴 한창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에 가문이 기울어 어떠한 후원자도 찾을 수 없었을 테지.
황제가 한편 한심하고 한편 씁쓸한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프림로즈는 서른 살 이하 미혼 남녀만 참석할 수 있는 연회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황가의 혼사를 앞두고 개최하는 연회지.”
오호, 청춘남녀의 화끈한 무도회인가 보군. 물은 좋겠다.
“하여 연륜과 세력이 있는 사교계 실력자들은 참석할 수 없다. 그대가 우려하는 상황을 대비한 것인데….”
오, 그렇다면 일단 너구리 3인방을 만날 일은 없겠네.
“설마 데뷔탕트 볼을 치르지 않았을 줄이야. 하지만 그마저 운 좋게 해결됐군. 데뷔하지 않은 이는 황실 연회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이 관례지만 프림로즈 때만은 허용되니까. 단, 반가면을 착용해야 하는 제약은 있다.”
제약이라니요, 폐하.
그러니까 사교계 센 언니들을 만날 위험도 없고, 얼굴까지 가릴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알레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솔직히 사업을 하면서 직접 사교계를 염탐할 수 없다는 게 무척이나 아쉽던 차였다.
공유 마차가 작은 사교계 역할을 한다 해도 본인이 직접 거기 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황궁 연회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네슬라 영애의 뒷조사도 뒷조사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 연회에서 얻을 수 있는 사업적 이득도 적지 않을 듯했다.
그 블루오션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해서 속이 쓰리던 참이었는데.
게다가 사교계 진출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지 않은가.
“어떤가. 그대에겐 그런대로 괜찮은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요, 폐하. 오징어도 가끔 재주를 부릴 때가 있군요.
“그대가 괴이하고 돌출된 행동으로 주변의 이목을 끌지만 않는다면 그대의 정체를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브라보! 폐하의 이상형 찾기와 성공적인 흑자 결혼을 위하여!
황제 때문에 방금까지 몇 번이나 곤란을 겪은 것도 잊고 알레스는 금세 불타올랐다.
하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접견실을 나오자 곧바로 잊고 있던 문제가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무도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골치 아픈 일들은 대충 해결됐다지만, 그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도 이 황궁을 무사히 벗어난 뒤에야 가능한 일 아닌가.
이곳은 황비 간택을 부르짖는 귀족 승냥이 떼가 눈이 벌게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정글.
알레스가 결코 알짱거려서는 안 될 곳이며, 황제 접견은 더더욱 안 될 말이다.
아직은 얼굴을 가릴 가면도 없잖아!
‘광속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거야.’
괜히 쭈뼛거리면 더 눈에 띄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고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거야.
레이디 페레티가 버젓이 황궁에 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렇게 알레스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은 후 정원으로 나섰다.
마차가 어디 있더라.
두리번거리는데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찔렀다.
“잠시 함께 걷지.”
황제가 뒤따라 정원으로 내려왔다.
“왜 이러십니까!”
다급해진 알레스가 신분이고 예법이고 잊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배웅이라는 걸 해 볼까 했다.”
알레스의 사나운 기세에 황제가 한 발 물러나며 어이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배웅? 당신이 정녕 나를 죽일 셈이오!
알레스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귀족 영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게다가 황제와 함께라니.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그들이 쏘아대는 분노의 눈총에 그 자리에서 산화해 버릴지 모른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 얼른 뛰어가려고요.”
“뛰다니? 황궁에서 레이디가 뛴다는 얘긴 난생 처음 듣는군.”
남이야 뛰어가든 굴러가든 상관 말고 가, 가, 가란 말이야!
“늘 유별나게 구는군.”
내가 유별난 게 아니고 당신이 사이코라고!
“짐과 함께 걷는 걸 어려워하는 거 같군. 그럼 마차를 이리로 부르지.”
“예예, 감사합니다. 귀하신 몸께선 이만 들어가 보십시오.”
알레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아, 그리고.”
알레스의 노력이 무색하게 황제가 성큼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말라니까.
“짐이 보낸 드레스를 돌려보냈더군. 다시 마차에 실어 놓으라고 일러두었다.”
허허, 누가 보면 제 사생팬인 줄 알겠습니다.
왜 이렇게 질척거리니?
알레스가 질린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돌려보내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벽장에 처박아두든 팔아 치우든 그대 마음대로 하라. 짐이라면 연회 때 입는 쪽을 택하겠지만.”
내가 황궁에서 이고지고 나온 물건들을 높은 가격에 팔아 치운 걸 어떻게 알았지?
알레스는 괜히 찔려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구두는 함께 보냈던 거 같고, 드레스에 어울리는 연회용 보석을 좀 보낼까?”
“아닙니다. 전용 액세서리가 있어요.”
이럴 때 아니면 밤비 경의 말편자 액세서리를 언제 걸어 보겠어? 말편자 컬렉션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란 말이지.
황실 연회는 건국제와 더불어 상인들의 대목이었다.
특히 럭셔리 업계는 대목 장사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피할 수 없는 연회라면 본전이라도 최대한 뽑아야 해.’
다급한 와중에도 알레스가 바삐 계산기를 두드릴 때였다.
“폐하, 여기서 또 뵙습니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누군가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알레스는 흠칫 굳어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실례지만 이쪽은 레이디 페레티가 맞습니까? 신이 노안으로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점잖은 말투였지만 분명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레이디 페레티가 어찌 아직도 황궁에 있습니까? 그것도 폐하와 독대를.”
하필이면 저 영감과 딱 마주치다니.
알레스가 일진 한번 사납다고 생각하는데 황제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서 물었다.
“스노브 후작. 짐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무심한 말투였으나 눈빛은 서늘했다.
“아, 신이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폐하께 누가 될까 염려되어 드린 말씀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스노브 후작은 알레스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것과는 달리, 재빨리 저자세를 취했다.
황비 간택을 앞두고 황제의 경계심을 자극하면 곤란했다.
아가판투스는 선황과도 다르고 죽은 황태자와도 달리 독사 같은 인물이었다.
스노브 자신과 대적할 만한 악한이어서 이런저런 수법이 영 먹히지 않았다.
도무지 황족 같지 않은 빌어먹을 놈.
황제는 자신을 단칼에 배척하지도, 그렇다고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간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스노브의 눈이 알레스를 향했다.
‘어째서 저 냉혈한이 페레티 같이 영양가도 없는 여자와 여태 붙어 있는 거지?’
즉위하자마자 찬밥 취급할 땐 언제고.
그것도 황비 간택을 추진하는 이 중차대한 시국에!
‘하여튼 페레티는 힘없는 쭉정이 가문 주제에 번번이 이 몸의 발목을 잡는단 말이야.’
황제에겐 냉큼 굽히고 들어가던 스노브 후작이 알레스를 음산하게 노려보았다.
한 발 물러났던 그는 다시 날을 세웠다.
“하지만 걱정하는 이가 신만은 아닐 겁니다. 괜한 오해로 폐하의 위엄을 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해?”
“소문이 많은 자를 가까이하면 그 소문에 연루될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스노브의 대놓고 험담에 알레스는 미간을 좁혔다.
뭐야,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야? 소문이 많은 자라니.
저야말로 뇌물 먹고 농민들 뒤통수나 치고 서민들 눈물이나 뽑아먹는 구린 매국노 주제에!
“군주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만방자한 자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오만방자?
황제 앞이라 말을 가려서 저 정도지, 아니었으면 아주 잡아먹으려 들었겠군?
알레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노브 후작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나마 황제가 보낸 드레스를 입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멋모르고 그 드레스를 입었으면 인생 망칠 뻔했잖아!
알레스는 청보랏빛 드레스의 요염한 자태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괜한 소문은 레이디 페레티의 신변에도 결코 좋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의 적의는 때로 제어가 안 되곤 하지요.”
은근한 협박까지? 어쩌려고?
사실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스노브 후작도 기분 나쁘지만….
‘애초에 이 환장의 구렁텅이에 나를 밀어 넣은 원흉은 저 인간이다!’
알레스는 황제에게 원망의 눈총을 쏘아댔다.
얼른 무슨 말이든 해서 수습 좀 해 보라고!
마침내 황제가 귀찮다는 듯 한마디 했다.
“페레티와 짐 사이에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
“…….”
의뢰한 걸 아직 수행하지 못했으니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듣는 사람 오해하기 딱 좋게 그런 모호한 말 하지 말라고!
순간 스노브 후작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황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아, 하하, 마무리 짓지 못한 이혼 수속이 남아 있어서요. 몇 가지 더 수금할 것도 있고 해서. 황궁에서 서둘러 나가느라 빠뜨린 게 몇 가지 있거든요. 그때 빨리 나가라고 스노브 후작도 굉장히 눈치를 주지 않았습니까, 하하.”
보다 못한 알레스가 나서서 횡설수설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른 꺼지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도주로를 파악하고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알레스는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폐하… 레이디 페레티? 스노브 후작? 세 분이 어떻게… 다 함께 계시는군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알레스가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바라본 곳엔 역시나 브린 황자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옆에는.
흑발에 가까운 짙은 암청색 머리칼에 심해처럼 깊고 푸른 눈을 지닌 장신의 남자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