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65화 (65/120)

65화

황명이 왜 이래?

이거, 사람을 갈구는 신종 수법인가?

‘어릴 때부터 집요한 성격에 뒤끝 작렬이었지.’

‘냉혹하고 가차 없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못 말리는 사이코라니까.’

황제에 관한 주변의 증언들이 알레스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날뛰었다.

알레스는 쉽사리 동공이 흔들리지 않도록 눈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매니지먼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별별 사람, 별별 경우를 다 겪어야 하리라.

그때마다 이상하다고 거르고 까다롭다고 거르면 어떻게 이 바닥에서 자리를 잡겠는가.

그들이 지닌 ‘이상함’과 ‘모자람’이 어쩌면 이 일의 존재 이유일지 모르는데.

알레스가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황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기왕이면 짐이 좋아하는 분위기 속에서 말하고 싶었는데 아쉽군. 청보라가 싫은가? 아니면 디자인? 옷감?”

아무렇지 않은 표정엔 희롱하는 기색조차 없어 더욱 기가 찼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다.’

알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저 인간은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자, 말 그대로 제국의 태양이다.

그런 대단한 인간을 상대로 이만하면 반 정도는 내 뜻을 관철하지 않았는가.

결국 그 드레스를 안 입었으니까.

그러니 멋대로 지껄이는 거쯤은 받아들이자.

어차피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들으러 왔잖아?

알레스는 가까스로 정신승리를 거둔 뒤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몰골이 맘에 들지 않으시면 휘장을 치거나 제가 가면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웃음기 없는 말에 아가판투스 황제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알레스를 응시했다.

황제가 자신을 노려보는(알레스 시점) 시간이 길어지자 알레스는 약간 초조해졌다.

설마 이대로 끌려 나가 지하 감옥 같은 데 갇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황제는 한참 만에 무심하게 말했다.

“그 방법은 딱히 필요치 않을 듯하군.”

아, 그러시군요! 신중도 하셔라.

그걸 판단하는 데 그렇게나 오래 고민하셨군요!

알레스가 속으로 부글부글하는데 황제는 도리어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대는 매우 영민한 듯하면서도 눈치가 없구나.”

뭐야? 도발하는 거야?

“그대야말로 이상한 말을 자주 한다는 걸 아는가. 지금 보니 말 이전에 생각이 이상하다.”

댁보다 이상할까!

“처음엔 감당하기 힘든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 광기, 아니 독특함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꾸준히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싸우자는 거네.

내 성질을 슬슬 긁어서 내가 폭발이라도 하면 오만방자하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처넣으려고 부른 게 분명해.

호랑이 굴로 들어왔네. 하지만 정신만 바짝 차리면….

“결국 세상의 평가나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그대에게 이렇게 재미난 면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달리 대했을 텐데.”

황제의 입에서 영 생뚱맞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또 뭐… 듣다 못한 알레스가 황제를 일깨웠다.

“폐하의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실 겁니까? 저같이 하찮은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황제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예예, 그러시지요.”

“실은 짐이 매우 피곤한 상태다.”

“예예.”

“오전에 대규모 귀족 회의가 있었거든.”

“예예.”

원래 귀족 회의란 황제를 압박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고, 보통 황제파와 귀족파가 충돌하니까.

직장 스트레스 좀 받았나 보군.

“오늘 회의 안건이 그 어느 때보다 지루하면서 추잡하고 피곤한 것이었거든.”

“예예.”

지루하고 추잡하고 피곤한 안건이라.

“귀족들이 떼로 몰려와서 한껏 진지하고 긴장된 얼굴로 목청을 돋우더군. 그들이 짐에게 청한 게 무언지 아나?”

내가 어찌 알겠소. 그 귀족 나으리들 사정을.

“황비 간택을 청원하더군.”

“예예… 예?”

“내 결혼이 귀족들 장난감인가. 첫 번째도 제멋대로들 정하더니 이번에도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더군.”

“그러니까… 오늘 오전에, 바로 여기 황궁에, 귀족이란 귀족이 다 모여서 황비 간택을 청원했다는 말씀입니까?”

“만찬 전에 회의가 한 차례 더 열린다는군. 오전에 내가 만족스런 답을 주지 않았거든.”

이런 씨암탉 후라이드 같은 경우를 봤나!

그러니까 자신들이 미는 후보자를 황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눈이 시뻘게진 승냥이 떼가 어슬렁거리는 살벌한 곳에 발을 들인 거란 말이지?

황제의 전처인 내가!

무려 황비 간택을 청원하는 귀족 회의가 어제오늘 정해진 건 아닐 텐데.

일부러 오늘 같은 날 황궁으로 불러들였단 말이지.

이혼한 전처인 나를!

대체 무슨 저의로 이러는 거야!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다. 황비 간택에 대한.”

“왜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곧장 입으로 튀어나왔다.

이혼한 전처한테 묻기에 민망한 질문이란 생각은 안 드시나?

“왜냐…. 계약금을 치르기도 했고. 그대는 이상하고 재미있고 영민하면서 눈치가 없으니까.”

이거 랩 배틀입니까? 폐하, 선빵 날리신 겁니까?

알레스는 뜨거운 콧김을 삭이며 생각했다.

이런 때일수록 품위를 지켜야 한다.

프로페셔널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이 금수저 낙하산아.

알레스는 포커페이스를 장착하고 목소리도 착 깔았다.

“귀족들이 황비 간택을 청원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그러한가. 황비를 맞아들이는 게 옳다?”

“폐하는 제국의 태양이시니 폐하의 신변이 안정되고 황실이 번창하는 것이 곧 제국의 번영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크아, 나 오늘 말발 좀 받는데?

“폐하의 연세도 적지 않으시고요. 귀족들이나 대신들이 후계자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위해 주는 척하면서 나이 많다고 살짝 까기, 크큭.

“그대의 생각이 그러하군.”

“황족과 귀족의 혼사는 단순한 결혼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가문과 가문의 화합과 번영을 위한 거라고요.”

“가문과 가문의 거래겠지.”

“…무엇이 되었든, 평범한 남녀의 결혼과는 다르니 피할 수 없다면 실속을 챙기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속이라….”

“폐하의 말씀대로 거래라면 최대한 이익이 되고 흡족한 거래가 되어야겠지요.”

황제의 자수정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전에 짐이 말하지 않았나?”

“무엇을요?”

“짐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윽, 아직도 그 소리야?

“궁금하고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도 말했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흥미나 호기심이 아니라고.

그 사람의 아픔까지 끌어안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충고는 한 번으로 족하다.

“고명한 귀족들과 충직한 대신들이 추대하는 영애라면 분명 폐하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분일 겁니다. 좋아하실 거예요.”

알게 뭐람.

황제가 누구랑 결혼하든, 황비 후보자가 어떤 여자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네요.

알레스의 영혼 없는 대사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와 말이 다르군. 좋아한다는 건 흥미나 호기심이 아니라 하지 않았나?”

“…….”

의외로 남의 말을 귀담아들으시는군요.

앞으로 성군이 되시겠습니다.

“실속이라 했는가? 그렇다. 짐은 황비 간택을 빙자한 권력 다툼 속에서 실속을 챙기기 위해 그대를 부른 것이다.”

이제 와서? 이건 또 무슨 지뢰야?

“귀족 회의에서 강력하게 미는 황비 후보자가 누군지 아는가?”

“후보가 한 사람입니까?”

“서로 물고 뜯기 바쁘던 귀족들이 이번엔 어찌 된 일인지 대화합을 이룬 모양이더군.”

“그만큼 자질이 훌륭한 영애인가 보지요.”

“자질? 가문에서 귀족들에게 꿀물을 잔뜩 먹여놨나 보지.”

꿀물 마시고 싶다. 당 떨어져….

“귀족 회의에서 추천하는 황비 후보자는 네슬라 공작가의 오하라 가넷 네슬라.”

네슬라 공작가라면 그 황비 자리를 노린다는….

사교계 너구리 3인방 중 일인인 네슬라 공작부인은 알레스를 손봐준다며 노리고 있고.

공작부인의 친정이 바로 스노브 가문이니, 이번 황비 간택 건은 스노브와 네슬라의 합작품인 셈이다.

로잘린 황녀의 사교계 속성 과외가 알레스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동안 모넬라 대부인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스노브 가문은 황태자가 죽자 발 빠르게 라인을 갈아탄 거였다.

그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저급하게 나오는데도 모두가 묵인할 정도로 스노브 후작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뒤로 얼마나 어떻게 구린 짓을 하는지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 영감 아주 천년만년 영화를 누리겠어.’

안됐지만 황가와 귀족들이 허구한 날 하는 짓이 그렇지 뭐.

강 건너 불구경꾼 알레스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였다.

“짐도 실속을 챙겨야겠기에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한다. 짐의 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오하라 가넷 네슬라에 대해 알아 오라.”

“!”

갑자기 튄 강 건너 불똥에 알레스는 애써 유지해 온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오, 신이시여. 저 오징어젓갈 담그고 지옥 가겠습니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대는 이상한 점도 많지만 누구보다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할 거 같은 믿음이 든다. 그리고 짐이 어떤 여인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대가 말한 매니지먼트가 이런 게 아니었나? 귀족 능구렁이들을 상대로 실속을 챙길 수 있도록 나를 보필하라.”

오하라에 대해 조사하며 그대가 갈등을 느끼길 바란다.

그녀를 질투하기를 바란다.

아가판투스의 자수정 눈동자에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눈 밑이 급격히 어두워진 알레스는 느닷없이 서류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서 다급히 꺼낸 건 둔기, 가 아니고 시식용 천타빵과 말편자 빵.

미팅 분위기가 좋으면 말편자 빵을 황제에게 슬쩍 영업해 볼 심산이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비상용 탄수화물이기도 했고.

황제의 변덕으로 미팅이 틀어지거나 진이 빠졌을 경우, 이제 신체 일부를 빌려줄 사람도 없는 황궁에서 정신을 잃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기에.

그렇더라도 황제 앞에서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좀 먹겠습니다.”

황제의 황당한 시선은 물론, 그림자처럼 있던 보좌관, 시종, 호위, 하녀의 따가운 시선이 알레스에게 쏟아졌다.

그 모든 시선에 아랑곳없이 알레스는 텅 빈 눈으로 빵을 베어 물고는 우물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탄수화물이 충전되니 마음이 점차 차분히 가라앉고 머리도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이번 국혼과 알레스 본인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그러니 굳이 어떠한 평가나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성실히 조사한 후 팩트만 전달하면 되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별일 아니잖아!

…라고 간단히 말하기엔 여전히 별일이군.

하지만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훌륭한 경력 하나는 생기는 셈이다.

본인의 전문성과 공정성, 신뢰도를 귀족 사회에 증명하는.

까짓것, 해 볼까? 안 할 수도 없는 형편이긴 하지만.

레이디 페레티는 심신 미약 이혼녀가 아니라 냉철한 사업가임을 보여 주리라.

“네슬라 영애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이윽고 알레스가 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오후 회의 때는 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귀족 회의의 뜻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짐에게도 황비 후보자에 대해 알아볼 시간을 달라 하겠다.”

“조사도 좋지만 폐하께서도 네슬라 영애를 직접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폐하처럼 이상형이 확고하신 분이라면 말이죠.”

알레스가 살짝 빈정거리자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를 열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