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수상한 입궁 미팅
“으, 머리야.”
알레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속도 좋지 않았다.
‘날이 훤하네. 대체 몇 시나 됐을까?’
축제가 끝나고도 상단은 얼마간 바빴다.
축제 때 뿌려 놓은 사업의 씨앗들을 잘 갈무리해서 야무지게 거둬들이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축제 후에도 열심히 달린 상단 직원들과 어제 모처럼 회식 자리를 가졌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알코올에 지독히 약한 만큼 조심한다고 했으나, 상단주로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두 잔은 어쩔 수 없었다.
퀭한 얼굴로 정신을 챙기고 있는데, 어제 분명 말술을 들이켰던 마사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침실로 돌진해 왔다.
“아가씨! 황궁에서 사람이 왔어요!”
“어어?”
“무슨 계약 때문에 왔다고 하는데요? 계약 이행을 위해 내일 입궁하시랍니다.”
계약 이행을 위한 입궁?
가만있자… 그렇지, 황궁에 사는 모 씨와 계약이란 걸 했지.
알레스는 멍한 얼굴로 그날 일을 떠올렸다.
황제가 늘어놓는 이상한 말을 들어주는 대가로 고액의 계약금과 상담료를 받아 챙겼다.
공유 마차 개업을 앞둔 시점이라 돈이 매우 궁하던 시기였다.
신문 광고 제작비를 대느라 계약결혼 할 때 혼수로 받은 귀금속 5세트 중에서 사파이어랑 루비 세트를 내다 팔았다니까!
그땐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든 결코 차별하지 않았다.
똥 묻은 돈이든 겨 묻은 돈이든 성스럽게만 보였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 했던가.
이제 와 살짝 성가시게 느껴지는 계약이었다.
황궁을 들락거리며 황제와 노닥거리는 분위기를 풍기면 사교계 너구리 3인방이 긴장 좀 타겠지?
흉흉하게 생긴 스노브 후작 영감이 쫓아와 길길이 뛰려나?
근본 없는 망아지 주제에 어디서 남의 장사 망치려 드느냐고?
아 놔, 대공비고 후궁이고 줘도 안 갖는다니까 그러네.
알레스는 이런저런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황궁의 어느 후미진 곳에서 느닷없이 머리채를 잡힐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내 손가락도 간만에 남의 머리카락 맛을 원 없이 볼 테지만.
알레스는 한참이나 작고 부실한 손가락을 아드득 바드득 꼼지락거려 보았다.
기왕이면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보다는 면상에 돈 봉투나 땅문서, 광산 소유권 같은 걸 갈겨 주면 좋겠는데….
저쪽 세상에서 드라마를 보며 한 번쯤 꿈꿔 본 황홀한 장면.
‘얼마면 되겠어? 얼마면 황제 옆에서 영영 꺼져 주겠니?’
얼마를 부르면 좋을지 행복한 상상을 하던 알레스는 마사에게 말했다.
“황명을 받들겠다고 전해 줘. 내일 입궁한다고.”
“말씀대로 전하긴 하겠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돈을 땡겨 썼으니 값을 해야지.”
마사가 한숨을 쉬며 방을 나갔다.
곧이어 알레스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해장엔 탄수화물이지.
욕심껏 빵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데, 어느덧 다가온 마사가 따끈한 우유와 차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계약인지 여쭤봐도 돼요?”
알레스는 입 안 가득한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인데…. 황제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주기만 하면 돼.”
알레스의 설명에 마사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느낌이 썩 좋지 않은데요? 얼마나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른답니까? 게다가 두 분 관계를 생각하면….”
마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황제씩이나 되면 숨기고 살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야. 마음 편히 넋두리라도 하고 싶을 테지.”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아가씨한테 하느냐고요.
마사는 황제의 속내가 의심스러웠다.
“그게 아니면 하는 말마다 못 견디게 재미없고 썰렁한가? 측근들도 황제님 농담에 한두 번은 맞춰 줬지만 결국 안면근육 마비 등으로 나가떨어진 거지.”
“그걸 들어주시게요?”
“남의 돈 먹기가 어디 쉬워? 무슨 얘길 하든 입 꾹 다물고 듣기만 할 거야.”
“어휴, 오죽하면 돈을 내고 말씀하실까.”
게다가 아가씨는 남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푸근한 성격도 아니잖아요?
마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느낌을 거둘 수 없었다.
“어쩌면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이 없어서인지도 모르지. 알다시피 내가 사교계 왕따라 어디 가서 떠벌리고 싶어도 떠벌릴 데가 없잖아?”
“저는 오히려 그 점이 참 이상하다고 봐요. 굳이 따지자면 두 분은 앙숙 관계가 아닌가요? 적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비밀 얘기 따위가 아니라 화풀이용인가? 욕받이 같은?”
“엑, 하필 아가씨한테요? 저라면 그런 모험은 안 하겠습니다.”
“그럼 뭘까…?”
“단지 말씀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고 뭔가 답을 요구하시는 거면요?”
“차라리 그건 더 쉽지. 말대답이 내 주특기잖아. 적당히 둘러대는 순발력도 쓸 만하고.”
탄수화물과 당분이 충전되자 한껏 긍정적이 된 알레스였다.
하지만 마사는 여전히 찜찜했다.
“참 이상하지 않아요, 아가씨?”
“또 뭐가?”
“황제 폐하 말입니다. 그렇게 매정하던 분이 어째 이혼을 결정한 후부터 아가씨께 점점 더 잘해 주시는 느낌이 들지요?”
“이혼해 줘서 어지간히도 고마운가 부지.”
“냉혹하고 가차 없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아가씨한텐 왠지 약하신 거 같아서….”
“약하긴. 어찌나 변덕이 죽 끓듯 하는지. 비위 맞추기 힘들다니까. 돈이 웬수야.”
“흐음….”
마사가 느끼기에 황제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호감인데.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저, 아가씬 어떠세요? 황제 폐하에 대한 감정 말이에요.”
황제에 대한 감정?
알레스는 늘 물주로만 보던 한 인간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쪽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간 탓에 생존이 우선이었다. 다른 건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치사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주를 퍼부을 만큼 미운 건 아니야.”
증오한다는 건 누군가를 자기 안에 깊숙이 간직한다는 건데, 그건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악녀로 이름을 날릴 때조차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심지어 미워한 적도 별로 없었다.
대립하고 충돌하고 때로는 함정을 파고 물 먹이고 진흙탕 싸움도 불사했지만, 대부분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대응이었다.
그런 일에 감정까지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증오도 크지 않았다.
그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린 악녀의 심장을 흔들고 어지럽히는 건 오직 한 가지.
그래서 그들이 참, 곤란했다.
“하긴 아가씨야 누굴 정말로 미워하실 분이 아니죠. 무심하다면 모를까.”
마사의 말이 저쪽 세상의 기억을 떠돌던 알레스의 영혼을 이쪽 세상으로 휙 잡아당겼다.
‘재밌네.’
조금 둔하지만 착했다는 페레티가 영애와 악녀라 불리던 전투적인 회사원 양자강.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있다니.
결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
“여하튼 두 분은 아무렇지 않게 왕래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시죠. 이번에 입궁하시면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별별 소릴 다 지어낼 거라고요.”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오면 되지. 게다가 그 황제가 보통 황제야? 설마 아무 대책이 없겠어?”
“그렇긴 하지만….”
안 만나는 게 최선인데 뭐 하러 갖은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굳이 만나시나요?
혹시 이렇게라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라든가….
마사는 뒷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일이 잘못되면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황제가 아니라 아가씨가 될 터였다.
이러려면 이혼은 왜 하신 건지.
아가씨의 신변에 관해 걱정이 끊이지 않는 마사였다.
하지만 특급 유모 마사도 미처 걱정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황제의 전처인 레이디 페레티가 전남편인 황제와 만나기에 지금보다 더 최악인 타이밍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 * *
입궁하기로 약속된 시각보다 두 시간 일찍 마차 한 대가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엔 황실 문장이 금빛으로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저런 된장….’
창밖을 내다본 알레스는 구수한 표현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사의 얼굴이 이렇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저런 것도 못 참으시면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다시 생각해 보니 마차를 보내 준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떤 마차가 황궁에 들어가든 이목이 집중되긴 마찬가지일 터.
처음엔 동네방네 소문내려고 저러나 싶어 욱했지만, 오히려 황실 마차가 황궁을 드나드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차를 보내 줘서 고맙네.’
그러나 알레스는 불과 몇 분 만에 이 생각을 무르고 싶어졌다.
‘이런 미친….’
황제는 마차뿐만 아니라 입궁할 때 입을 옷과 구두도 함께 보냈다.
황제가 보낸 옷상자를 마사가 들고 왔을 때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마차에 옷 고민까지 덜었다며 내심 기뻐한 게 사실이었다.
마사 역시 괜히 들떠서 상자를 열고 얼른 옷을 꺼내 들었는데.
순간 알레스와 마사 둘 다 당황했다.
“아가씨가 지금 연회에 참석하시는 거였나요?”
“가슴과 등 부분은 왜 만들다 말았어?”
여체의 아름다움이 한껏 드러나도록 디자인한 매우 화려하면서도 요염한 분위기의 청보랏빛 드레스.
이걸 대체 누구더러 입으라는 건지?
아니, 그보다 이런 옷을 입을 일이냐고 지금!
로브를 걸치고 모자까지 푹 덮어써도 모자랄 판에!
‘혹시 나를 미친 여자 이미지로 굳히는 게 황제의 빅 픽처?’
공유 마차 사업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이제 이미지 관리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매니지먼트 사업에도 슬슬 발동을 걸어야 하고.
맨몸, 맨손일 때처럼 천둥벌거숭이로 지낼 순 없는데.
“황제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알레스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글쎄요… 웬수 같은 남편의 흔한 패턴이긴 합니다만….”
“마사는 결혼을 한 적이 있나?”
“어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나중에 취했을 때 깊숙이 파고들어야지.
“이 드레스 호의일까 악의일까?”
알레스는 다시 황제가 보낸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입고 가실 거예요?”
“마사, 내가 미친 여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진짜 미친 건 아니라고.”
“혹시 중간에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옷이 바뀌어서 왔다든가. 보좌관이 황명을 오해했다든가.”
마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추리했다.
“음, 차라리 그런 쪽이길 빌어야지.”
알레스는 황제가 보낸 드레스를 뒤로 한 채 입궁 준비를 서둘렀다.
“내가 보낸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접견실에 들어선 황제는 알레스를 보자마자 이것부터 물었다.
“아무래도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청보라색 드레스가 아니었나? 짐이 직접 고른 건데.”
잘못 보낸 게 아니었다?
“절 우스갯거리로 만들 폐하의 야심작이었나요?”
알레스의 말에 황제의 한쪽 눈썹 비죽 올라갔다.
“괴상한 표현을 쓰는군.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유머인가?”
“사교계의 유행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그 옷이 제게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압니다.”
황제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전용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알레스도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대에게 무조건 어울릴 테니까.”
“저, 계약 내용을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옷 얘기가 왜 나와야 하는 건지….”
“짐은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대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게 우리가 맺은 계약이지.”
“계약서 어디에도 복장에 대한 조항은 없는 걸로 압니다만.”
“그렇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내가 원하는 복식을 그대에게 청하는 게 계약 위반은 아니지.”
황제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