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레이디 예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브린 황자가 같은 말만 세 번째 반복했다.
“할 말이 그거밖에 없나?”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지?”
“사람 놀라게 해 놓고 시치미 떼는 버릇은 여전해. 몸소 제도까지 와서 귀족 회의에 참석할 위인이 아니잖아.”
축제가 끝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밤, 메르세데스 공작은 다시 친우의 사무실 겸 시내 숙소인 아네모네 저택에 앉아 있었다.
“내일 열리는 귀족 회의엔 나도 참석할 자격이 있는 거로 아는데?”
“자격이야 누구보다 충분하지. 하지만 그런 회의 싫어했잖아. 관심도 없고.”
“이번엔 매우 관심이 가.”
“하!”
브린이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다시 시작인가.”
“망각의 베일을 벗어젖힌 김에 시원하게 노출을 즐기겠단 건가?”
“달라진 나에게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되었을 텐데.”
“나 참, 지난번 즉위 때야 어쩔 수 없었다 쳐. 황제가 바뀌었는데 첫 회의 정도는 참석해 줘야 했겠지.”
브린이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
“흥, 그때도 딱히 황제 때문에 온 건 아닌 듯하지만.”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지만 결국은 권력과 이익 다툼의 장에 불과한 중앙 귀족 회의.
메르세데스 공작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동안 불참해 왔다.
“이번 회의가 무엇을 위한 회의인지 알고는 있나? 황비 간택을 청원하는 회의야.”
“물론 잘 알고 있어.”
“알면서 제도까지 와? 설마 쇼 하는 거 구경할 만큼 한가해진 건가?”
“알다시피 제도는 늦은 가을이라도 북부는 막 겨울에 접어들어서 국경의 분쟁 지역도 휴전기에 들어갈 거야.”
전쟁도 쉬게 하는 백 일의 추위가 메르세데스령을 하얗게 얼어붙게 할 것이다.
“이번 회의는 특히 짜증 날 거 같아서 비위 좋은 나조차도 빠질까 했는데. 하여간 생각지도 못했다니까. 카이트 자네가 올 줄은.”
신기해하는 친우에게 공작이 말했다.
“이번 회의는 흥미가 좀 있거든.”
“뭐? 흥미라고 했나? 정말 어떻게 된 일이야? 자네 설마….”
“설마?”
브린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공작을 살피더니 말했다.
“자네도 슬슬 혼인할 때가 된 건가?”
“어째서…?”
의외로 예리한 친우의 촉에 공작은 내심 놀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대놓고 티를 내긴 했지만.
“어째서는 뭐가 어째서야. 뻔한 거 아닌가. 남의 혼담에 괜히 흥미가 생기고 기웃거리게 되고. 이게 다 혼기가 찼다는 신호 아니면 뭐겠어.”
“…….”
그동안 알레스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건만….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황제의 결혼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 상대가 누군지는 알지?”
“누군데?”
“나 참. 흥미가 생겨서 그 먼 북부에서 제도까지 달려왔다며? 그런데 황비 후보자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설마….”
“설마?”
“관심의 초점이 황제한테 있는 거야?”
공작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진지하게 응하는 순박한 총각을 보고 있자니 브린은 괜히 놀려 주고 싶어졌다.
“호오, 황제한테 관심이라. <소문과 진실>에 난 가십 기사가 사실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그게 뭐지?”
“일전에 대관람차 안에서… 그 있잖아!”
수신사 복장의 남자랑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풍긴 거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지. 축제 때는 평민 청년이랑 이상야릇하게 비탈을 굴러… 그 알잖아!”
수신사? 평민 청년?
“아… 맞아.”
가십 기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공작은 알레스와의 일을 브린이 어떻게 다 알고 있을까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시인하는 모습에 브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이트, 농담이지?”
“그런 걸로 왜 농담을 하지?”
친우의 물음에 브린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웃자고 실없는 소리 좀 했다가 날벼락 같은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걸까.
오랜 친우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생각해 보면 공작도 황제도 유독 여자에 관심이 없잖아?
그럼 레이디 페레티를 예외니 다람쥐니 하면서 좋아한다고 떠들던 건 다 뭐야?
역시 변덕 같은 거였나?
그렇다면 이 상황을 오히려 기뻐해야 하나? 그러기엔 좀 애매한데.
혹시 카이트 너, 남녀를 가리지 않는 거냐? 역시 사람이 너무 참고 살아도 이상해진다더니.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브린이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카이트의 취향이 그렇다면 그동안 날 가만뒀을 리가 없잖아?
막말로 외모면 외모, 성격이면 성격, 내가 황제보다 훨씬 더 나은….
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브린은 최근에 시장조사를 한답시고 치정 소설을 읽어도 너무 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빌보아 차트>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은근 마상이 심했거나.
어찌된 일인지, 카이트를 곯려 주려다 늘 자신이 호되게 당하는 기분인 브린이었다.
“사과하지. 이제 보니 경박한 농담은 내가 했어.”
나 브린 페이지 맥켈란, 황실 도서관장이며 황실 출판국 편집장이고 제국 출판 길드 정회원인 지성인으로서 경박하고 채신없는 모습은 삼가리라.
브린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결국 사과까지 하는 걸 잠자코 지켜보던 공작은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린, 나한테 이상한 병이 추가됐네.”
설마, 정말로 취향에 이상이 생긴 거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에 질투가 나.”
“자네가 질투를?”
“미안한 고백이지만, 만약 자네가 알레스와 가까워진다면 난 자네마저 질투해 어쩔 줄 모를 거야.”
결국 또 레이디 페레티? 좋다(?) 말았잖아!
공작의 말에 브린이 펄쩍 뛰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럴 일은 절대 절대 절대 없을 거야.”
브린은 면죄권 때문에 진땀을 뺐던 일로 아직도 알레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카이트와 그 마녀를 갈라놓고 싶어 죽겠고.
“알고 있어. 내 마음이 그 정도로 형편없이 좁아져 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과거 아카데미 시절부터 매력적인 영애들의 수많은 제안을 다 마다하더니.
그땐 가문과 영지민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저 취향이 괴상한 거였다니.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죽마고우의 취향이었다.
“그건 그렇고, 국혼을 청원하는 귀족 회의랑 레이디 페레티가 무슨 상관이지?”
차라리 그냥 레이디 페레티랑 붙어 있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하지 그래?
황제의 결혼은 단순한 남녀의 로맨스가 아니다.
이번 시즌 국혼에 사활을 건 가문이 얼마나 많은가.
그건 매우 복잡한 권력 싸움이고 치열한 장사였다.
그런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메르세데스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황제가 얼른 황비를 맞이해서 황실을 공고히 하길 바라네.”
“그걸… 왜 자네가 바라나?”
브린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왜긴. 알레스 때문이지.”
“레이디 페레티가 왜?”
“아무리 결혼 이틀 만에 이혼한 서류상 부부였다 해도 황제가 독신으로 있으면 알레스가 새로 시작하는 데 부담이 되지.”
“저기… 그게 무슨 뜻이지?”
이젠 묻기도 겁나지만.
“게다가 밤비 경한테 전해 듣자니 황제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 하더군.”
“그건 또 무슨 소리….”
왜 모든 게 레이디 페레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브린은 그게 불만이었다.
“자꾸만 알레스 주변을 맴돈다 하더군.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황제는 웬 미친 변덕이야? 그리고 자넨 뭐 황제를 새장가 보내고 나서 레이디 페레티한테 청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맞아.”
“뭐어?”
브린은 더 이상 직언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레이디 페레티에 대한 사교계 평판은 아직 호의적이지 않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고.”
공작이 반듯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브린, 날 알잖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나한테 아무 의미 없어. 내가 직접 겪고 느낀 걸로 판단해.”
“알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러섬이 없는 답답한 친구여.
그걸 아니까 내가 지금 이 난리 아닌가.
공작이 북부의 하늘만큼이나 푸르고 말간 눈으로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제 내가 느낀 것들, 내가 판단한 것들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 오직 그녀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 그것만이 요즘 내 고민이야.”
브린은 멍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챙기고 다급히 설득에 나섰다.
“은인의 영애를 챙기고 싶은 마음과 좋아하는 감정은 구분해야지.”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오히려 난 은인의 영애라서, 가족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 딴마음을 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니까.”
“뭐? 그, 그래, 연애만 잠깐 하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다고 해. 그것도 살면서 한두 번쯤 해 봐야 하는 경험이니까.”
“연애만 잠깐, 이라니….”
“그런데 혼인까지는 좀 그렇지 않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둘은 어울리지 않아.”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그녀를 직접 겪었으니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줄 알았는데.”
겪어 봐서 더 이해 못 하겠네.
“카이트, 내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럴 거란 얘기지. 걱정된다는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어. 난 내 친우의 축복만 있으면 돼.”
아아, 너무 어려운 요구일세, 친구여! 솔직히 자신 없다구.
“그리고 사실 우린 접촉도… 있었어.”
“뭐?”
브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접촉이라니…?”
“그러니 하루빨리 청혼하고 싶어.”
“접촉이 무슨 접촉인데? 어떤….”
“그런 일이 좀 생기고 말았네.”
“대체 언제?”
“지난 축제 때….”
“이런, 보면 늘 축제 같은 게 문제라니까.”
“얼른 청혼해야겠지?”
“잠깐만. 무슨 접촉인지는 모르겠지만 접촉 한 번 했다고 결혼까지 해야 하나?”
“그럼 아니라고?”
“물론이지. 사람이 연애도 좀 하고, 자유로운 만남도 좀 추구하고, 그렇게 즐긴 다음 결혼해도 되잖아.”
브린의 설득에 공작은 조용히 친우를 바라보다 물었다.
“브린, 자네 요즘 연애 트렌드가 뭔지 아나?”
“으응?”
“사탕 키스가 아니고….”
“……?”
“선 결혼, 후 연애라네.”
공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벌어진 브린의 입에선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빳빳한 건어물 공작이 언제 저렇게 느물느물 타락한 생물 낙지가 된 거람?
카이트의 청혼 상대가 레이디 페레티라는 사실이 너무나 우려되지만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하, 늘 바라고 고대하던 일이었는데… 건어물 공작이 엉망으로 망가지는 거 말야. 그런데 막상 그런 날이 오니 걱정도 되는군.”
브린이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브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예외를 만드는 일인 거 같아. 그런데 예외라는 이름이 그녀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지.”
“아하, 레이디 예외.”
“사랑스러운 예외지.”
정신 나간 친우의 말에 브린이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물었다.
“작업하느라 바쁘셔서 어디 복수할 시간은 나겠나?”
“이제 망각의 베일도 벗었고, 첫 강연도 무사히 치렀으니 슬슬 움직여야겠지.”
“알아보니 후작 영감은 그동안 해외 순방 중이었더군.”
“복수… 라기보다는 잘못된 것들을 이제 바로잡아야지.”
“그래, 방법은 정했나?”
잠시 침묵하던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아홉 살의 카이트와 헤어질 거고….”
심해 같은 눈에 파도가 일었다.
“행복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