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축제는 접촉 사고를
비탈을 데굴데굴 구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알레스는 그렇게 몇 가지 후회를 했다.
상하좌우가 마구 뒤바뀌고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알레스는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고통이 사라지고 안락한 승차감마저 느껴지는 듯한?
이 쿠션감 뭐야? 이 탄력 뭐냐고?
벌써 영혼이 가출했나?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해 보니 웬 남자가 자신을 감싸 안은 채 함께 뒹굴고 있었다.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눈이 팽팽 돌아가는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닥에 철퍼덕 패대기쳐졌다.
다행히 수로 안으로 곤두박질치진 않은 걸 확인하고 알레스는 잠시 정신을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알레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래에 뭔가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구르는 통에 자신이 공작을 깔고 누운 모양이었다.
음… 그런데 이상도 하지. 입술에 말랑말랑하고 축축하고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건 왤까?
알레스는 눈을 번쩍 떴다.
공작의 눈이 너무 가까이에, 입도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뒤엉켜 구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이목구비가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으학!’
알레스가 비명을 삼키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면서 얼결에 공작의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단단한 가슴 아래서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그 심장의 고동이 순식간에 손바닥과 팔을 타고 알레스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알레스는 화들짝 놀라 공작의 몸에서 떨어졌다.
공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심장이 그렇게 쿵쾅쿵쾅 뛰는 걸로 봐선 죽은 건 아닌 듯하고.
기절했나? 뺨을 두드려볼까?
알레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공작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가지런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속눈썹도 함께 올라가며 깊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알레스,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카이트는요?”
괜찮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킨 공작은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습니까?”
“낙서범이랑 딱 마주치는 바람에….”
“그까짓 낙서 좀 하면 어떻다고.”
“안 되죠. 남의 얼굴에 그런 짓을 하면. 매우 비겁한 짓이죠.”
“그렇다고 그런 잡범을 잡으려고 자신을 위험에 밀어 넣습니까?”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안전하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죠.”
“알레스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압니까?”
“저도 놀라긴 했어요.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크게 다칠 뻔했잖습니까. 또 이렇게 대책 없이 굴 겁니까?”
“음… 자신 있게 안 그러겠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는….”
“당신 정말….”
사실 알레스는 공작이 하는 그 어떤 잔소리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알레스의 신경은 온통 그 일에 쏠려 있었다.
‘카이트는 나와 입술이 닿았던 걸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공작의 시선이 자꾸만 자신의 입술에 머무는 것 같기도 하고.
카이트는 모르는 걸까?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불쑥 기억이 떠올라 분해하는 건 아닐까?
그건 키스는커녕 입맞춤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접촉 사고 같은 거였지만.
뭐라고 뭐라고 말하며 움직이던 공작의 입술이 멎었다.
이제는 정적 속에 공작의 시선만이 오롯이 느껴졌다.
‘내 안에 음란마귀가 있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 위에 머무는 듯한 건 여전하고, 이제는 심지어 뜨거운 열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일전에 카르티에 공작이 카이트의 마법이 불 계열이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불 계열 마법사와 키스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혹시 불처럼 뜨거울까?
아까 입술끼리 접촉 사고를 일으켰을 때 공작의 입술이 뜨거웠던 거 같기도 하고….
이런 쓸데없는 잡생각도 오락가락했다.
그때였다. 한참을 말없이 알레스의 입술만 쳐다보던(알레스 시점) 공작이 재킷을 뒤적거린 건.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온 그의 손 위에 투명한 포장지에 싸인 새빨간 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알레스는 마침 잘됐다 싶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깰 적절한 소품, 사탕.
“어머, 제가 당 떨어진 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휴, 고마워라.”
알레스는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공작의 손에서 사탕을 낚아채 번개처럼 포장을 벗겨내고 입에다 털어 넣었다.
역시 머리 복잡할 땐 단 거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알레스는 사탕을 살살 녹여 먹지 못하고, 와드득 까드득 이로 깨 먹었다.
알레스는 당분을 섭취했는데도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체 왜 이렇게 심란하고 간질간질한 거야?
하긴 비탈을 구르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 살아났는데 이상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지.
한편 공작은 황망하고 허탈한 얼굴로 사탕이 알레스의 입속에서 와드득 까드득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해와 달의 입맞춤으로 하늘이 오렌지빛과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의 뺨과 입술도 석양빛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 * *
올해 ‘해달입’ 추수감사 축제의 최대 화제는 뭐니 뭐니 해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메르세데스 공작의 강연… 이 아니고 바로 ‘치맥콘’ 열풍.
제국 최초의 맥주, 치킨, 팝콘은 식품업계와 요식업계에 핵폭탄급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알싸하고 구수한 황금빛 발포주와 고소함과 바삭함이 환상적인 맛의 조화를 이루는 닭튀김, 짭짤 고소하고 폭신폭신한 옥수수 알 튀김에 제국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가히 맛의 혁명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 귀족들만 즐기는 요리가 아니라 평민들도 누릴 수 있는 음식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고된 일과 후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려 줄 소울 푸드의 탄생이었다.
앞으로 제국 내에 맥줏집, 치킨집 등이 엄청나게 생겨날 예정이니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 셈이었다.
팝콘은 제국 내 극장들에 입점할 계획이었다.
이 스낵은 ‘팝콘각’이라는 새로운 문화 용어도 만들어 냈다.
‘치맥콘’ 세트는 페레티 공유 마차에서도 즐길 수 있었다.
공유 마차에서 먹는 ‘치맥콘’에는 특별히 ‘원조’라는 수식어가 달렸다.
이 ‘치맥콘’ 열풍에 크게 기여한 이들이 또 있었다.
바로 욕쟁이 할머니들.
손님들은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을 배불리 얻어먹고 등짝도 맞으면서 향수에 젖었다.
투박하지만 따스했던 할머니의 정을 떠올리면서.
이 욕쟁이 할머니에게 빠진 건 평민들만이 아니었다.
평민 복장을 하고 몰래 놀러 나왔던 귀족들은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불쾌하고 황당했지만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 자제들이란 어려서부터 소중히 받들어지기만 한 사람들이 아닌가.
싫은 소리, 지적, 충고 등을 들을 일이 거의 없었던 귀한 분들.
그들은 욕쟁이 할머니에게 난생처음 팩트폭행을 당하고 전율했다.
그들로선 새롭고 신비한 체험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내게 이렇게 대한 사람은 할머니가 처음이야!’
두 번째 화제는 단연 이 인물이었다.
축제 때 제도의 스타로 떠오르며 관심과 지지를 한몸에 받은 인물.
축제는 <빌보아 차트> 순위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다.
1위 카르티에, 2위 황제의 자리는 변함없이 굳건했지만.
메르세데스 공작은 첫 강연회 이후 7위에 올라 드디어 10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돌풍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처음으로 차트에 이름을 올린 데다 한 방에 3위로 등극한 인물.
로잘린 샹들리 맥켈란.
불과 열다섯 살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빌보아 차트>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물들이 10위권에 진입하면서 브린 황자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런 바깥의 소란과 상관없이 알레스는 마음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아니 접촉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겉모습은 열아홉이지만, 속에 든 건 산전수전 다 겪은 서른 살짜리 악녀인데 말이다.
어째서 한 뼘도 안 되는 피부의 단 몇 분간 접촉으로 이렇게 싱숭생숭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걸 첫 키스라고 할 수나 있을까?
첫 키스라기엔 너무 허무하지?
무효야, 무효.
공작은! 공작은 몇 번째 키스일까?
아니, 공작에겐 키스가 아니겠지? 갑자기 머리 위를 덮친 철근이나 벽돌 같은 거겠지?
아마 기억도 하지 못할 테고.
그러나 알레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접촉 사고의 상대 운전자는 더 큰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겉으로 표가 나지 않을 뿐 엄청난 내상을 입었으며, 날만 흐려도 그리움에 온몸 삭신이 쑤시는 지긋지긋한 고질병을 얻었다.
그러고도 그는 조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알레스를 향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이 접촉 사고에 매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고도 혼란을 틈타 까맣게 잊힌 사람도 있었다.
남의 얼굴이 찍힌 벽보에 낙서를 해대다 덜미가 잡힌 변태 뺑소니 운전자.
그 역시 뒤틀린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알레스에게 호시탐탐 손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메르세데스 공작의 은밀한 애정편력을 세상에 폭로해 황색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 준 바 있는 가십지 <소문과 진실>.
이들이 또 한 번의 특종으로 독자들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소문과 진실, 아가판투스 1년 ○월 ○일자
메르세데스 공작의 취향은 도대체!
불과 몇 달 전 인파가 몰린 대관람차에서 수신사 복장의 남자와 과감한 애정 행각을 벌인 바 있는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공작.
북부의 공작은 겉모습만 비정한 것일까.
차가운 얼굴 아래 가려진 그의 욕망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연인은 놀랍게도 가녀린 체구의 평민 청년.
공작은 이번에도 보는 눈이 많은 제도 한복판에서 거침없는 스킨십을 과시했다.
수로 산책로 인근 비탈에서 연인과 함께 뒹굴며 애정을 과시한 것.
명문가 귀족으로서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적 편견에 아랑곳없이 대담한 행보를 보여 온 메르세데스 공작.
그는 과연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세기의 로맨티스트일까.
아니면 뻔뻔한 욕망의 화신일까.
*여러분의 제보를 받습니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또 다른 애정편력을 알고 계신 분은 편집국으로 연락 주십시오.]
<소문과 진실> 애독자 중 한 사람인 카르티에 공작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안에서 기사를 읽었다.
그의 등을 수놓은 멋들어진 청룡도가 몸을 실룩거리며 요동쳤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나의 친구, 푸른 불꽃, 메르세데스 공작은 역시 대단한 사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