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공작의 첫 강연과 낙서 테러
“곧 시작될 공작 전하의 강연, 열두 가지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법은 유익하고 특별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많이들 들으시고 훌륭한 인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언스의 마무리 멘트로 퀴즈 대회가 막을 내렸다.
처음엔 매우 거만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나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려는 사람이었다.
지켜보던 알레스는 아이언스에게 미소와 엄지척을 보냈다.
이제 공작의 첫 강연이 시작될 차례였다.
강연 천막인 큐브 안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다만 청중의 백 퍼센트가 시커먼 사내들이라는 것.
얼굴에 칼자국 하나쯤은 기본으로 장착한 험상궂게 생긴 이들이 객석을 장악하고 있었다.
뭔가 우우우, 고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홀아비 냄새도 살짝 나는 듯했다.
알레스는 질색을 하면서 강연장을 둘러보았다.
성장을 한 화사한 레이디들이 줄줄이 서 있던 카르티에의 화기애애한 천막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곳에선 옥구슬 굴러가듯 까르르 웃는 소리와 감성적인 첼로 선율이 귀를 간지럽혔지.
알레스가 두 강연장의 분위기를 비교하며 한숨 쉬고 있을 때, 공작이 연단에 올라 강연을 시작했다.
“…공격용 횃불은 갈고리 말뚝을 4폰드마다 하나씩 설치해 걸어둡니다. 다섯 걸음마다 아궁이 하나를 두는데, 아궁이 입구에는 숯불이 담긴 화로를 둡니다. 적군이 성안으로 공격해 오면 연기 내는 횃불로 문을 불태우고 공격용 횃불을 던집니다.”
“…….”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불을 붙이고 일제히 횃불을 던집니다. 적군이 철수하면 아군의 결사대와 좌우 병력은 성에서 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합니다. 이때 용사와 장군은 모두 성의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고 다시 성의 북소리를 듣고 되돌아옵니다.”
“…….”
걱정했던 대로, 이렇다 저렇다 흥미를 유발하는 서두도 없는 데다 말투도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저런 시커먼 청중을 대상으로 무슨 말랑한 소릴 하겠느냐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해선 강연이 지루하고 밋밋하니 역시 시청각 자료를 준비했어야 한다고 알레스가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한동안 줄줄 읊던 공작이 한 챕터가 끝나자 잠시 말을 끊었다.
눈으로 청중을 쓱 한번 훑어본 그는 손에 불을 지폈다.
‘응?’
그런 후 방금 강연했던 내용을 환각 마법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천막 안이 살짝 어두워졌다.
공작이 천막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4폰드마다 횃불을 걸었다.
허공에 점점이 걸린 불꽃이 일렁이며 타올랐다.
다시 천막을 따라 걸으며 다섯 걸음마다 아궁이를 만들어 내고 그 입구에 화로를 만들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집어넣었다.
우우우어 우우우어.
시커먼 청중들이 달아올랐다.
다음은 환청 마법.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 적군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둥둥둥 심장을 두드리는 아군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아군 병사들이 북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횃불을 붙이고 일제히 청중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날아오는 횃불을 피하려는 청중들로 잠시 소동이 벌어졌다.
“어우야, 진짜 불이 날아오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지켜보던 알레스도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뭐 저쪽 세상 홀로그램이나 가상현실 뺨치게 박진감이 넘쳤다.
이런 공작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요령을 까불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필요 없어서 알레스의 제안을 사양했던 것이다.
강연과 마법을 몇 차례 번갈아 선보인 끝에 공작의 강연이 막을 내렸다.
말 그대로 불꽃 같은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시커멓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공작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섰다.
그들은 존경과 흠모와 수줍음 등을 얼굴에 담뿍 담은 채 공작의 사진이 박힌 엽서를 내밀었다.
거기에 공작의 사인과 덕담을 받아서는 저마다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갔다.
“정말 굉장한 강연이었습니다.”
“마법을 사용하실 줄은 몰랐어요.”
“환각과 환청 같은 잔재주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여러분이 정성껏 준비하고 도와준 덕분입니다.”
“오라버니 제 엽서에도 사인해 주시면 영광이겠어요.”
서로가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 * *
이튿날 두 번째 강연이 이어졌다.
이날도 강연 전에 퀴즈 이벤트를 열었다.
입소문이 퍼졌는지 강연에도 퀴즈 이벤트에도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렸다.
이번엔 영애들도 더러 몇 사람 보였다.
공작의 책도 꽤 많이 팔려 브린의 어깨가 한껏 치솟았다.
헤라클레스가 만든 조공 도시락도 큰 주목을 받았다.
맛은 말할 것도 없고 모양마저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엽고 사랑스러워 다른 연모인 클럽 영애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몸에 샀다.
정작 도시락을 만든 헤라클레스 본인은 무척이나 부끄러워했지만.
전날과 다른 점이라면 헤라클레스가 조공 도시락 외에 새로운 핑거푸드를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알레스가 강연 천막들을 돌아다니면서 살펴보니 사람들이 꽤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면 좋지 않을까 싶었던 알레스는 밤새 헤라클레스를 닦달해 이 음식을 만들었다.
카나페와 비슷하게 생긴 이 핑거푸드에 ‘오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애를 향한 영애들의 마음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맛 덕분인지 이름 덕분인지 오빵은 빠르게 팔려나갔다.
둘째 날 강연은 공작이 환각과 환청 마법으로 터뜨린 물이 적군과 청중을 집어삼키면서 끝이 났다.
공작의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선 것까지 본 알레스가 그동안 붙였던 홍보물들을 수거하러 나섰을 때였다.
“알레스.”
공작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왔다.
“어디 가요?”
“벽보 좀 떼고 올게요.”
“같이 가요.”
하지만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해서인지 공작에게 질문하려는 사람들이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전하를 기다리고 있어요. 저 혼자 얼른 다녀올게요.”
공작은 아쉬운 얼굴로 알레스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쉬워하고 있을 시간도 얼마 없었다.
곧장 열의에 찬 질문들이 쏟아졌으니까.
“흙과 나무와 돌을 높이 쌓은 적군이 활 등으로 우리 성을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작은 알레스를 쫓아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앉히곤 눈치도 더럽게 없는 사내의 질문에 친절히 답하려고 애썼다.
“임시로 토성을 쌓아 성을 공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군요? 그러한 공성(攻城)을 시도하는 자는 지휘관으로서 졸렬한 자입니다. 병사들을 아주 힘들게 하지만 정작 성에 타격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대응하는 기계가 있는데….”
“하얗게 불태웠다 정말.”
알레스는 그동안 붙였던 벽보들을 떼며 소리쳤다.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타고난 재주를 발휘해 열정을 불태운 날들이었다.
아직 마지막 광란의 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제도를 뒤흔든 치맥콘은 오늘 밤에 더욱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들의 구수한 입담과 등짝 스매싱에도 불이 붙을 것이고.
자루엔 돈이 수북수북 쌓일 것이고.
이런 흐뭇한 생각을 하며 벽을 따라가던 알레스는 악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내 진짜 이것들을!”
벽보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누군가 넘치는 창작욕을 불사른 현장.
털보가 된 공작, 애꾸가 된 공작, 칼자국이 생긴 공작, 속눈썹이 길어지고 입술이 도톰해진 공작, 코털이 삐져나온 공작, 돼지코가 된 공작, 눈물 콧물 침물 흘리고 있는 공작….
그러고 보니 낙서한 범인을 잡겠다고 로잘린 황녀와 약속을 했는데.
어떤 녀석인지, 그 악마 같은 녀석을 꼭 잡고 싶다. 미친 듯이 잡고 싶다.
잠복이라도 해서 잡았어야 했나?
잡히기만 해봐라. 그놈 얼굴도 저렇게 만들어 놓을까 보다.
한참을 툴툴거린 알레스는 문득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범인을 잡으면 정말로 어쩔 건데?’
일단 왜 그랬느냐 묻고 싶었다.
공작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랬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생긴 면상인지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나보다 힘이 세면 어쩌려고?’
무기 같은 거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그 변태 낙서쟁이 녀석, 아주 아작을 내 줘야 하는데.
입으로만 신나게 낙서범을 제압하던 알레스는 눈을 끔벅거렸다.
몇 발짝 바로 앞에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아닌가.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쓴 그는 벽보에 붙어 신나게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었다.
범행 현장 목격!
눈앞에서 범행을 보고 있자니 알레스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놀라운 건, 복면 등으로 가리고 있긴 했지만 낙서범의 행색이 너무나 멀쩡해 보인다는 거였다.
어린애도 아니었다.
멀쩡한 성인이 저런 유치한 짓을 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귀족 가문 변태 도련님인가?
중2병이 느지막이 찾아온 고연봉 전문직 종사자인가?
‘어느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제압하지?’
답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았다.
얍 소리를 내면서 덮칠까, 소리 없이 조용히 발을 걸까?
소리를 내야 그걸 신호로 몸이 움직일 것 같아 알레스는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우렁차게 ‘얍!’도 아니고 ‘야흐어아우익’ 비슷한, 기합 소리도 아니고 신음 소리도 아닌,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냈다.
마음은 비호와 같은데 몸은 엉성하기 짝이 없게 움직였다.
낙서범은 우다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멈칫 얼어붙었다가 이내 연장을 팽개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알레스도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았다.
어설프나마 어쨌든 추격은 시작되었다.
미치도록 잡고 싶다, 저놈의 등짝.
저 등짝을 잡아채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알레스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등짝을 노려보았다.
도망가는 놈도 사력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어?’
그러다 알레스는 문득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저 등짝이 어디서 본 등짝 같았다.
눈에 익은 몸 선이랄까, 여하튼 등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등짝인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
아아아, 답답한 이 기분.
뇌세포가 죽어가는 듯한 이 기분!
도망가는 자도 뒤쫓는 자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알레스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달리면서 팔을 뻗어보았다.
잡힐 듯 멀어지고 잡힐 듯 멀어지고.
알레스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야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던졌다.
그 빌어먹을 등짝을 향해.
어어어?
알레스는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시야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등짝은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운 나쁘게도 넘어진 알레스를 기다리는 건 평범한 땅바닥이 아니었다.
저 아래 수로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로 뚝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알레스는 바람 부는 날의 가랑잎처럼 휘날리며 비탈길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아, 이렇게 끝인가.’
이상한 세상에 떨어져서 정신이 들자마자 이혼녀가 되어 한번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애써 왔던 날들이여.
이럴 줄 알았으면 카이트의 울대뼈라도 한번 만져 볼 것을.
천타빵을 더 많이 먹고 공유 마차 중 한 대를 빼서 원 없이 여행도 다닐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