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60화 (60/120)

60화

어쩐지 후끈한 열기

“알레스는 전혀 모르고 있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는지.”

공작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으이그, 이 답답아!

그냥 사랑도 맘에 안 드는데 짝사랑이라고?

대 메르세데스 공작이 대체 어디가 모자라서!

이 친우의 눈엔 한참 빠지고 성에 안 차는 레이디 페레티를 짝사랑이나 하고 말이야!

브린은 못난 아들 둔 어미의 심정이 되어 가슴을 탁탁 두들겼다.

차라리 로잘린이랑 엮어서 처남으로 삼아야 하나?

하지만 저 벽창호 공작이 한번 마음을 주었다면 되돌릴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랜 친구 사이인 만큼 브린은 공작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어떻게 하면 알레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을까?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느낌이야.”

친우의 고민에 브린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좀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을까?

“물론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지. 솔직하지 못했어.”

그래? 그럼, 바보짓을 더 해 보자, 카이트!

브린은 레이디 페레티의 연애 스타일을 머릿속으로 분주히 예상해 보았다.

고집 세고, 제멋대로에 막무가내고, 드세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최근에 이혼해 남자에게 원한이 깊은 여자라면….

집적거리면서 스킨십을 하려고 드는 엉큼한 종자들을 이가 갈리게 싫어할 게 분명해.

잘하면 그 자리에서 귀싸대기를 올릴 수도 있을 듯.

카이트, 미안하네. 다 자넬 위해서야. 그냥 따끔하게 한 대 맞고 끝내자.

“카이트, 자네가 누굴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지?”

브린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다가갔다.

“그런데?”

공작이 께름칙한 느낌에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후후, 남녀 사이란 말만으로 가까워지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럼?”

“열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스킨십이 더 효과적이지.”

“스킨십?”

“스킨십이 뭔지는 알지? 그런 거, 저런 거, 알지?”

“…….”

“여하튼 남녀 간엔 스킨십이 있어야 자네가 바라는 거처럼 훅 가까워질 수가 있는 거야. 말로는 생길 수 없는 친밀감이 확 생기는 거라구.”

“그런가….”

“특히 미적지근하고 은근한 스킨십은 하나 마나지. 야수같이 거칠거나 꿀이 뚝뚝 흐를 거처럼 달콤하거나 녹아 없어질 거처럼 화끈하거나, 하여간 강렬할수록 좋지.”

“근거 있는 소린가?”

“있고말고. 요즘 레이디들은 이벤트도 좋아한다는군. 새롭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거지.”

“이벤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프러포즈하거나 아, 페레티 공유 마차의 데이트 패키지도 인기가 좋다더군.”

“공유 마차 데이트라….”

“참, 추수감사 축제 이름이 ‘해와 달의 입맞춤’이란 건 알고 있나? 축제 마지막 날, 해와 달이 만나는 석양 무렵에 연인들이, 또 연인이 되고 싶은 이들이 키스를 나누는 풍습이 있어.”

카이트, 절호의 기회 아닌가?

레이디 페레티에게 따귀 맞고 퇴짜 맞을.

“자네 혹시 사탕 키스라는 거 아나?”

브린이 비릿하게 웃으며 마지막 미끼를 던졌다.

“사탕… 키스?”

“이게 백발백중 마음을 얻는다는 필살의 키스인데.”

“…….”

“내 입속에 있는 사탕을 상대방 입속에… 알지?”

브린의 설명에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최신 트렌드야. 레이디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 있는 키스라는군. 사탕 키스면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대.”

“브린….”

“왜?”

“자네가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던가?”

“뭐? 내가 자넨 줄 알아?”

“내 머릿속에 브린이 연애한 기억은 없는데 말야.”

“아카데미 졸업 후 한동안 떨어져 지냈잖아. 소년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곤란해.”

“그렇군.”

“그래!”

“알겠네. 세심한 지도 고마워, 브린.”

“어? 그,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양심이 찌르르 울리는 걸 느끼는, 책과 자료와 기사로 연애를 배운 브린 페이지 맥켈란 황자였다.

* * *

“알레스 언니, 알레스 언니!”

성질 급한 황녀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에 울려 퍼졌다.

“아우 귀야,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황녀 전하?”

아침 식사 후 참모들과 모닝커피를 마시던 알레스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언니이,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요!”

로잘린은 발을 꿍꿍 구르며 특기인 ‘구두 굽으로 바닥 찍기’ 신공을 펼쳤다.

“이거 좀 보라고요!”

로잘린의 시녀가 손에 든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내가 아침 일찍 제도를 돌면서 홍보물 부착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단 말이죠. 오라버니 얼굴이 들어간 내 작품들을 기분 좋게 둘러보면서.”

시녀가 내민 종이 뭉치는 뜯어낸 벽보들이었다.

어제 알레스가 남장을 하고 제도 곳곳에 붙인.

‘황녀님도 어지간하시네. 아침부터 홍보물 시찰을 나가시다니.’

알레스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게 뭐냐고오!”

로잘린이 그중 하나를 뺏어 들고서 마구 흔들었다.

알레스와 마밤헬, 아이언스는 구겨진 벽보들을 살펴보았다.

애꾸눈이 된 공작, 점돌이가 된 공작, 콧구멍이 왕방울만 해진 공작, 눈 밑에 길게 칼자국이 난 공작, 털보가 된 공작, 여자가 된 공작….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 놨다구요!”

로잘린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괘씸하면서도 웃음이 나 입술을 깨물며 겨우 말했다.

“아아니, 이런 나쁜 놈들이 있나.”

“대체 누가 이런 치졸한 짓을 했대요?”

그러자 로잘린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게 다가 아니에요. 심지어 눈을 도려낸 것도 있다고요!”

“어머 무서워.”

“그런 벼락 맞을 놈들이 있나.”

“내가 꼭 잡을 거야. 감히 오라버니 얼굴에 이런 짓을 하다니. 그 간땡이 부은 놈을 잡아서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놓을 거야.”

로잘린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짐했다.

“아이들 장난인가? 아니면 혹시 경쟁자나 정적이?”

“다른 연모인 클럽 회원들일까요? 연모인들 중엔 행동이 지나친 사람들이 종종 있잖아요.”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알레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섣부른 판단은 내리지 말아요. 확실치도 않은데 적대감을 가질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황녀에게 물었다.

“전하, 이 벽보들은 어디서 발견하셨어요?”

“블랑제 거리랑 소드 킹 거리요.”

대담하게도 크고 번화한 길이다.

“제가 벽보를 붙였으니 다시 가서 새 걸로 교체하고 주변 조사도 해 볼게요. 범인도 제가 알아볼 테니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범인은 내가 잡을 거예요.”

“황녀 전하는 더 중요한 일을 맡아 주세요.”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요!”

“연모인 클럽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 주세요.”

“기강?”

“우리 오빠가 귀하면 남의 오빠도 귀하다, 내 취향이 소중하면 남의 취향도 소중하다.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최애 문화를 즐기는 에티켓 같은 걸 만들어 주세요.”

“그런 걸 왜 굳이 내가….”

“오직 황녀 전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알레스의 간곡한 부탁에 로잘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낙서 변태는 언니가 꼭 잡아줘야 해요.”

“네, 노력해 볼게요.”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알레스는 여전히 남장을 한 채 벽보에 이상이 없나 강연장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제 강연용 천막인 큐브에도 공작의 사진을 넣은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벽보도 그렇고 현수막도 그렇고, 사진 속의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뚱한 얼굴이었다.

카르티에 공작의 홍보물에 넘실거리는 화사하고 상큼하고 유혹적인 미소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지만 알레스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작의 얼굴에서 쫙 빠진 웃음기를 대신해 로잘린과 밤비가 한껏 집어넣은 샤랄라한 장식.

저게 강연 주제랑 어울리느냔 말이지.

하지만 현수막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 사진 속 남자가 메르세데스 공작인가 봐요. 왠지 끌린다, 강연이.”

“어머 내 취향이다, 강연 주제가.”

“어머 귀엽다, 강연 천막이.”

“어머 내 걸로 만들고 싶다, 성을 지키는 비법.”

약간 이상야릇한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강연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분명했다.

강연회 개막이 다가오자 연모인 클럽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푸른 불꽃의 고결, 붉은 물보라의 매혹, 태양을 삼킨 백장미, 별이 빛나는 밤의 사슴, 내 심장을 가져간 흑발 드롭 귀고리 등등.

저마다 옷을 맞춰 입거나 부채를 맞춰 들거나 같은 색 리본을 달고서 자기들만의 표식을 뽐내며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연모인 클럽끼리 맞닥뜨릴 때마다 거리에 긴장감이 돌고 종종 폭력 사태가 빚어질 뻔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디선가 출동한 로잘린 황녀 일행이 깔끔하게 교통정리를 했다.

그뿐 아니라 황녀는 연모인 클럽 영애들에게 연모 활동 에티켓에 대해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이야말로 거리 강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녀는 그렇게 알레스와의 약속을 지켰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강연 천막 앞에선 강연 전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아, 한 시간 후에 공작 전하의 수성 명강연, 열두 가지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법이 시작됩니다. 그 전에 맛보기로 문답 대회를 개최합니다.”

아이언스가 확성 마도구를 잡았다.

“강연 중에 나오는 내용으로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많이 맞히신 세 분께 여기 보이는, 금빛 황홀한 상품을 드립니다.”

금가루를 뿌린 말편자 빵 세트와 밤비스 컬렉션인 말편자 액세서리 세트, 금빛 봉투에 담긴 공유 마차 이용권을 아이언스가 손으로 가리켰다.

메르세데스의 백상아리는 청산유수로 이빨도 잘 털었다.

그의 호객 멘트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 그럼 첫 번째 문제! 성을 수비하기 위해 화살을 많이 만들어 두는 건 기본입니다. 다음 중 화살을 만드는 데 쓰는 나무가 아닌 것은?”

사람들이 바짝 귀를 기울였다.

객관식이면 속도 경쟁이다.

“1번 대나무, 2번 소나무, 3번 싸리나무, 4번 복숭아나무, 5번 느릅나무!”

“이보시오, 이보시오!”

“여보시게!”

“내가 먼저요!”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다급하게 불러댔다.

“저기 금발 머리 기사님?”

“2번 소나무가 확실하오!”

“정답은 바로 바로! 60초 후에 공개합니다!”

“뭐? 지금 결투를 신청한 건가?”

“아니오, 정답입니다!”

“으하하하, 그럼 그렇지.”

“금발 머리 기사님이 1점 가져가십니다. 그럼 다음 문제!”

아이언스의 아이디어로 시도해 본 퀴즈 이벤트는 꽤 성공적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문제입니다. 성벽을 따라 오십 걸음마다 설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은?”

다시 사방이 고요해졌다.

“1번 작은 망루, 2번 도로로 통하는 계단, 3번 야외 화장실, 4번 우물, 5번 땔감용 나무!”

“3번 야외 화장실!”

“아, 검은 머리 신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답이 아닙니다!”

“이보시오, 여기 보시오! 4번 우물이오, 우물!”

“정답입니다! 노신사 분께서 맞히셨습니다! 자, 퀴즈 상품을 받으실 세 분을 발표하겠습니다. 금발 머리 기사님, 필리페 남작님, 하리오 영식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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