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제 직진할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매우 재능 있는 청년들을 교육하고 있는데 말이죠.”
알레스가 샤를테론 단장에게 다음 용건을 꺼냈다.
“지금은 공유 마차의 마부로 활약하며 약간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지만 앞으로 본격적으로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요.”
“공유 마차 마부라면 그 꽃미남 마부들이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네, 뛰어난 용모에 성실함까지 갖춘 훌륭한 청년들이랍니다.”
알레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나름 연기와 노래 등을 연습하고 있지만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물론 이곳에선 생활 연기를 주로 하시지만….”
“어머 무슨 서운한 말씀을. 생활 연기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하는 거고, 저희도 언제나 예술 무대를 꿈꾸고 있답니다. 연극이나 노래 연극 연습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와, 잘됐네요. 단장님께 연기 지도를 받고 다른 단원 분들께도 도움을 받아 우리 마부들의 첫 무대를 준비하고 싶어요.”
“오 이런 이런, 정말 잘 오셨어요. 간만에 제 안의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르는 걸 느낍니다. 이런 순수한 열정은 무척 오랜만에 느껴 보네요.”
단장은 정말로 의욕이 치솟는지 두 손바닥을 마구 비벼댔다.
“여러분의 욕쟁이 할머니 연기가 끝나면 우리 꽃미남 마부들을 이곳으로 보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제 평생의 연기 경력을 걸고 제대로 교육시켜 보겠습니다.”
“단장님이랑 저랑 인생 작품 한번 만들어 보지요.”
“참, 생각해 두신 연극 대본은 있으신가요?”
“부끄럽지만 제가 써 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도 한번 봐 주시겠어요?”
“어머, 레이디 페레티께서 직접 대본을 쓰셨어요?”
“대본이라기보다 동화 같은 거긴 한데, 혹시 쓸 만하다면 각색을 하면 어떨까 해서요.”
“레이디의 글을 읽어 보는 영광을 허락하시다니. 마침 저희 예술단엔 극작가들도 있답니다.”
“많이 부족해요. 보시고 솔직한 의견 주세요.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세요.”
알레스가 묶어 놓은 종이 뭉치를 꺼내서 건넸다.
“알겠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무척 궁금하네요.”
“참, 하나만 더….”
자리에서 일어서던 알레스가 말했다.
“아까 남자 역할까지 가능하다고 하셨죠? 검사나 불량배나 소년 같은.”
“네, 그럼요. 언제 어디서든 바로 연기에 돌입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럼 남장 같은 것도 금세 가능하시겠네요.”
“아휴, 그런 건 일도 아니죠.”
“그럼 지금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남장이요. 제가 남장하는 걸 도와주실 수 있나요?”
“카이트.”
알레스가 목소리 톤을 장난스럽게 바꾸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웬 소년이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때요? 진짜 소년 같죠?”
알레스가 공작 앞에서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지난번엔 수신사 제복만 급하게 빌려 입어서 어색했지만, 오늘은 복장뿐만 아니라 말투, 걸음걸이, 몸짓 같은 거까지 모두 완벽하게 배웠어요.”
완벽하다고 말하기엔 어색했지만.
공작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여동생이 남동생 됐네요.”
두 사람은 비에커가를 천천히 걸어서 알레스의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로 향했다.
“이렇게 입으니까 날아갈 거 같아요.”
단출한 옷으로 몸이 가벼워진 알레스가 폴짝폴짝 뛰었다.
그 바람에 어깨랑 가슴, 허벅지 등에 쑤셔 넣은 천 뭉치가 훌렁훌렁 자리를 이탈하거나 흘러내렸다.
“어어, 내일 나갈 때는 더 단단히 고정해야겠어요.”
알레스가 당황해서 천 뭉치를 끌어올렸다.
“남장 때문에 거기 갔던 건가요?”
공작이 물었다.
“그건 아니고요, 축제 음식을 팔 식당에 약간의 양념이 필요해서요. 그걸 부탁하러 갔는데 마침 남장도 필요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남장은 왜 하려고 합니까?”
“음….”
알레스가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축제 준비로 할 일이 많은데 시간도 촉박하고 일손이 부족해서요. 성격이 급해서 다른 사람 찾을 시간에 제가 하고 만다는 생각에….”
“무슨 일을 하려고요?”
“음….”
알레스가 이번에도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하다 털어놓았다.
“강연 홍보 포스터도 붙이고 강연회장 집기를 나르거나 단장을 돕는, 이런저런 몸으로 때우는 일들이요. 전 다른 사람들 같은 특별한 재능은 없어서요.”
“재능이 없다니요. 알레스가 이번 행사의 총책임자인데요. 알레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강연할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운데요? 역시 총책임자인 제가 책임지고 홍보물을 붙여야겠군요.”
“나도 같이 하겠습니다.”
“예? 카이트는 강연 준비나 하세요.”
“나도 몸으로 때우는 거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기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홍보물을 붙이는 게 매우 민망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냥 종이를 벽에 붙이는 일일 뿐인데요.”
알고 보니 공작의 얼굴 가죽은 생각보다 두텁다?
“그런데 이번엔 뭐라고 안 하세요?”
“무슨…?”
“친오빠가 여동생을 혼내듯이 잘 혼내시잖아요.”
“걱정하는 거지 혼내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건 혼낼 일도 아니고요.”
“이상하네요. 전 카이트가 남장도, 남장하고 일하는 거도 싫어할 줄 알았어요.”
“내가 싫다면 안 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 카이트가 못 하게 말리며 한소리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러기는커녕 같이 하겠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그거야, 다른 늑대들과 얽히는 일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그것만 아니라면 나는 당신이 하고 싶다는 일은 뭐든 할 수 있게 도울 거예요.
뭐든 함께 하고 싶을 거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내가 미쳤지.
“알레스에게 내 이미지가 많이 왜곡돼 있군요.”
“왜곡 아닐걸요?”
“내일 벽보를 어디어디 붙일 계획인지 얘기해 봐요.”
같이 일하면서 알레스와 데이트도 즐길 수 있잖아요?
비록 남장인 채지만.
“저는 남장이라도 했지, 카이트는 어쩌려고요? 공작 전하가 직접 자기 얼굴 박힌 벽보를 붙이고 다니다간 죽어서도 지울 수 없는 흑역사가 생길 거라고요.”
“저도 변장을 해 보도록 하죠.”
“여장이라도 하시려고요? 카이트의 그 우월한 키와 눈길을 끄는 근사한 체형은 변장을 한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라고요!”
“…….”
“크흠, 여튼 그렇단 얘기고, 어떻게 하면 강연을 재밌게 할까, 청중을 사로잡을까를 고민하시라고요.”
“저한테는 마법이 있는데요.”
“그래서요?”
“마법으로 변신을 하면…. 눈고양이나….”
알레스가 펄쩍 뛰며 말렸다.
“제발 좀요! 눈고양이가 벽보를 붙이고 있으면 참 자연스럽기도 하겠네요. 그런 쓸데없는 일에 마력을 낭비하지 말라구요!”
“이제 보니 막 혼내면서 못 하게 하는 건 알레스인데요?”
“……!”
대체 공작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벽보 말고 다른 얘길 좀 해 보죠. 강연 자료 준비하실 건 없나요? 시청각 자료라든가.”
주제만 봤을 땐 강연이 매우 지루할 거 같다고요.
알레스는 저쪽 세상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좀 전수할까 싶어 물었다.
“괜찮아요. 강연에 관해선 신경 쓰지 말아요.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 눈에 훤해요.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카이트의 눈에만 훤하니까 문제죠.
“요즘은 그냥 말로만 줄줄 하거나 문자로만 보여 주면 사람들이 지루해 한대요. 제가 도표라든가 지도라든가 하는 걸 좀 만들까요?”
“고맙지만 정말 괜찮아요. 알레스는 이미 맡은 일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내가 오히려 알레스를 도와야 한다니까요.”
알레스가 의욕적으로 제안했지만 공작은 이렇게 사양할 뿐이었다.
알레스가 퉁퉁거리면서 소리쳤다.
“뭐예요, 정말! 카이트야말로 걱정스럽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이거 혼내는 거 아니고 걱정하는 거예요!”
* * *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늦은 시각에 아네모네 저택으로 돌아온 친우를 향해 브린 황자가 물었다.
“이런저런 볼일이 좀 있어서.”
“아니, 곧 강연이잖아. 우리 은둔자 공작께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건데 걱정도 안 되나?”
“그건 별로 걱정이 안 되는군.”
“역시 강심장이야.”
걱정이 안 된다는 거치곤 친우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강연 말고 다른 걱정이라도 있나?”
“…….”
공작이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걸 느낀 브린은 먼저 미끼를 던져 보기로 했다.
“왜? 또 레이디 예외 다람쥐 페레티께서 문제인가?”
웬만한 일엔 무덤덤한 건어물 공작의 심기를 어지럽힐 골칫덩이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하필 은인 가문의 레이디가 그런 천방지축 악녀일 게 뭐람.
카이트로서는 모른 척할 수도 없겠지.
친우의 푸른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옳지, 걸려들었어!
공작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싶더니 불쑥 던졌다.
“코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야.”
이런, 레이디 페레티 때문에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면.
브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전에 눈고양이들 밥을 주러 나갔다가 미처 보지 못한 나뭇가지에 콧등을 부딪친 적이 있거든.”
“요즘도 여전히 눈고양이 밥을 주는군.”
“음. 귀여운 모습에 넋을 놓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얻어맞으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
레이디 페레티가 가만히 있으면 눈고양이 같은 느낌이긴 하지.
가만히 있다면 말이야.
“갑자기 당하니까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브린은 괜히 친우의 콧등을 흘끔 보았다.
쭉 뻗은 곧은 콧대와 섬세한 콧날이 그의 얼굴을 고상하고 고귀해 보이게 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 조각 같은 코는 무사해 보였다.
“그녀를 생각하면 몸이 막 아픈 거야. 여기저기 근육이 막 욱신거리는 거 같고. 머리랑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혹시 레이디 페레티가 주먹도 쓰나?
“당장 봐야 할 거 같고, 보고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거 같고. 헛소리든 잡소리든 뭐라도 말이야.”
아하, 그거 화병이라는 거다, 카이트.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큰 병 돼 그거.
브린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공작은 다시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서 결국 제도까지 달려온 적도 있지만.”
“뭐? 제도에 왔었다고?”
“몇 차례 다녀갔지.”
“그런데 나한테 기별도 없었어?”
“밤새 달려와 알레스를 만나고 새벽에 돌아가느라 따로 기별 넣을 시간이 없었어.”
브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차라리 레이디 페레티가 주먹을 휘둘렀다고 말해 줘!
“자네 지금… 레이디 페레티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건가?”
“…음.”
“은인 가문의 영애라서가 아니고? 여동생 같아서 아니고? 다람쥐나 눈고양이처럼 아니고?”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그 이유들을 다 빼도 그녀가 신경 쓰여.”
“안 돼!”
“뭐?”
“아, 아니, 자네 스스로 늘 말하지 않았나. 자신은 누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 무, 물론 반가워서 묻는 소릴세.”
“글쎄, 왜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시작에도 끝에도 알레스가 있다는 거야.”
레이디 페레티라니, 브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그동안 레이디 페레티를 각별히 챙기는 건 은인 가문의 딸이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러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다른 감정을 느낀다고?
그렇다면 카이트에겐 아마 첫사랑일 테다.
올바른 판단력을 도랑에 처박았을 거란 얘기다.
“레이디 페레티는? 그녀는 뭐라는데?”
브린이 따지듯 묻자 공작이 멈칫했다.
설마, 설마….
카이트 너 짝사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