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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8화 (58/120)

58화

샤를테론 예술단의 비밀

공작의 마차 아닌 마력을 타고 도착한 곳은 비에커가의 뒷골목이라 불리는 플럼가 끄트머리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샤를테론 예술단.

비에커가에서 카르티에가 퍼포먼스를 펼칠 때 넘어지는 역을 맡아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 준 레이디.

역시 신들린 연기를 펼쳤으나 메르세데스에게 목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산통이 깨진 레이디.

샤를테론은 이 두 레이디가 소속된 예술단이었다.

또한 이곳 단장의 이름이기도 했고.

“만나 뵙게 돼서 기쁩니다.”

샤를테론 단장은 귀부인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우아한 미모가 눈길을 끌 정도였다.

알레스를 반갑게 맞이한 그녀는 옆에 있는 공작을 향해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혹시 지난번에 연기자의 목덜미를 잡아채 산통을 깬 걸 기억하는 걸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곳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예술단이라서요. 신사분을 들이기가 좀 곤란합니다.”

거짓말. 카르티에 공작에게 이곳을 소개 받았다고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로비에서 레이디를 기다리는 건 괜찮습니까? 레이디를 댁까지 에스코트해 드려야 해서요.”

공작은 순순히 받아들이며 물었다.

“네, 그럼 그러셔요.”

“실례하겠습니다.”

알레스는 괜히 미안해져서 공작에게 말했다.

“먼저 가 보셔도 돼요. 여기서 집까지 멀지 않거든요. 밤비 경을 불러도 되고요. 전 축제 준비 때문에 이분들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내가 기다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

아까부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 공작이었다.

표정만 봐서는 별 뜻 없이 하는 소리 같지만.

알레스는 로비에 공작을 남겨두고 샤를테론 단장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단둘이 되자 단장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레이디 페레티, 이렇게 찾아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녀는 격앙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연극의 절정 부분에서 격정적인 대사를 외치는 거 같았다.

“아, 예에… 환영해 주셔서 감사해요.”

알레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했다.

이분도 배우신가? 감정 표현이 격하시네.

“그거 아세요? 레이디는 우리 예술단의 영웅이고 귀감이시랍니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세요!”

그만, 그만!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으니 그만하세요!

그렇다고 의뢰비를 더 올려 줄 것도 아니니까.

“휴우,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책을 떨었나요?”

알고 계시군요.

“아니에요. 이곳에 계신 분들은 열정이 넘치는 거 같아요. 지난번 레이디들의 연기도 매우 감명 깊게 보았답니다.”

“호호호, 맞아요. 여기 단원들은 모두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레이디를 존경하는 거구요.”

“예? 저를 왜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긴 여성 단원들로만 이뤄져 있어요. 그리고….”

단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혼한 귀족 출신 레이디들이 많답니다.”

단장의 은밀한 고백에 알레스의 눈도 커졌다.

“아시다시피 이혼한 여자, 그것도 귀족 출신은 재혼을 하지 않는 한 살기가 매우 팍팍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알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스 자신은 무려 황제가 된 대공과 이혼했는데도, 그래서 위자료를 알토란같이 챙겼는데도 사는 게 녹록치 않았다.

그러니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온 다른 귀부인들은?

“그래도 재혼보다는 스스로 살길을 찾고 싶었던 레이디들이 한두 사람씩 모이면서 우리 예술단이 만들어졌답니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예술단이라는 덴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선배님들이셨네요.”

“그런 저희에게 레이디의 활약상은 풍랑이 거센 바다 위의 등대요,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난 귀한 이정표요, 깜깜한 동굴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인지 잘 알겠는데 표현은 조금 자제해 주시면….

“우리가 생각한 게 맞다, 우리가 꿈꾸는 걸 이룰 수 있다 하는 증거가 되어 주셨어요, 레이디는. 증거가 있으니 우리의 꿈은 결코 망상이 아니지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아, 그래서 제가 봤던 연기가 완벽했던 거군요. 원래 귀부인 출신들이셔서.”

“뭐 생활이죠, 호호.”

“흐음, 그럼 이번 의뢰는 좀 곤란하실 거 같기도 하고요?”

알레스가 주저하는 듯하자 단장이 얼른 표정을 고치고 물었다.

“무슨 의뢰신데요?”

“우아함과는 좀 거리가 있는 거칠고 무례한 연기거든요.”

“어머, 레이디 페레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흰 본격 연기자들이라고요. 어떤 연기든 주문하시는 대로 해드려요.”

“그게… 저희가 이번 축제 때 새로운 축제 음식을 선보이려고 하거든요. 매우 획기적인 메뉴라 그에 걸맞은 퍼포먼스로 주의를 끌려고 해요.”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일명 ‘욕쟁이 할머니’라는 콘셉트인데요….”

“욕쟁이 할머니?”

“네, 식당 주인이 욕을 구성지게 하는 할머니라는 설정입니다. 손님들한테 막 퉁명스럽게 말하고 불친절하게 굴고 가끔 등짝도 후려치는….”

단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흐음,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막 대하란 말씀인가요?”

“아무래도 좀 어려우시겠죠?”

“어렵긴요! 저희 단원들은 어떠한 연기도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귀부인, 상인의 아내, 농부의 아내, 각종 전문직, 노파, 아니 여자뿐 아니라 검사나 불량배, 소년 등 남자도 연기할 수 있습니다.”

“대, 대단하시네요.”

“후후, 단원들의 연기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답니다. 사실 저희 단원 중엔 귀부인 출신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단장이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신분을 숨겨야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소수이긴 하지만요. 너무 놀라진 마세요.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하하, 그렇군요. 전 범죄자나 도주자처럼 쫓기는 사람들인가 생각했어요.”

“네,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오히려 피해자인 경우가 많답니다.”

범죄자나 수배자가 있긴 하구나!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특히 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건 참으로 힘겨운 일이랍니다.”

“예에… 그런 일이 많지요.”

“여하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희 단원들의 출신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양하다는 겁니다. 그만큼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연기 지도가 가능하다는 거죠.”

“그렇군요. 매우… 다양한 인재를 보유하고 계시네요.”

“참, 아까 함께 오신 공작 전하를 모실 수 없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지난번 목덜미 사건도 그렇고, 알아본 평판도 그렇고, 무척 반듯하고 고지식한 분인 거 같더라고요. 혹시 저희를 수상하게 생각하실까 봐서요.”

“아, 그렇지 않아요. 반듯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으시긴 한데 따뜻한 분이세요. 무엇보다 사람을 신분이나 출신으로 차별하지 않으신답니다. 그쪽으론 열린 생각을 가진 분이세요.”

“그러세요? 의외네요. 하긴 오늘 뵈니까 수려한 외모에서 뭔가 섬세하고 애잔한 감성이 배어 나오긴 하더라고요.”

아니, 그렇게 평가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기 있습니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거든요. 연기를 하려면 관찰력이 좋아야 해서요.”

알레스가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욕쟁이 할머니 역할, 저희가 잘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면 되는 거죠? 손님이 얼른 먹고 일어나게 내쫓으면 되는 건가요?”

“아, 단순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걸 주문하는 게 아니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알레스가 입을 모아 부리 모양으로 만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실은 걱정하는 마음이 바탕에 있는 거예요. 말랑말랑하게 표현하자니 쑥스러워서 말투는 퉁명스럽고 행동은 거칠지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느끼는 거죠. 거기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걸.”

“흐음….”

“그래서 욕을 먹고 등짝을 맞아도 손님들은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니라 따스한 정을 느끼는 거죠.”

“참으로 이상야릇한 취향이지만 대충 감이 오는군요. 단원들에게 레이디의 뜻을 잘 설명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친 뒤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정말 제대로 감 잡은 거 맞나요?

“무엇보다 레이디의 의뢰작이니 단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혼신의 힘을 다할 겁니다. 기대해도 좋으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걸까요?

“샤를테론 단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우아한 귀부인 연기만 하던 분들이 그런 상스러운 대사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요?”

미심쩍은 얼굴로 말한 알레스가 덧붙였다.

“아무리 거칠게 살아온 분들이 소수 계시다지만.”

그러자 샤를테론 단장이 여유롭게 웃었다.

“후후, 레이디 페레티. 저희가 말이죠,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랍니다. 레이디께서도 잘 아시지 않아요? 저희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한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

“단원들의 한 맺힌 사연을 다 풀어 놓자면 일 년이 모자랄 겁니다. 그 한을 끌어올려 욕으로 승화시킨다면? 정말 찰지고 깊이 발효된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그, 그렇군요.”

“정 못 미더우시면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귀에서 피가 좀 나실 수는 있으세요.”

“아니요, 됐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도 멋진 연기 기대하겠습니다.”

“호호호, 잘 생각하셨어요. 탁 믿고 맡기세요.”

“저, 그리고 의논드릴 일이 하나 더 있는데요.”

* * *

공작은 로비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다소 멍한 표정으로 알레스를 기다렸다.

자신이 제도 번화가 뒷골목에 있는 수상쩍은 건물에 앉아 있다는 게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때 한 부인이 공작에게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공작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위기 상황인가? 피해야 하나?’

공작이 자리를 피해야 하나, 또 목덜미를 잡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 아니신가요?”

“예… 맞습니다만….”

의문의 부인은 공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공작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만류했다.

“부인, 이러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저는 신탁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저 그뿐이에요. 믿어 주십시오. 신탁의 아이가 메르세데스 공자라고는 한 적 없습니다.”

“부인?”

“저는 후작에게 이용당한 겁니다. 황제도 속은 거고요. 일이 잘못되자 후작은 죄를 제게 뒤집어씌우고 저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

“그렇더라도 전하께는 죄송합니다. 그 일로 수난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공자님도 위험에 빠지시고…. 전하께서 공작부인과 함께 사라지셨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무사하셨군요. 저는 감당하기 너무 두려워서 지금껏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잠시 흐느꼈다.

“죽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낯선 부인의 갑작스런 고백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공작은 이내 그녀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부인, 저는 미카엘이 아니고 카이트입니다. 그때 그 소공자는 이렇게 무사히 자라서 잘 지내고 있으니 더는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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