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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7화 (57/120)

57화

자꾸 웃음이 나와

알레스, 메르세데스 공작, 마사와 밤비, 네 사람은 ‘다정한 릴리 마를렌의 집’ 너른 마당 한쪽에 세워진 양조장으로 안내되었다.

배가 불룩한 커다란 나무통 안에서 맥주가 뽀글뽀글 탄산을 뱉어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 마개를 뽑자 작은 구멍으로 황금빛 액체를 쪼로로 뿜어냈다.

소로 부부는 이 맥주를 글라스에 받아서 네 사람에게 한 잔씩 건넸다.

‘으아아, 얼마만의 맥느님이냐!’

알레스는 홉의 알싸한 향을 느끼며 핏속의 알코올 괴물들이 날뛰는 걸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고 리듬을 탈 뻔했다.

주변을 의식해 방방 뜨는 본능을 억지로 내리누른 알레스는 괜히 공작에게 거들먹거려 보았다.

“카이트, 술은 좀 드시나요? 마셔 본 적은 있으시죠?”

“잘 마시지 못합니다.”

“후후, 왠지 그러실 거 같았어요.”

“알레스는 잘 마시나요?”

“뭐, 그럭저럭요. 전 그저 즐기는 편이죠. 많이 마시기보다는.”

“술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좋은 술, 맛있는 술을요.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전 먹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맛있는 걸 좋아하는 거지.”

“유념하겠습니다.”

“그럼, 제국 최초의 맥주를 맛볼까요? 카이트는 술이 약하니 조심조심 조절해서 드세요.”

“그러지요.”

“아, 마시기 전에 우리 공작 전하의 첫 강연이 좋은 반응을 얻길 기원하죠.”

“강연 성공을 위하여!”

“강연 대박!”

축배를 든 후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맥주를 한 모금 맛보았다.

‘크아아아!’

알레스는 속으로 공룡 소리를 내며 감격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황홀한 액체의 행진을 멈출 수가 없어 꿀꺽꿀꺽 절반 이상을 단숨에 삼키고 말았다.

알레스의 마음은 흥분한 마사의 목소리가 대변해 주었다.

“캬아, 이게 뭡니까. 세상에! 이 맛과 향과 톡 쏘는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이죠!”

밤비는 건배만 하고 술잔을 주당 유모 마사에게 넘겼다.

공작도 목과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고개를 젖혀 시원하게 들이켰다.

맥주가 거침없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공작의 울대뼈가 두어 번 크게 들썩였다.

왜 그런지 알레스의 눈에 그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울대뼈 만져 보고 싶다.’

이 생각을 했을 때 알레스는 알아챘어야 했다.

자신이 꽤나 취했다는 걸.

“딘따 마시떠요!”

알레스가 엄지를 내밀며 술맛을 칭찬하다 화들짝 놀랐다.

뭐야, 혀가 왜 반 토막 났어? 설마 취했다고?

발을 내디뎌 보니 몸이 휘청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소울 푸드를 몸이 지나치게 쭉쭉 빨아들인다 싶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맥주 한 모금에 취한다고?

알레스는 새삼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하얀 엔젤링만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어, 내 맥주 누가 마셨지?’

이래저래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알레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알레스, 괜찮아요?”

공작이 알레스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은데, 공작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거 같았다.

마사와 밤비도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맥주 한 잔으로 취한 듯했다.

원래도 술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약하진 않았는데? 사회생활을 위해 억지로 주량을 늘리기도 했고.

아아,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영애가 술을 전혀 못 마시나?

아, 자존심 상해.

알레스는 자기 마음 같지 않은 몸뚱어리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문제는 열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오르는 거 같다는 사실이었다.

“저쪽에 잠시 앉아서 쉬는 게 어떨까요?”

공작이 양조장 한쪽에 있는 나무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게 좋겠어요, 아가씨.”

알레스가 기우뚱거리며 벤치에 앉자마자 마사와 밤비가 투덕거리더니 어색한 표정과 부자연스런 말투로 말했다.

“아가씨, 생각해 보니 저랑 밤비 경은 급한 일이 있어요. 강연 홍보물 만들기를 돕기로 했거든요.”

“네, 레이디, 시간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홍보 포스터는 내일 당장 붙여야 하고요.”

“네네네, 로잘린 황녀 전하 성격 급하신 거 아시죠?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두 분은 천천히 쉬시다 오세요.”

“공작 전하, 레이디를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번개처럼 날쌔게 모습을 감추었다.

알레스는 손을 뻗은 채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골칫덩이를 팽개치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모습인데?

야야, 마사랑 밤비!

취한 사람 버리고 가기 있냐!

그러고도 너희가 인간이냐!

문득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려보니 공작이 단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맥주 맛이 어떠셨어요?”

알레스는 눈과 혀에 힘을 주고 취하지 않은 척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나는 사업가다. 나는 프로다.

나는 제국 최초로 맥주를 만든 주류업계의 선구자다.

나는 당신의 매니저. 당신은 나의 고객.

“아,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맛이었습니다.”

“좀 팔릴 거 같은가요?”

알레스가 눈을 억지로 크게 뜨며 물었다.

“네, 이번 축제의 주인공이 될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야, 우리 카이트 얌전하게 생겨서는 뭘 제대로 아는데요? 혹시 알고 보면 좀 놀아 본 오빠?”

“예?”

“호호, 농담이에요. 하도 오빠 타령을 하셔서.”

“오빠 타령….”

“그거 아세요? 맥주에겐 친구가 꼭 필요하단 거. 이 맥주가 아무리 맛있어도 아직은 반쪽짜리란 말이죠. 그러니까 카이트랑 브린 황자 같다고 할까요.”

“나랑 브린 황자요?”

“두 분 죽고 못 사는 사이시잖아요.”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에이, 소중한 면죄권도 막 양보하고 그러시면서.”

“그건 그렇고 맥주의 친구는 누구죠?”

“아, 맞다. 맥주의 친구는 아까 얘기한 닭고기랑 옥수수예요. 이름이 치킨이랑 팝콘이에요. 이 아이들이 전부 만나면 굉장한 마법이 탄생한답니다.”

“그렇군요. 준비하는 축제 음식의 이름이 맥주, 치킨, 팝콘이군요. 나도 축제 때 꼭 먹어 봐야겠습니다.”

“네, 정말로요. 전하 아니 카이트랑 꼭 같이 먹고 싶어요.”

“그래요, 꼭 같이 먹읍시다.”

“…그런데 카이트 좀 취했나요? 피곤해 보여요.”

“…내가요?”

“음, 하하, 후후, 아까부터 왜 자꾸 웃으세요?”

“…내가?”

“아이 참, 정말로 술이 약하시구나. 볼이 발갛게….”

“…나?”

“강연 준비로 힘드신가… 봐요…. 전하 아니 카이트, 눈이 자꾸만 감기는 게 좀 쉬셔야… 카이트 아니 전하, 잠시 눈을 좀 붙이면….”

“…….”

알레스가 픽 쓰러지더니 곯아떨어졌다.

취해서인지 호기롭게 공작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입으로 바람까지 조그맣게 푸푸 불었다.

“또… 잠들었네.”

공작은 그때처럼 알레스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조그만 입술 두 개가 포르르 떨리는 걸 한참 들여다보았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레스가 추울까 봐 자리를 옮겨야 할 거 같았다.

그는 소로 부부에게 부탁해 침실을 빌렸다.

공작이 안아서 옮기는 동안도 알레스는 깨지 않고 잘 잤다.

한번 자면 기절하는 수면 습관이 있는 듯했다.

이번엔 침대맡에 앉아 구경했다.

기껏해야 자신의 손바닥 크기만 한 얼굴인데 보고 또 봐도 볼거리가 끝이 없었다.

심심하지 않았다. 변화무쌍했다.

특히 위쪽으로 살짝 들린 윗입술이 꼭 새의 부리 같았다.

뭔가 불만이 있는 아기 새 같았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콕콕콕.

공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는 얼굴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

문득 한 남녀의 모습이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올랐다.

서로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눈매가 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던 두 사람.

하루가 저무는 시간, 아주 사소한 일들을 매우 소중하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던 두 사람.

어렸을 때 그런 모습을 늘 보았던 공작은 때가 되면 자신에게도 당연히 그런 사람이 생기는 줄 알았다.

이렇게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 그 사람 아닐까.

알레스의 마음은 어떤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지.

공작은 알레스의 입술을 톡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손을 들어 부리 같은 입술로 손가락을 조금씩 가져갔다.

고개도 따라서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졌다.

“킥킥, 키스하려나 봐.”

“왕자님이 공주님한테 키스하면 잠에서 깨어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키득거림에 공작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틀에 아이들이 조롱조롱 매달려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보육원 아이들 사이에 공주님과 왕자님이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이들은 제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온 거였다.

과연 침대 위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잠들어 있고 그 옆에 멋지고 귀티가 좔좔 흐르는 왕자님이 앉아 있었다.

키스가 불발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아이도 있고, 두 손을 모아 쥐고 “나 저 왕자님이랑 결혼할래.” 하고 야무진 포부를 밝히는 아이도 있었다.

머쓱해진 공작이 알레스의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자신의 목 뒤로 가져갔다.

“으음….”

시끌시끌한 소리에 잠이 깬 알레스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흐어엄, 여긴…. 아 뭐야… 어떻게 된 거…야아!”

알레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깼어요? 맥주를 마신 뒤 잠들어서 방으로 옮겼어요.”

“아아,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이 몇 시예요?”

“슬슬 저녁시간이긴 합니다만.”

“아악 어떡해요! 오후 5시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그렇습니까. 지금 모셔다 드리지요.”

언제 깊이 잠들었냐는 듯, 훌쩍 침대에서 내려와 툭툭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알레스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까 마사랑 밤비 경이 마차를 타고 간 거 아닌가요? 우린 어떻게 돌아가요?”

“나한테 특별한 마차가 있죠.”

공작이 느긋하게 웃으며 알레스를 안심시켰다.

“이게 마차예요?”

“아까 타고 온 마차보다는 안락하지 않습니까?”

“별로요.”

알레스는 떨떠름하게 말하면서도 공작의 목을 꼭 끌어안아야 했다.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면 더 꼴사나우니까.

공작은 지난 적토마 사건 때 알레스를 업어서 데려다 준 것과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다만 그때는 알레스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기에(그때도!) 업었던 거고, 이번엔 일명 ‘공주님 안기’를 했다.

한손으론 알레스의 등을 받치고 다른 한손은 양 무릎 뒤에 넣어서 안았다.

알레스는 공작에게 안정감 있게 붙어 있기 위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달려 가다 보니 바로 눈앞에 공작의 울대뼈가 보였다.

아까 술에 취해서 만지고 싶어 했던.

자신이 그런 주책맞은 생각을 했다니, 알레스는 소름이 돋도록 창피해졌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떨치려고 괜히 따지듯이 물었다.

“마력을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낭비해도 되는 거예요?”

“쓸데없는 일 아닙니다.”

공작이 마력을 사용해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제가 듣기론 정말 중요한 일에 쓰려고 평소엔 마력을 최대한 아낀다던데.”

“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중요한 때.”

“…….”

카이트 오빠, 지금 거길 뭐 하러 가는지 알기는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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