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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6화 (56/120)

56화

제국 최초의 맥주 시음회

“퀴즈 같은 방식은 어떻습니까?”

“네?”

“강연 주제가 조금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강연 전에 퀴즈 이벤트를 열어서 흥미를 끌어 보는 겁니다.”

알레스가 새삼 아이언스를 쳐다보았다.

메르세데스의 백상아리가 이런 아이디어도 낼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긴 나름 유능하니까 공작의 비서로 파견한 거겠지?

“강연 내용을 퀴즈로 만드는 거지요. 다소 딱딱한 내용도 퀴즈로 바꾸어 보면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알레스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아이언스가 회색 눈동자에 거만한 표정을 띠고 말했다.

“여긴 재미를 추구하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예요, 아이언스 경.”

“강연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저일 테니 퀴즈 문제는 제가 만들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이벤트 하면 또 미끼 아니겠어요? 저희 페레티 상단에서 혹할 만한 상품을 빵빵하게 준비할게요.”

* * *

축제 준비의 두 기둥 중 다른 하나인 축제 음식 개발도 착실히 단계를 밟아 가고 있었다.

스토커 남작의 고향 동네 농민들은 대부분 양계와 옥수수 농사에 종사하며 제도의 닭고기와 옥수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스노브 후작의 농간으로 농축산물의 판로가 막혀 버렸다.

추수감사제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는커녕 다들 울상이었다.

‘닭과 옥수수….’

알레스는 두 가지 식재료를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했다.

곧장 떠오른 메뉴가 있긴 했다.

축제와 매우 어울리는.

그거라면 대성공을 거둘 자신이 있었다.

입 달린 인간이라면 이 세계든 저 세계든 그걸 싫어할 리가 없었다.

농민들에게 수확물의 판로를 열어 주고 대신 조금 싼 가격으로 식재료를 얻고.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일 터였다.

그뿐 아니라 축제 때 식당에 일손이 필요하면 농민들을 알바로 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하면 음식 만드는 법을 전수해 줄 수도 있다.

스노브 같은 놈이 또 이런 농간을 부려도 자립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기술 이전료를 살짝 받아 챙기긴 하겠지만.

그전에 신 메뉴들의 특허부터 내야 할까? 제국의 특허 제도가 어떻게 되는….

“아가씨, 준비됐습니다. 가시지요.”

마사가 이런저런 사업 구상에 빠져 있는 알레스를 일깨웠다.

“그래, 기대되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마사에게 부탁해 은밀히 추진해 오던 일이 있었다.

닭고기와 옥수수를 맛있게 먹기 위한 필수 조건!

이 세 가지가 만나 삼합을 이루면 천하에 무너뜨리지 못할 벽은 없으리라.

일전에 황궁에서 치맥이 심히 당기던 날, 혹시나 하고 마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제국에 혹시 맥주라는, 보리로 만든 술이 있냐고.

보리빵이나 보리커피는 있지만 술은 없다는 실망스런 답이 돌아왔다.

특급 유모이자 주당인 마사는 자신이 보리술을 모른다는 사실에 매우 자존심 상해했고, 알레스를 붙잡고 맥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것저것 아는 대로 설명해 주던 알레스는 마사의 저런 열정이면 맥주를 직접 양조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눈치를 보니 귀족들은 와인이니 위스키니 이런저런 좋은 술을 즐기고 있었지만, 서민들이 마시는 술은 딱히 없는 듯했다.

술 대용으로 수상쩍은 재료로 만든 음료를 마시다가 큰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저쪽 세상의 기억을 들춰봤을 때 회사원 양자강이 맥주를 가장 맛있게 마셨을 때는 땀나게 몸을 움직인 직후였다.

한바탕 땀을 쫙 뺀 뒤 들이켜는 맥주의 청량함이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한 농부, 상인, 노동자들이 일과 후 맥주잔을 부딪치며 고단함을 날려 버린다면!

귀족이 아닌 서민들을 상대로 한 장사라도 충분히 대박일 듯싶었다.

알레스는 저쪽 세상에서 수제 맥주 만들기 원 데이 클래스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내 킹카와 잠시 썸 비스무레한 걸 타느라 함께 취미 클래스를 들으러 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고 보니 양자강도 사내 킹카와 잘해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막무가내 직진하던 사내 킹카는 자강이 나름의 트라우마로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사이 어느 날 칼같이 발길을 뚝 끊었다.

그리고 얼마 뒤 회사를 뒤흔든 그의 결혼 소식.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던 날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원 데이 클래스가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을 줄이야.

세상에 쓸데없는 고민은 있어도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더니.

어쨌거나 그때 배운 기억을 더듬어 알레스는 맥주의 재료 네 가지를 생각해 냈다.

물, 효모, 맥아, 홉.

제도의 수질은 나쁘지 않은 편이고.

효모는 마침 우리 상단에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계시니 걱정 없고.

보리는 이곳에도 있는 작물이니 싹을 내 엿기름을 만들면 되고.

홉에 해당하는 이곳 식물도 찾아냈다.

이 모든 걸 넣고 줄창 끓인 후 식혀서 발효되도록 기다리면 끝!

맥주를 만들 적임자도 찾았다.

바로 미래에 제국의 아이돌이 될, 꽃미남 마부들의 부모인 소로 부부가 그들이었다.

보육원을 운영하는 그들에겐 생활비가 많이 필요했지만, 귀족들에게 후원금을 뜯어내는 재주가 통 없었다.

게다가 집안 대대로 생긴 것만 멀쩡한 호구라서 가난을 면치 못했다.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사 형제가 보육원 살림에 보태기 위해 공유 마차의 마부로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이가 많지 않았다.

형제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소속 아티스트의 우환을 해결해 주는 것도 소속사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테니.

물론 나중에 형제들이 잘되면 다 뽑아낼 거지만.

그리하여 지금 알레스는 맥주 매니저인 마사와 호위 기사인 밤비를 대동하고 소로 부부의 보육원인 ‘다정한 릴리 마를렌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만든 맥주가 잘 익었는지 시음하러 가는 길이었다.

정작 자신들은 호사스런 공유 마차가 아닌 작고 비좁은 마차 한 대를 빌려서 말이다.

경차라 마정석도 적게 들고 경제적이란 이유에서였다.

“크, 치킨이랑 팝콘이 완성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알레스가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도 근교 농민들의 닭과 옥수수로 만들려는 음식이 바로 한국식 치킨과 팝콘이었다.

여기에 맥주까지 더해 ‘치맥콘’ 삼합을 완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축제에 치맥콘 삼합이라.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었다.

요리계의 명장이자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신 메뉴를 개발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겼다.

알레스는 저쪽 세상에서 줄곧 먹기만 했던 치킨과 팝콘에 대해 이런저런 귀동냥한 정보까지 더해 헤라클레스에게 설명했다.

이 헤라클레스라는 양반은 다른 일상생활 전반에는 좀 어수룩했으나 요리에 대한 상상력만은 타고난 게 분명했다.

그런 후진 설명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가진 식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지식, 맛에 대한 감각, 주부 9단의 짬밥을 바탕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의 핵심을 금세 파악했다.

그렇게 헤라클레스가 치킨과 팝콘 개발에 착수한 터였으니, 제국에 치맥콘 삼합을 선보일 날이 머지않았다.

마차가 희망 찬 미래를 싣고 막 제도 중심지를 벗어나 근교의 들판을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누군가 길가에 서서 마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레이디, 마차를 세워야겠습니다.”

밤비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알레스는 흠칫했다.

“저분은…?”

“아가씨,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 아니십니까?”

그분이었다.

마차가 서고 문이 열리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아니 카이트가 웬일이세요? 여기 어떻게 계신 거예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강도라도 당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여길요?”

“네.”

“타셔도 상관은 없는데, 저희가 지금 근교의 보육원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거기서 꽤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강연 준비하실 시간도 빠듯한데.”

“난 상관없습니다. 오며가며 강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군요.”

밤비가 얼른 일어나며 알레스의 옆자리를 공작에게 내어 주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전하.”

어제 제가 보낸 기별은 무사히 받으셨군요, 전하.

“오랜만이네, 밤비 경.”

귀띔해 줘서 고맙네, 밤비 경.

“그렇지요. 그동안 통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밤비와 눈빛을 교환한 공작은 좌석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다.

저렴하고 작은 마차를 빌렸더니 공작의 크고 긴 체구가 들어가기에는 마차가 비좁았다.

공작은 알레스를 짓누르지 않도록 넓은 어깨와 긴 다리를 최대한 접고 또 접었다.

“조금 더 이쪽으로 오셔도 됩니다. 너무 불편하시겠어요.”

알레스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닙니다. 여러분께 불편을 끼치게 됐네요.”

그러자 밤비와 마사가 얼른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전하. 불편은 무슨요!”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흐뭇함과 기대가 가득했다.

부담스러워….

알레스와 공작이 동시에 생각했다.

어찌 됐든 마차는 네 사람을 빵빵하게 싣고 보육원을 향해 계속 달렸다.

“강연 준비를 도와주어서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강연회를 수락해 주셔서 저희가 더 기쁜 걸요.”

“강연을 결심할 수 있게 나를 자극해 주어서 고마워요, 알레스.”

“흠흠, 고마우시면 멋진 강연으로 보답해 주세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강연과 관련한 덕담을 나누었다.

“오늘 보육원엔 무슨 일로 가는 겁니까?”

“아, 무슨 일이냐 하면… 저희가 이번 축제를 위해 강연회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축제 음식도 개발하고 있거든요.”

“축제 음식이요?”

“그게… 제도 근교에서 닭을 키우고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민들한테 곤란한 일이 생겨서요….”

알레스는 스노브의 농간으로 농부들이 어려움에 빠진 사정을 공작에게 들려주었다.

스노브의 만행을 뜻있는 귀족들에게 널리 알려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더불어 맥주 양조를 맡기게 된 소로 부부와 지금 가고 있는 보육원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다 듣고 난 공작은 깊어진 파란 눈으로 알레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레스, 당신은 정말….”

공작의 반응이 뭔가 불길하다.

알레스는 자기가 뭐라고 말했나 재빨리 되감기를 해 보았다.

“당신은 정말 따뜻한 사람입니다.”

어어, 또 시작이시네.

그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페레티가의 가풍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군요. 어려움을 겪어도 전혀 훼손되지 않은 마음이라니….”

공작의 감동 어린 눈빛에 알레스는 또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제발, 이상한 오해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전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게다가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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