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너무 다른 두 개의 강연
주제만 딱 들어도 카르티에 공작의 강연에 사람이 더 몰릴 게 자명했다.
‘열두 가지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법.’
‘사교 모임의 여왕으로 만들어 줄 스몰토크의 기술 feat. 첼로 연주.’
너무 다른 색깔, 온도, 습도, 당도를 지닌 두 강연이었다.
“솔직히 카르티에 공작님 쪽이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 같고요.”
마사가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 놓았다.
그러자 아이언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한심하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며 말했다.
“제도는 참 한가한 곳입니다. 재미 같은 소리를 하고.”
마사가 불쾌한 얼굴로 반박하려 했으나 옆에서 밤비가 만류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저건 사람의 탈을 쓴 백상아리입니다. 반박하면 더 흥분하는 변태예요.”
메르세데스에서 온 백상아리가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죽느냐 사느냐가 목전에 닥친 사람들에게 공작 전하의 강연처럼 중요한 알짜 강연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야 스몰토크도 할 수 있는 거지요. 적군한테 칼 맞고 뭣 빠지게 도망가면서 첼로 연주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첼로 줄 뜯어먹는 소리지.”
회색 눈동자를 가라앉힌 채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뭐랄까 그는 다른 의미의 공작빠였다.
맹목적이면서 사나운.
“물론 맞는 말씀이고, 공작 전하의 강연이 중요치 않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생필품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사치품도 필요한 법이죠.”
특급 유모 마사가 지지 않고 따졌다.
백상아리가 이를 조금 드러내고 웃었다.
“제가 보기엔 공작 전하의 강연 내용도 뭐, 부인이 그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재미란 게 나름 있다면 있습니다.”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주제만 가지고 이럴 게 아니라 실제 강연 내용을 한번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밤비가 얼른 아이언스한테서 자료 뭉치를 뺏어 들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부탁할게요, 밤비 경.”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의외로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알레스를 포함한 요원들이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밤비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자료집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성을 지키려면 성벽을 두텁고 높게 해야 하고, 해자와 못은 깊고도 넓어야 하며, 망루를 수리해 놓아야 하고, 방어구들을 예리하게 준비해 놓아야 하며, 땔감과 식량은 석 달 이상 지탱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
“…….”
“관리와 백성이 잘 화합하고, 가신들 중에 공을 세운 사람이 많으며, 영주가 신뢰를 얻는다면 영지민들이 성을 지키는 일을 스스로 즐길 것이다.”
재미는 어디에?
여기까지 읽은 밤비가 고개를 들어 아이언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언스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긴 도입부라 좀 평이합니다. 뒤로 가면 빵빵 터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밤비가 페이지를 넘겨 조금 건너뛰고 읽어 보았다.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현문(縣門)이 있어야 하고, 현문을 내릴 수 있는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현문은 높이가 2엑츠, 폭이 8폰드로 만들되 두 장의 문이 서로 꼭 들어맞아야 한다.”
“…….”
“문짝은 여러 장의 나무를 붙여 만드는데 서로 이어지는 부분을 3밀폰드 정도로 하고, 문짝 위에는 진흙을 바르되 2밀폰드 두께를 넘지 않도록 한다. 참호의 깊이는 1.5엑츠로 하되, 폭은 문짝과 같게 하고….”
재미는 고사하고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읽은 밤비가 다시 건너뛰고 자료를 몇 장 더 넘겼다.
“성벽을 따라 다섯 걸음마다 흙을 담는 포대를 두며 5폰드마다 도끼를 둔다. 긴 도끼는 자루 길이가 8온드바다. 열 걸음마다 긴 낫을 두는데 그 자루 길이는 9온드바다. 어쩌고저쩌고… 열 걸음마다 긴 쇠망치를 두고 세 걸음마다 큰 창을 두는데, 두 개의 창을 마주보게 가지런히 놓아야 하며, 만약 가지런하지 않으면 쓰기가 편리하지 않다….”
밤비가 읽다 말고 자료 뭉치를 조용히 밀어 놓았다.
급속 냉각된 분위기 속에서 아이언스만 어디가 재미있다는 건지 어울리지 않게 호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전하 특유의 꼼꼼함과 집요함이 압권이지 않습니까? 아하하하.”
그를 제외한 요원들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잠시 후 알레스가 탁자를 땅 내리치며 축 처진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받아들입시다. 공작 전하가 갑자기 딴사람이 되실 것도 아니고, 다른 분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성을 지키는 법도 꼭 필요한 내용이긴 하지요.”
“예에… 저희가 전하께 맞춰야지요.”
“자꾸 듣다 보니 재미가 있는 거도 같고요.”
집단 자기 최면의 현장.
불가능한 일에 미련을 갖지 않는 화끈한 집단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겠군요.”
로잘린 황녀가 도도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착 올렸다.
“맞아요. 어디 강연장에 강연 들으러 간답니까.”
예에? 그럼 뭘 들으러 가나요?
또 다른 마이웨이인 황녀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강연자 얼굴 보러 가는 거죠.”
단호하게 해답을 내놓은 로잘린은 선언했다.
“오늘부터 당장 영상 마도구로 카이트 오라버니의 얼굴 클로즈업, 반신상, 전신상부터 촬영해야겠어요. 오라버니 얼굴을 홍보물 여기저기 꽝꽝 박아 넣는 거죠.”
공작을 혼자만 꽁꽁 숨겨놓고 보려던 욕심쟁이 로잘린이었지만 결단을 내리고 나니 통 큰 행보를 보였다.
“전하의 평소 성정으로는 그런 요란한 방식을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검소하고 담박한 걸 좋아하세요.”
시누이 모드로 전환한 밤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황녀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
“전하의 강연 내용이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아이언스도 냉정하게 분석했다.
로잘린은 생각보다 매우 쿨하게 받아들였다.
“나도 지나친 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거쯤은 알고 있어요. 생각해 보니 경들의 말도 틀리지 않아요. 오라버니의 캐릭터를 고려해서 조화롭게 해 보도록 할게요.”
그동안 혼자서 덕질을 해 온 로잘린은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런데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사심을 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성공한 덕후로서 마음이 관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할게요. 홍보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만 만들도록 할게요.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합니다.”
황녀는 결단력 있는 태도로 정리했다.
“첫째, 큐브에 붙일 사진 현수막.”
큐브는 마력이 주입된 천막이었다.
겉모양은 정육면체 각설탕처럼 밋밋하게 생겼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사양에 따라 공간의 크기나 구조, 인테리어가 완전히 달라지는 마법 천막.
축제 강연회에 쓰이는 큐브는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내부 사양은 강연 규모나 강연 주최자의 재력에 따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지만, 외형은 가로, 세로, 높이 각각 3엑츠(약 3미터)로 제한한 것.
이 때문에 겉모양이 똑같이 생긴 큐브들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가 동원됐는데, 로잘린이 말한 사진 현수막은 바로 큐브 외벽에 거는 용도였다.
“둘째, 강연장 주변과 제도 곳곳에 붙일 홍보 포스터. 셋째, 강연 후 사인회 때 나눠 줄 사진엽서.”
로잘린의 검지, 중지, 약지가 모두 세워졌다.
“이 세 가지는 보통 연모인 클럽에서 준비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 결코 생략할 수 없어요. 준비하는 데 도움이 좀 필요한데….”
로잘린이 밤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밤비 경이 남다른 예술 감각을 지녔다고 들었어요. 홍보물 만드는 걸 좀 도와주세요.”
끄응…. 밤비는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고마워요, 밤비 경. 이 홍보물 3종 외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어요. 연모인 클럽의 애정도를 증명할 연심의 꽃, 바로 조공 도시락이죠.”
“그건 또 뭡니까?”
“말하자면 연모인 클럽에서 준비하는 도시락이에요. 그분을 위해 매우 정성 들여 만들죠.”
“공작 전하는 먹는 데 별로 관심이 없으신데요? 단식도 자주 하시고요.”
“아아니, 누가 도시락을 먹는 데 쓰나요?”
“네에? 도시락도 먹는 게 아닙니까? 이번에도 얼굴에다 붙입니까?”
“그게 아니라 애정을 꾹꾹 눌러 담는 용도란 거죠. 최대한 예쁘고 화려하고 또 참신하게 만들어서 오라버니께 응원의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보는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도록.”
“아, 그러니까 인기를 도시락을 통해 과시하는 거군요.”
“바로 그거죠. 한마디로 도시락 퍼포먼스랄까.”
조공 도시락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알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요원들이었다.
“조공 도시락은 여기 요리 명장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죠?”
로잘린의 말을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 정작 당사자만은 당연하게 느끼지 않았다.
“혹, 혹시 저, 저, 저 말씀이십니까?”
헤라클레스가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럼 누구겠어요. 명장의 솜씨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도시락을 선보여 주세요.”
“제가 어떻게 그런….”
그런 오글거리는 걸 만듭니까!
그것도 공작 전하께 드리는,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도시락을!
내가, 내가, 조공 도시락이라니!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혼란 어린 절규가 헤라클레스의 듬직한 거구 안에 메아리 쳤다.
“인재들이 포진해 있으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네요.”
헤라클레스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레스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이번 회의를 통해 알레스가 누구보다 달리 보게 된 사람은 로잘린이었다.
철딱서니 없고 마냥 해맑기만 한 황녀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여 준 냉철한 판단력, 유연한 포용력,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리더십 등은 가히 황제감이라 할 만했다.
물론 공작에 대한 사랑이 일구어 낸 기적일 수도 있지만.
알레스는 황녀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홍보물 제작과 조공 도시락 준비, 큐브 대여와 강연장 꾸미기, 팬 사인회와 책 홍보, 연모인 클럽 관리 등에 관한 논의가 대략 마무리되었다.
알레스는 갑자기 걱정이 됐다.
정작 공작은 강연 준비를 잘하고 있는 건지.
요령 없이 자료를 줄줄줄 읽기만 하는 인간 수면제인 건 아닌지.
저쪽 세상의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좀 전수해 주어야 하는 건 아닌지.
“전하께선 강연 준비를 하고 계실까요?”
“수성에 관해서는 전하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이론과 실전에 모두 능하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이언스의 말에 알레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누가 그런 걸 걱정한답니까.
카르티에의 퍼포먼스와 쇼맨십을 카이트도 좀 배워야 하는데.
‘휴, 바랄 걸 바라야지.’
알레스가 이내 고개를 젓는데, 아이언스가 무심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