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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4화 (54/120)

54화

이번에 팔 물건은

“하지만 카이트, 강연은 일이 너무 크지 않나?”

브린이 마법식을 계산해 보더니 말했다.

“아무리 망각의 베일이 예외를 설정할 수 있는 최고급 마법이라지만 이번엔 예외 범위가 너무 넓어.”

브린이 나름 심각한 얼굴로 걱정하는데,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빙긋이 입꼬리를 올리곤 중얼거렸다.

“예외란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귀여운가?”

브린이 눈을 껌뻑였다.

뭔 헛소리야?

“자네가 아무리 마법 천재라도 마법력을 함부로 낭비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

사소한 일, 예를 들어 일상생활 같은 자잘한 일에 마력을 남용하면 마나가 흐려지고 마력의 질이 떨어졌다.

그래서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이들도 평소엔 마법을 잘 사용하지 않고 아껴 두는 것이다.

마력은 타고나는 면이 크지만 무공처럼 연마가 가능한 힘이기도 했다.

반대로 제대로 연마하지 않거나 남용해서 마력의 질이 떨어지면 고수위 마법을 구현했을 때 디테일이 떨어지거나 구성이 조악해지거나 생동감이 덜해지는 등 부작용이 생겼다.

공작이 평소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웬만한 일은 직접 몸을 써서 해결하려는 덴 이런 이유도 있었다.

“잘 알고 있지.”

“안다면서 어째서 강연을 수락했나? 이래저래 자네답지 않아.”

“나답지 않은 짓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또 뭘 했는데? 잠깐, 설마….”

브린은 책상 위에 있던 <빌보아 차트>를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지난번엔 77위, 이번엔 53위.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지.”

“맞아. 내가 한 거야.”

“하!”

브린이 기가 차서 소리쳤다.

“정말 메르세데스답지 않은 짓을 했네? 자네가 무슨 수를 썼을 거란 짐작은 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지.”

“시험 삼아 조금 해 보았네.”

“왜? 뭐 때문에?”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마스터 현과 가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지금은 알고 계시지. 그리고 브린, 이번 강연은 마력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어째서?”

“이번엔 예외를 설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베일을 벗을 거거든.”

“그 말은….”

“망각의 베일을 완전히 벗어 버리기로 했어.”

브린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베일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력 낭비는 오히려 없지. 아, 강연할 때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사용할 일이 있으려나.”

이보게 친구, 지금 강연이 문제냐고….

“물론 언젠가는 끝을 내야 할 일이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슬슬 전면전인가.

친우와 그 가문의 일이긴 하지만 브린은 자신이 다 가슴이 떨렸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업이 <빌보아 차트> 순위라거나 축제 강연 같은 조금 엉뚱한 일로 스타트를 끊었다는 게 좀 어리둥절한 감이 있지만.

그건 그렇고 <빌보아 차트> 순위는 대체 무슨 상관이람?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은 공작은 정작 태평한 얼굴이었다.

아니, 어째 다른 때보다 나사 하나쯤 빠진 분위기였다.

이러려면 그동안 왜 그리 자신을 괴롭히면서 어렵게 살아온 것인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브린은 짓궂은 심보가 발동했다.

순진한 친우를 한바탕 곯려 주고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그런?

“건어물 공작께서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한 걸 보니 뭔가 있는데? 혹시 레이디 페레티에게 푹 빠지기라도 한 건가?”

뻣뻣한 건어물 공작께서 유독 레이디 페레티에게만 호구 노릇을 하는 거 같단 말이지.

그러나 기대와 달리 공작은 조금도 곤란해 하지 않고 브린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담담한 얼굴이었다.

저 담담함은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알레스는 예외로 해두지.”

기껏 몇 마디 내뱉은 말도 무슨 소린지….

“유일한 예외.”

아까부터 웬 예외 타령이야?

특별히 주의해서 취급해야 하는 별종이란 건가?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독종?

면죄권 돌려막기를 하던 날 식겁한 기억이 있는 브린 황자는 알레스에게 앙심이 남아 있었다.

“유일한 예외, 괜찮네.”

공작은 제가 말해 놓고 흡족한지 빙긋이 웃었다.

브린은 그 모습을 보고 퍼뜩 이상한 느낌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참, 알레스가 자넬 찾아왔던가?”

“물론이지. 레이디 예외께서 강연회 때 책을 홍보하자더군. 사인회도 하고.”

“부지런히도 움직였네. 꼭 작은 다람쥐 같지 않아?”

이번엔 다람쥐? 방금은 예외라더니.

레이디 페레티를 다른 무언가로 규정하는 데 재미 들린 건가?

도토리를 양 볼이 미어터지게 모아다가 구멍 속에 꽁꽁 숨겨 놓는 욕심 사나운 면이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안물안궁인데.

그보다… 레이디 예외가 강연회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고 레이디 다람쥐 자체가 궁금한 건가!

“카이트, 정말 강연을 하고 싶은 거 맞지?”

“그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가 가진 걸 나눠야지.”

돈 욕심은 별로 없지만 명예욕은 적지 않은 브린이었다.

황실 출판국은 재미없고 안 팔리는 고리타분한 책만 출간한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기회일까?

저자들도 황실 출판국에서 출간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였다.

공작의 책을 알리는 것은 물론, 황실 출판국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황실의 후원금이나 도서관, 황실 산하기관 납품으로 연명하는 게 아니라 진짜 독자가 있는 시장에서 진검승부를 펼쳐 보리라.

이렇게 강연회 준비에 가담하게 된 브린이었다.

* * *

“메르세데스의 행정관이자 이번에 공작 전하의 강연을 보좌하는 임시 비서로 파견된 아이언스입니다. 제도에 도착하자마자 회의를 시작하니 좋군요.”

메르세데스령의 설산을 닮은 은빛 머리칼, 기분을 파악할 수 없는 회색 눈동자.

메르세데스에서 보낸 강연 준비 요원이었다.

“환영해요, 아이언스 경. 하필이면 회의를 시작하려는 타이밍에 왔네요. 이번은 쉬고 다음번부터 합류해도 돼요.”

얼음 조각상 같은 남자를 향해 알레스가 말했다.

“아닙니다, 레이디. 매우 적절한 시기에 도착했다고 사료됩니다만.”

“그, 그래요? 참, 밤비 경과는 잘 아는 사이겠어요?”

“잘 알다마다요. 오랜만이군, 밤비. 그동안 잘 지낸 거 같군. 살이 좀 붙었네.”

인사를 받는 밤비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오랜만이네요, 아이언스 경. 성에 계신 분들은 모두 안녕하시지요? 영지민들도 평안하고요.”

간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냉랭한 게,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 보다.

‘하긴 아이언스가 풍기는 분위기가 친한 사람 있기도 힘들게 생겨 먹었어.’

페레티가 사람들이 그를 힐끔대며 생각했다.

사실 밤비도 조금 그렇고, 북부 사람들이 대개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없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이언스는 뭔가 싸늘하고 시니컬한 분위기가 있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뻣뻣하게 마르다 못해 살짝 뒤틀린 느낌?

아무래도 행정관이라 직업상 깐깐하고 딱딱한 면이 더 두드러진 게 아닌가 짐작할 뿐.

“영지는 죽 평온했다가 최근에 한바탕 시끄러웠지.”

“왜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밤비가 금세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시끄러울 일은 하나밖에 없지. 우리 공작 전하가 제도에서 첫 강연을 하신다는데 영지민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아아….”

안 봐도 뻔했다.

영지민들이 전부 설산에 깃들어 있다는 울랍 신에게 치성을 드리며 우리 공작 전하의 강연 성공을 기원했겠지?

집집마다 빨간 열매가 송알송알 달린 남천 가지와 측백나무를 매달았을 테고.

전하가 제도로 떠나던 날은 모두 길에 몰려나와 눈물콧물을 찍어내며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듯, 시험장에 자식을 보내듯 애잔한 눈빛으로 우리 공작 전하 가시는 길을 축복했을 테고.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밤비 경의 머릿속에 펼쳐진 광경과 아이언스가 간단히 설명한 그날의 풍경은 일치했다.

영지민 집착에 익숙하지 않은 타 지역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침 더한 분이 행차했다.

“로잘린 황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결의로 가득한 얼굴로 로잘린 황녀가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황녀님이 친히 연모인 클럽을 이끌어 주시기로 했습니다.”

알레스의 소개에 마사와 밤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축제 강연의 최강자인 카르티에 공작의 강연회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강연장 단장이라든가 강연 홍보, 또 강연 분위기 형성에 연모인 클럽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알레스가 황녀를 초빙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런 일에 황녀님의 열정을 따를 만한 분이 없기에….”

또한 로잘린 본인이 공작 곁에서 밀착 관리를 해야 한다고 방방 뛰기도 했고.

공작이 공식적인 행사에 노출되는 걸 최대한 막고 싶었던 로잘린이지만, 기왕 강연이 결정되었다면 누구보다 근거리에서 공작을 지켜내야만 했다.

그라는 보석을 숨겨 두고 나만 그 매력을 맛보려 했거늘.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다!

빠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정갈하고도 높게 묶어 올린 포니테일이 황녀의 결의를 말해 주었다.

“그럼 강연 지원 요원이 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알레스가 개회를 선언했다.

“우선 강연을 지원하려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누구보다 강연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알레스가 좌중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 물건을 팔겠다면서 자기가 파는 게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작부터 정신 상태가 글러 먹은 것이지요.”

회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의 강연 내용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모두 함께 숙지해 보도록 하지요.”

알레스가 아이언스에게 눈짓을 했다.

아이언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료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열두 가지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법, 이것이 강연 주제입니다.”

“…….”

다른 요원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대중성, 오락성은 쫙 빼고 실용성만으로 똘똘 뭉쳐놓은 건어물 같은 강연.

아직 주제밖에 듣지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알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내용으로 손님을 끌 수 있을까요?”

아이언스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말했다.

“메르세데스는 수성(守城)의 명문가입니다.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권위와 노하우를 쌓아 왔습니다. 영주, 참모, 기사, 지휘관 지망생 등 군사와 관련된 이들은 반드시 들으려 할 희소가치 높은 내용입니다.”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울상이 됐다.

여보세요, 메르세데스의 쇠꼬챙이님.

누가 요즘 강연을 실용적인 필요에서만 듣습니까?

감성, 재미, 공감 몰라요, 몰라?

다들 난감해 하는데 할 말은 하고 사는 황녀 로잘린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런 지루한 걸 누가 들어요?”

황녀의 말에 아이언스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알레스 언니! 카르티에 공작의 강연 내용이 뭔지 알고 있죠?”

알레스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조사를 마쳤다.

“첼로 연주와 함께하는, 당신을 사교 모임의 여왕으로 만들어 줄 스몰토크의 기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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