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메르세데스도 벗기로 하다
“강연회?”
카르티에의 눈동자가 모처럼 또렷해졌다.
“네, 축제 때 저희도 강연을 할까 합니다.”
“레이디, 레이디,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이제 강연회까지 접수하겠다고요?”
카르티에 공작은 알레스의 배포에 그야말로 크게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날 이렇게 간 떨어지게 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한발 늦게 사태를 파악한 알레스가 카르티에의 감탄 어린 눈빛을 떼어내며 해명했다.
“제가 한다는 게 아니고요. 저희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요.”
“아….”
“지금까지 한 번도 강연을 하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카르티에 전하께서 이 방면의 톱클래스라고 들어서 어떻게 노하우를 좀 배워갈까 해서 왔는데….”
“왔는데?”
“소용없는 일인 거 같아 마음을 접었습니다. 어차피 두 분은 너무나 다르시고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비교할 필요도 따라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이 있지요.
굳이 맞붙어서 좋을 게 없다면 멀찍이 떨어져 각자 살길 도모하면서 남의 영역 침범하지 맙시다잉.
알레스의 말에 카르티에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카이트, 그 도도한 은둔자가 강연회를 한다. 그건 그거대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군요. 그런데 저희, 메르세데스 공작이요?”
“아, 공작 전하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고객이시죠. 매우 중요한.”
“흐음, 레이디는 정말 재밌는 일을 많이 벌이십니다. 저도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인데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군요.”
흥, 밥줄과 명줄이 달린 일이구만, 재미는 무슨!
“여하튼 그 은둔형 금욕주의자가 제도 한복판에서 대중 강연을 하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습니다.”
“좋아하실 때가 아닐 걸요? 전하의 인기를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긴장하시라고요.”
“하하, 고대하는 바입니다. 승부의 상대가 자신밖에 없는 건 매우 김새는 일이지요. 레이디가 그걸 해내면 내가 한턱 크게 쏘지요.”
허어, 느긋하시네? 자신만만이란 건가?
알레스의 입이 조금 앞으로 나왔다.
“참, 전하 빽으로 강연 표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그 표가 그렇게 구하기 힘들다던데. 너무나 훌륭한 강연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저도 꼭 한번 듣고 싶어서요.”
알레스의 청탁에 카르티에 공작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초대권은 주지도 받지도 않습니다. 정당하게 표를 사신 분께 누가 되고 강연 생태계를 파괴하니까요.”
* * *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메르세데스 공작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마스터 현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드릴 말씀이 있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고 지낸 15년 동안 줄곧 그러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결의에 찬 얼굴로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올 것이 온 건가.’
마스터 현은 속으로 긴장을 삼켰다.
“전하, 말씀하십시오.”
“겨울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한 일주일 정도 제도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위중한 일이십니까?”
“…축제에 다녀올까 합니다.”
“…….”
축제, 축제라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다 큰 제자의 귀를 잡아당기거나 등짝을 후려칠 수도 없고.
물론 어렸을 때도 털끝 하나 손댄 적은 없지만.
마스터 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공작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비행을 일삼았다.
사람은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건 이르든 늦든 언제 겪어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천하의 누구라도 건너뛸 수 없는 것들.
어떤 이는 그걸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은 평생 떨어야 할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대부분은 철없는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 때 지랄의 대부분을 소진한다.
문제는 지랄을 떨어야 할 때 떨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 버린 인간이다.
더욱 심각한 건 그 인간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경우라고 한다.
예를 들어 황제라든가 고위 귀족이라든가 소드 마스터라든가 대마법사라든가 대신관이라든가.
그들이 쥔 비뚤어진 권력욕과 늦깎이 지랄이 만나면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이 태어나는 것이다.
공작에게도 어쩌면 너무 늦게 온 건지도 몰랐다.
물론 공작은 스스로 자신을 박제해 버린 거지만.
너무나 어린 나이에.
마스터 현은 아홉 살의 소공작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15년 전, 어쩌면 뒤늦게 지랄발광을 하게 된 어떤 사악한 인간들 때문에 뜻하지 않은 비극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아직 어린 후계자에 불과했던 소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희생을 감수했던 것 같다.
‘것 같다’고 표현한 건 마스터 현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소년은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에 관해 투정 한번 부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현은 오래된 사술과 저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 사술은 원래 주변 사람을 먼저 파괴하고 종국엔 스스로를 망치는 저주를 발화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지로 저주가 정반대로 작용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최근에야 저주의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그렇다. 모두 ‘것 같았다’로, 마스터 현의 짐작일 뿐이었다.
여하튼 너무 어릴 때 철이 들어 버린, 어린 시절이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한 제자가 이제 평범한 남자로 돌아간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는 헷갈렸다.
지금껏 자신을 죽이며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결연히 드러낸 욕망이 ‘축제에 가고 싶다’는 것이라니.
“혹시 또 그 페… 어쩌고 하는 레이디 때문입니까?”
동방에서 온 스승은 유독 제국식 이름에 약했다.
이곳에 정착한 지 15년이 넘었는데도 먼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가신들의 성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이곳 귀족의 이름 따위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기 때문이라고 역정만 낼 뿐.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입니다.”
“여하튼 그 레이디 때문입니까?”
“…예.”
이런! 혹시나 해서 찔러 본 거였는데.
어찌 그리 뻔한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실망하셨습니까?”
공작이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마스터 현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은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는 일단 치밀어 오르는 것을 한 번 참았다.
“알레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 축제 때 강연을 해 볼까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강연? 제도에서 강연회를 열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마스터 현의 표정도 비장해졌다.
“그렇다는 건 망각의 베일을 완전히 벗겠다는 뜻입니까?”
“네, 그러려고 합니다.”
공작의 단호한 대답에 마스터 현은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맞습니다. 언제까지고 숨어 살 수는 없지요. 이제 세상에 나설 때도 됐습니다. 응징할 때도 됐고요.”
“실은, 최근에 조금씩 베일을 벗는 연습을 해 봤습니다. 스승님께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망각의 베일이야 원래 부분적인 예외를 설정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닙니까. 그동안도 몇 차례… 잠깐, 그것도 그 레이디 때문입니까?”
“…예.”
“…….”
또 혹시나 해서 찔러 본 거였는데.
너 정말 왜 이러니!
마스터 현이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하지만 제도에서 강연회를 한다는 건 지금까지 망각의 베일에 소수의 예외를 허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 되겠지요.”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베일을 벗기 위해 첫발을 떼는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예, 스승님.”
“지금이 정말로 그때라고 생각하십니까?”
“…….”
공작의 심해 같은 눈이 자신의 내면을 향했다.
“…예,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마스터 현이 공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공작도 똑같이 스승에게 허리를 숙였다.
“참, 강연 주제는 수성법(守城法), 성을 지키는 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 메르세데스 가문이 쌓아 온 가장 큰 노하우가 그것이고, 또 스승님께 그간 배워 온 것도 그것이니까요.”
“수성법이라, 정말 추억 돋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고향에서 강연을 꽤 했지요. 그러고 보니 딱 전하 나이 때였던 거 같습니다.”
마스터 현은 흐뭇한 얼굴로 추억에 잠겼다.
“망각의 베일을 벗는다면 저희 가신들도 준비를 해 두어야겠군요. 강연 준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알레스와 밤비 경, 그리고 페레티가 사람들이 도와줄 겁니다. 책에 관해서는 브린과도 의논할 거고요.”
페레티, 페레티… 그러고 보니 이런 성을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는 생각이 마스터 현의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메르세데스 사람 한 명 정도는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언스 경을 강연 보좌관으로 붙이겠습니다.”
공작이 방을 나서자 마스터 현이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불렀다.
호출을 받고 온 이는 행정관 중 하나였다.
“공작 전하가 제도에서 강연을 하실 걸세. 보좌관이 한 사람 필요한데, 행정부에서 백상아리 좀 빌려야겠네.”
* * *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카이트가 맞아?”
“보다시피.”
“설마 했는데 정말로 온 거야? 정말로 축제 때 강연을 한다고?”
“국경은 뵈커 단장과 스승님께 부탁드리고 왔어. 설인족 명절이라 며칠간은 잠잠할 거야.”
브린 황자는 믿기지 않아 눈을 껌뻑였다.
안 그래도 어제 느닷없이 자신의 사무실 겸 놀이터 겸 숙소인 아네모네 저택으로 레이디 페레티가 찾아와서는 강연 얘기를 하고 갔다.
강연장 앞에 책을 진열해 팔기도 하고 홍보도 하고, 강연이 끝나고 팬 사인회 같은 걸 하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브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다 좋은데 카이트가 강연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그동안도 신간을 낼 때마다 독자 사인회라도 하자고 얼마나 꼬드겼는지 모른다.
남들처럼 출간 기념 파티나 팬 미팅까진 못 해도 말이다.
물론 카이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타협을 본 게 사인본을 만들거나 자필 금언 두루마리 같은 독자 선물을 준비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강연? 가앙여언?
강연을 들으러 가자고 해도 싫어할 마당에, 연사가 돼서 청중 앞에 나선다고?
턱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카이트가 나타났다.
그것도 축제 때 정말로 강연을 하겠다고.
“이번에도 레이디 페레티가 바람을 넣은 건가?”
“알레스가 강하게 권유하긴 했지.”
“정말 대단한 레이디이긴 하군. 천하의 고집쟁이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다니.”
정말이지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여자군.
대체 저 건어물을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
브린은 당연히 강연 수익에 눈이 먼 알레스가 감언이설로 카이트를 꾀어냈을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암튼 무서운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