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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2화 (52/120)

52화

카르티에의 맨살을 보다

우편물 수거 시간인 오후 2시 전.

공작에게 쓴 편지를 무사히 우편함에 집어넣은 알레스는 방으로 돌아와 눈사람을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축제 준비를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과 담판 지을 일들….

더불어 눈사람 그리기도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끼악, 끼아악!”

오늘도 어김없이 울리는 까마귀 소리.

제도 최고의 번화가 비에커가에 사는 주민이나 상점 주인들은 카르티에 알람을 강제로 누리고 있었다.

누리는 건지, 견디는 건지….

“영애들이 까마귀 소리를 낸다는 건 거리에 카르티에 공작이 떴단 얘기고, 그렇단 건 오후 3시란 얘기.”

알레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2층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카르티에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거리 구석구석에서 울먹이는 영애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걷는 길은 런웨이가 되고 그가 하는 몸짓은 환상의 퍼포먼스가 됐다.

나른한 표정과 눈빛에선 퇴폐미가 줄줄 흘렀지만, 알레스는 저게 다 꽉 짜인 연출이란 걸 알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거르지 않고 같은 시각에 같은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

굉장한 자기 관리였다.

‘정말 피곤하게 산다.’

알레스는 빈틈없이 완벽한 카르티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오후 4시 40분, 알레스는 카르티에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빈틈없이 완벽한 카르티에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서둘렀더니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다.

약속보다 일찍 방문하는 것도 예법에 어긋난 일인지라, 알레스는 눈치를 보며 하녀가 내어 준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기왕 여기 온 김에 저택의 한쪽을 뻔뻔하게 차지하고 있는 공유 마차 주차장이나 한번 둘러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자신이 홀짝이고 있는 커피 잔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뱀인지 물고기인지 비늘이 가득한 괴물이 아름답게 상감된 잔이었다.

밤비 경의 심플 모던한 작품과는 또 다른 예술적 경지가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알레스가 앉아 있는 이 응접실만 해도 곳곳에 진귀한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카르티에 공작의 취향은 엘레강스하면서도 클래식한 쪽인지, 화려한 문양을 우아하고 고상한 색으로 표현한 물건이 많았다.

밖에서 본 저택도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내부는 더 볼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도 있으니 여기 고용인에게 저택 구경이나 좀 시켜 달라고 해볼까.

알레스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데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퐁퐁퐁? 또옥또옥?

차박차박? 졸졸졸?

언젠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면서도 이런 저택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알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늘 괴물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듯한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마치 수맥을 찾는 사람처럼.

‘수맥? 아 맞다!’

어디서 들어본 소리인가 했더니 동굴이나 대중목욕탕 같은 데서 들어본 소린데?

소리를 따라가 보니 널찍한 응접실 한구석에 작은 문 하나가 있는 게 보였다.

아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문은 아니었다.

딱히 비밀스럽게 숨겨진 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해 보이는 문이었다.

그러니까, 비밀 문이 아니니까, 심심하기도 하니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살짝 열어 봐도 되겠지?’

알레스는 매우 단순하게 생긴 문의 평범한 문고리를 살그머니 돌렸다.

그러나 문 너머에는.

평범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전혀 생각지 못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알레스는 헉 하고 짧은 숨을 삼켰다.

거대한 방이 온통 물이었다.

좌우로 깊고 긴 수조가 이어져 있었고, 가장자리가 우아하게 조각된 수조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도 통로 사이사이로 성인 허리 깊이의 물이 넘실거렸다.

물에 비친 붉고 노란 등불이 잔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한쪽 벽면을 타고 인공 폭포 같은 것도 쏟아지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한마디로 몽환적이고 흥건한 느낌의 방이었다.

‘이 방 뭔가 질척질척한 게 기분이 이상해.’

그러면서도 알레스는 등 뒤로 문을 닫고는 홀린 듯이 한 발 한 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알레스는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그렇지, 어찌 보면 진귀하고 환상적인 방이라 할 수도 있겠다고.

‘괜히 붉은 물보라의 매혹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구나.’

황궁에서도 잠깐 살아 봤지만 거기도 이런 데는 없었다.

저쪽 세상에서도 이쪽 세상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알레스는 멋대로 남의 집을 쏘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열심히 구경했다.

더 이상한 게 나올까 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알레스의 이 무례한 행진에도 곧 빨간 불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다른 문 열리는 소리가 난 것.

알레스는 순간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안락의자 뒤에 엎어지듯 몸을 숨겼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돼’라고 생각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비호처럼 움직였다.

지난번 황궁에서도 괜히 진열대 아래 숨었다가 황제에게 더 큰 망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부담스럽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 되면 쥐구멍으로 숨어 버리는 게 버릇인가.

괜히 으슥한 곳에 숨어서 훔쳐보는 더 괴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열린 문으로는 카르티에 공작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물이 넘실거리는 통로를 역시 런웨이인 양 거침없이 걸으며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인공 폭포 아래로 직행.

뇌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훅 들어온 상황에 알레스는 눈 돌릴 새도 없이 꼼짝없이 다 봐 버리고 말았다.

알레스의 동공이 한 발 늦게 지진을 일으켰다.

사태를 인지하고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알레스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어? 알레스는 다시 목을 길게 빼고 카르티에를 바라보았다.

폭포수 아래 카르티에의 뒤태가 장관이었다.

목 뒤에서부터 발목까지 몸을 따라 청룡 한 마리가 승천할 듯 꿈틀거렸다.

드래곤이 아니라 분명 푸른 비늘이 잔뜩 박힌 동양풍의 용이었다.

방금 봤을 땐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저 문신은 대체 언제 생겨난 거람?

‘아름답다!’

알레스가 홀린 듯이 입을 벙긋거렸다.

물론 문신 얘기다.

‘아니, 지금 한가로이 동양화 품평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알레스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샤워를 마치고 주요 부위에 천을 두른 공작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감상 그만하고 나오시지요, 레이디.”

알레스는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죽였다.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들었는데,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레이디 페레티.”

끄응, 나 맞구나….

알레스는 어쩔 수 없이 안락의자 뒤에서 쭈뼛쭈뼛 기어 나왔다.

“훔쳐봐서 죄송합니다. 아니, 훔쳐본 게 아니라… 신기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변명하던 알레스가 결국 고개를 조아렸다.

“거의 못 봤습니다.”

알레스가 구차하게 덧붙였다.

느긋한 미소를 띤 채 알레스의 사과에 고개를 끄덕이던 공작이 심상하게 말했다.

“뭐, 괜찮습니다. 자신 있으니까.”

아하, 자신이 있으시군요….

자신 있으면 봐도 되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카르티에의 쌩얼은 평소와는 퍽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풋풋하달까, 수더분해 보인달까.

심지어 건전하고 착실한 청년 같아 보이기까지?

“그런데요, 신기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전하의 그 문신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건가요?”

알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땀나는 상황에서도 궁금증을 떨치지 못할 만큼 신기한 모습이기는 했다.

‘거의 못 봤다더니, 샅샅이 다 봤군.’

카르티에가 빙긋이 웃으며 설명했다.

“역시 레이디는 안목이 있으시군요. 이건 보통 문신이 아니라 물이 닿으면 나타나는 문신입니다. 동방과 서역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전설의 타투이스트, 떠돌이 문신사가 새긴 겁니다.”

“와….”

“내가 알기로 이런 문신을 한 사람은 세상에 딱 셋이라고 합니다. 궁금증이 좀 해소되었나요?”

실은 공작도 무척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게, 달갑지 않은 상황일 텐데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어쩐지.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모습이 예사 솜씨가 아니었어요.”

알레스도 답례로 아낌없이 칭찬을 바쳤다.

“그렇습니까. 그럼 물이 마르기 전에 한 번 더 보시겠습니까?”

알레스가 말릴 틈도 없이 카르티에가 친히 뒤돌아서 주었다.

허리 아래 두른 천 때문에 그림이 중간에 끊어졌지만, 흘끔 봐도 명작이었다.

물론 문신 얘기다.

“이제 충분히 봤습니다. 옷을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다 감기 걸리세요.”

무단 가택 침입자 주제에 퍽이나 생각해 주는 척하는 알레스였다.

처음의 응접실에서 알레스는 다시 멀끔해진 카르티에와 마주앉았다.

“내 집을 염탐하러 온 밀정이 아니시라면,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제국에서 가장 바쁘신 레이디께서.”

공작이 짓궂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아, 그동안 주차장이며 커피며 또 신문 광고며 저희 페레티 공유 마차를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좋은 기자도 소개해 주시고 인터뷰도 응해 주시고요. 감사 인사가 미흡했던 거 같아서요.”

“하긴 그 기사 나가고 한동안 결혼하고 싶어서 발정 난 수컷 취급을 좀 받았지요.”

“흠흠, 기사가 좀 과장된 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어차피 곧 성혼도 하시고 후손도 보실 거니 조금 먼저 축하 받으셨다고 생각하셔요.”

“후후, 나보다 먼저 축하 받아야 할 분들이 있어서요. 난 좀 천천히 받겠습니다.”

“여하튼 이래저래 성가시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뭐 사과를 두 번씩이나. 내게도 다 이득이 되는 면이 있으니 움직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선수끼리 다 아시면서.”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얻은 게 더 많지요. 전하께서야 굳이 이 일에 나서지 않으셔도 아쉬운 게 없는 분 아닙니까.”

“아쉬운 건 없어도 그리운 건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요? 나는 마음의 교류를 원한다고.”

“아, 예….”

무슨 소린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레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방에다 온통 물을 채워 두신 걸 보면요?”

“아, 난 물 계열입니다.”

“네?”

“마법력이요. 몸이 마르는 걸 싫어해서.”

아, 마법. 알레스가 책에서 본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 고위 귀족들은 마법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지?

언젠가 카이트도 본인의 마법 실력이 꽤 좋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카이트는 어떤 마법력을 가지고 있을까?

“메르세데스는 불 계열입니다.”

카르티에가 마치 알레스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푸른 불꽃….”

“그건 그렇고. 그게 정말 다입니까? 나를 찾아온 이유가?”

카르티에가 또 눈을 요상하게 뜨며 물었다.

“음, 실은….”

방금 전 공작의 꾸밈없는 알몸을 봐서 그런가, 어설픈 염탐은 집어 치우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터놓고 싶어졌다.

“실은 밀정은 밀정인데 저택이 아니라 다른 걸 염탐하러 왔습니다.”

“호오.”

카르티에가 아주 구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축제 강연회 준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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