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축제가 시작되었다
스토커 남작은 처음 공유 마차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유독 마법식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 되긴 할 텐데, 정말 가능한 겁니까?”
지금 제국의 마차는 마차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말이 ‘끄는’ 탈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말이 ‘달린’ 탈것이랄까.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동물 학대가 매우 저급하고 품위 없는 행위로 간주되면서 선황 프란시스 12년에 ‘말들에게 자유를’ 운동이 거세게 번져 나갔다.
그때 제국의 마차들, 특히 귀족들이 소유한 고급 마차는 거의 마정석을 연료로 움직이도록 개조되었다.
말은 한마디로 보기 좋으라고 달아놓은 장식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정석이 매우 고가였다.
원래는 마법력을 증폭시키거나 의료용으로 쓰이는 희귀 물질이니 고가일 수밖에 없었다.
연료로 쓰는 마정석은 비교적 등급이 낮은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귀족들이야 품위 유지비로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꿈도 못 꿀 돈이었다.
게다가 마정석을 연료로 태울 때 생기는 부산물은 환경에도 인체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레이디 페레티가 공유 마차를 마정석이 아닌 마법식으로 움직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꺼내 놓는 게 아닌가.
마차를 말이 아닌 마정석으로 움직이게 되기까지 실은 엄청난 암투와 로비전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스토커 남작으로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레이디 페레티가 뭘 믿고 장담하는 건지.
사실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도 코가 석 자일 형편일 텐데.
그렇지만 그녀는 왠지 해낼 것만 같았다.
기자 10년차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레이디 페레티는 참 재미있는 귀부인이었다.
돈에 눈이 먼 사람처럼 굴다가도 세상이나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아이디어를 불쑥 내놓곤 했으니까.
“남작님은 마법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아, 저야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많지요.”
“기자로서 매우 유리한 소양이네요.”
“그런가요, 하하.”
그는 웃을 때도 그렇고 말할 때도 그렇고, 목소리의 울림이 좋은 편이었다.
처음엔 매서워 보이던 눈도 점점 초롱초롱해 보이고, 얍삽하고 비열해 보이던 인상도 서글서글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익어서 그런가.
점점 더 악명 높은 기레기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카르티에 공작이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다닐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닌데….
역시 본심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게 스토커 남작의 유능함인 걸까?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란 걸 모르는 알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가을 축제도 잊으시면 안 되죠. 공유 마차도 축제 시즌에 어울리는 패키지 상품을 내놓으시겠죠?”
“아, 축제요….”
제국의 축제.
그때 황실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서 얼핏 본 기억밖에….
“제가 꽤 최근까지 시골집에만 처박혀 있고 밖으로 통 나가지 않아서요. 그 축제란 거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예? 레이디께서 모르신다고요? 의외인데요?”
“제가 마냥 곱게만 자라서 보기보다 세상물정에 어둡답니다, 호호.”
“아… 그러시군요. 하긴 서민적인 축제라 귀족들 사이에선 관심이 덜할 수 있지요.”
제국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축제의 이름은 ‘해와 달의 입맞춤’.
말 그대로 그해의 수확을 축하하며 해 뜨는 아침부터 달 뜨는 밤까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거라나.
마지막 날은 키스 데이라고, 해와 달이 입맞춤하는 시간인 석양에 청춘남녀가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도 있단다.
‘귀엽네. 우리도 키스 데이를 겨냥한 공유 마차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려나?’
축제는 7일간 이어진다고 했다.
6개월에 이르는 제도 귀족들의 사교 시즌에 비하면 매우 짧은 편이었다.
여기까진 축제 하면 대충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해달입 축제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강연회죠.”
“강연회?”
“원래는 귀족들이 가문의 사상이나 비법 같은 걸 공개하던 유서 깊은 행사였지요. 하지만 요즘은 뭐랄까, 유명 인사와 그들을 연모하는 이들을 위한 북새통으로 변질되었달까요.”
흐음, 팬 미팅, 팬 사인회 같은 분위기인가?
“그래도 인기 귀족의 강연엔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게 사실입니다. 아, 카르티에 공 같은 경우는 강연 입장료가 꽤 고가인데도 표가 없어서 못 산답니다.”
“아, 무료 강연이 아니에요?”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 무료 강연도 있고, 강연은 무료지만 대신 저서나 기념품 등을 팔기도 하고요. 애초에 수익을 목적으로 유료 강연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카르티에는 마지막 경우겠군. 그 여우.
“카르티에 공의 강연은 매표 시작 몇 분 만에 전석 매진되는 걸로 유명하지요. 매표일 하루 전부터 온 가문의 고용인들과 암표꾼들이 총출동해 길고 긴 줄을 만듭니다. 아주 장관이죠.”
티켓은 얼마고 암표는 또 얼마에 거래되려나?
알레스는 괜히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카르티에 공작은 뭘 하든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강연회 때도 카르티에 공의 일거수일투족이 제국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하지요.”
조사도 할 겸 한번 들어봐야 하나? 공짜 표 얻긴 힘들겠지?
초대권 왕창 받아서 몇 배로 비싸게 팔아먹으면 좋겠다.
“강연회 당일엔 표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강연장 밖에 진을 칩니다. 몰래 들어가려다 붙잡히는 이들도 있어요.”
“열기가 보통이 아니네요.”
“말도 마세요. 작년엔 일명 ‘개구멍 영애 사건’으로 사교계가 한바탕 뒤집어지지 않았겠어요.”
“개구멍 영애 사건?”
“명문가인 샤도네 백작가 세 자매가 체면도 잊고 낮은 포복으로 몰래 강연장에 들어가려다 덜미를 잡힌 사건입니다.”
“저런, 딱해라. 귀족끼리도 은근히 경쟁이 되겠어요.”
“그렇고말고요. 일 년 내내 강연회 준비를 하는 가문도 있습니다. 카르티에 공의 경우는 강연회만 준비하는 인원이 따로 있고 그 수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르티에는 최고만 보여 주니까.
나른한 척 퇴폐미를 풍겨도 일에선 철저한 완벽주의자야.
얄미워도 자본주의 세계에서 배울 건 많은 인간이야.
“그뿐이 아닙니다. 강연회 준비는 강연자만 하는 게 아니랍니다. 아마 제도 전체 연모인 클럽의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할걸요.”
“연모인 클럽이라면 푸른 불꽃의 고결, 붉은 물보라의 매혹 같은 델 말하는 거죠?”
“네. 혹시… 레이디 페레티도 어디 소속이신가요?”
스토커 남작이 멈칫 긴장해서는 물었다.
“아, 아니에요.”
“휴, 그러시군요. 붉은 물보라의 매혹처럼 규모가 큰 데는 연중으로 준비 위원회가 가동된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팬클럽 페스티벌 같은 거구만.
우리 오빠 수발 조공 규모와 수준을 만방에 자랑하는.
스타워즈 급 충돌이 예상되는군.
“와, 보통 일이 아니네. 가문 간에도, 연모인 클럽 간에도 신경전이 대단하겠어요. 인기도를 널리 증명하는 기회인만큼, 특히 빌보아 차트 순위권에 있는 귀족들은 예민해지겠는데요?”
알레스의 물음에 스토커 남작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이 강연회의 가장 큰 후원처가 어딘지 아세요? 바로 빌보아 차트를 발행하는 빌보아 사랍니다.”
“그렇군요!”
아하, 알았다, 알았어.
그냥 심심해서 하는 강연회가 아니구나.
가문의 명예를 걸고 죽자 사자 덤비는 이유가 있었네.
‘이런, 나도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메르세데스 공작이 <빌보아 차트>에 진입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번 축제 때 공작을 띄우는 데 매니지먼트사의 사활을 걸어야 해!
도덕책 공작도 강연이라면 좀 하지 않겠어?
이참에 그 무지 재미없어 보이는 책도 싹 팔고!
그동안 한 일이 거의 없어서 공작 고객님 보기가 좀 민망했는데, 드디어 매니저다운 일을 해 보는 거야!
알레스는 귀찮음과 싸워 가며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욕 충만, 전투력 상승.
이 여세를 몰아서 연애 타령이나 하는 팔자 좋은 인간들에게 철퇴를 가하리라.
다들 아주 나사가 빠져 갖고는.
다 죽었어.
“그나저나 이번 축제는 기분이나 제대로 나려나.”
실컷 신나서 설명하던 스토커 남작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알레스가 묻자 남작은 기대에 찬 얼굴로 무릎을 탁 쳤다.
“아, 실례가 안 된다면 레이디께 조언을 좀 구해도 될지요?”
“얼마든지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스토커는 다시 눈을 초롱거리면서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페레티라면 농부들에게 도움이 될 아이디어를 내놓을지 모르잖아?
“제도 근교에 저희 스토커가 소유의 자그마한 컨트리 하우스가 있습니다. 제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고 지금도 종종 쉬러 가는데, 요즘 그 일대 농부들이 울상이에요.”
“농사를 망쳤나요?”
“아니요, 오히려 농사는 그럭저럭 잘됐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헐값에 들여온 농산물 때문에 갑자기 판로가 막혔답니다.”
“저런.”
“대부분 양계와 옥수수 농사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하필 외국에서 들여온 게 닭과 옥수수예요.”
“닭이나 옥수수 공급이 부족했나요? 닭 값이랑 옥수수 값이 올랐던가?”
“전혀요. 제도 근교의 농가가 전부 닭 아니면 옥수수 농가라 가장 싸고 만만한 식재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럼 국가 정책이 잘못됐네요. 부족하거나 없는 걸 외국에서 들여와야지. 멀쩡하게 남아도는 걸 왜 또 들여와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담당하는 곳이 어딘가요? 잘못된 정책으로 백성들이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데.”
“다들 알면서도 쉬쉬하는 겁니다. 농노들이야 힘이 없고요.”
“대체 누가 일을 이렇게 엉망으로 하는 거예요?”
스토커 남작이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스노브 후작이요.”
뭐? 또 그 영감탱이야?
어쩐지 인상이 음흉하고 썩은 내가 풀풀 진동하더라니.
“스노브 가문은 오랫동안 제국의 외교와 무역을 맡아 왔습니다. 지금도 외국과의 교류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스노브 후작을 거쳐야 하죠.”
“아무리 그래도, 아니 그렇다면 더욱 일은 바로 해야죠.”
“타국 황실이나 관청에서도 원하는 게 있으면 황실보다 스노브 후작과 먼저 접촉할 정돕니다.”
“이거 완전 썩었네, 썩었어.”
“외국에선 스노브 후작을 ‘제국의 형제’, ‘크루그 소황제’ 등으로 부른다던데요.”
“그러니까 스노브 후작에게 뇌물을 바치고 말도 안 되는 무역 협정을 통과시키는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사리사욕만 챙기는 후작은 백성들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있을 거 아니에요.”
“다른 귀족과 관료들도 물론 폐해를 알고 있지만 스노브의 세력이 워낙 막강한지라 입을 다물고 있는 실정이에요. 자기들과는 그닥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상관없는 일이라….
하긴 더 싼 값에 식재료를 구할 수 있으니 도리어 좋아하는 이도 있으려나?
“그럼, 모두가 즐거울 만한 일을 고민해 봐야겠네요. 스노브만 재미를 보면 안 되죠.”
알레스가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렸다.
“즐거운 축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