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레이디의 역습
“거울 속 레이디도 아름다웠지만 그 뒤에 선 유모도 아름답던걸?”
레이디 페레티, 19세, 돌싱.
체질적으로 술이 약하지만 근성으로 버팀. 취하면 애교 있어짐.
“아가씨도 참. 이 집 유모가 절세미인인 거 이제 아셨어요?”
마사, 35세, 유모.
말술. 취하면 호기로워짐.
“지금부턴 좀 천천히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밤비, 22세, 기사.
주량과 음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독종. 취하나 안 취하나 변화 없음.
와인 한 잔이 와인 한 병이 되고, 코냑 한 병이 되었다.
마사는 막 새 위스키 병을 땄다.
알레스는 그런 마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만 연애하라고 들볶지 말고 마사도 얼른 해.”
“아, 우리 아가씨 정말 질기시네. 알았어요, 그깟 연애! 아가씨 먼저 보내고 저도 하죠 뭐. 어떤 분처럼 뭉그적거리지 않고 일사천리로 해치울 테니 두고 보세요.”
“부인은 한번 말한 건 꼭 이뤄 내실 거 같습니다.”
밤비의 궁서체 맞장구에 알레스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밤비 경, 북부 눈 맛이 어때요?”
알레스의 뜬금없는 식탐 발동에 마사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많이 취하신 거예요? 이제 눈까지 드시고 싶으세요? 목 타시면 물 따라 드릴까요? 아님 술에 얼음 좀 넣어 드려요?”
“난 정말로 눈 맛이 궁금한 건데.”
마사의 취기 오른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알레스가 눈을 초롱거리자 밤비가 대답했다.
“맛있습니다.”
“워어? 밤비 경까지?”
“정말입니다. 북부의 자연이 청정해서 그런지 눈이 맛있어요. 눈 입자가 유난히 곱고 보슬보슬하거든요.”
그 말에 알레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희 고향에선 깨끗한 눈에 연유나 시럽을 뿌려 먹는 게 겨울 별미랍니다.”
그렇지! 눈의 영지에 빙수가 없을 리 없지!
“성에선 연유나 과일을 곁들여 드시지만 평민 가정에선 보통 당밀과 산열매를 섞어서 자기 집만의 비법 시럽을 만들어요. 해마다 겨울이면 대회도 열립니다.”
“홈 메이드 시럽 대회?”
“최고의 궁전을 뽑는 대회요. 눈을 자그마한 빙산 모양으로 그릇에 담고 갖가지 시럽과 열매로 꾸민 디저트를 ‘눈 여왕의 궁전’이라고 하거든요.”
“뽑히면 매우 영예로운 일이겠네요?”
“그럼요. 설빙 대회인데 그 열기는 화산처럼 뜨겁습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밤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알레스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공유 마차가 꽤 빨리 사교의 장으로 자리 잡은 거 같아서. 슬슬 광고판을 도입해 볼까 싶거든요.”
“광고판이라면….”
“신문 광고 같은 걸 마차 내부나 외부 차체에 붙여놓는다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공유 마차를 이용하는 귀족들은 정보를 물어 나르는 걸 좋아하니 효과가 높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첫 번째 홍보 대상을 메르세데스 영지로 할까 싶어서요.”
“드디어 저희 영지를 알리게 되는 건가요?”
“이제 곧 겨울이잖아요. 추운 곳은 추울 때 가야 참맛을 알 수 있다면서요.”
“그럼 눈 맛을 물으신 이유도?”
“제도 귀족들이 메르세데스령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도록 그곳만의 매력을 한껏 어필해 보려고요.”
“눈 여왕의 궁전을 지역 음식으로 홍보하시게요?”
“가고 싶은 여행지가 되려면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거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다면 이야깃거리예요.”
알레스가 검지를 세우며 강조했다.
“북부의 사락사락한 눈으로 만든 설빙 디저트. 흥미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되려는 느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영지의 명물로 소개하기엔 너무 소박하지 않을까요? 제도에는 더 으리으리하고 멋진 것들이 많잖아요.”
밤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로 살을 붙이자는 거죠.”
알레스는 저쪽 세상 기억을 더듬었다.
“요리 대회 자체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거나 더 키워서 영지 축제로 만들 수도 있겠죠. 농가에서 비법 시럽을 팔 수도 있고요.”
“아, 그런 거라면… 북부엔 사탕당근이라는 게 있어요. 사탕무보다 더 추운 지역에서도 견딜 수 있는 작물이에요. 눈토끼들도 무척 좋아하죠.”
“사탕당근이요? 처음 들어 봐요.”
“저희 영지에선 사탕당근에서 얻은 당밀로 시럽을 만들어요. 당근 농가 체험 같은 거도 괜찮을까요?”
“바로 그런 게 이야깃거리예요. 현지인들만 아는 즐거움이요.”
“제가 그런 소재를 많이 알려드려야 하는 거군요.”
“눈 여왕의 궁전만 해도 좋은 케이스예요. 영지의 대표 이미지인 눈과 영지민의 풍습이 잘 결합돼 있잖아요.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한 눈은 청정지역이란 걸 말해 주고요.”
어렸을 때부터 별 생각 없이 집어 먹던 눈이었는데….
밤비의 밤색 눈이 감탄의 빛을 띠고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참, 북부로 여행 갈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이나 이미 다녀와서 그곳을 추억하고픈 사람을 위해 제도에 설빙 디저트 숍을 여는 건 어때요? 메르세데스 이름을 걸고요.”
“제도 분점 같은 건가요?”
“맞아요. 대신 헤라클레스에게 부탁해 지역색을 조금 덜고 대중성을 더한 상품을 만들어야 해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알레스가 물었다.
“지금까지 나온 대회 우승자가 몇 명이나 되죠?”
“잠시만요… 서른… 하나요?”
“그럼 우승한 서른한 가지 시럽을 재현해 보도록 하죠. 디저트 숍을 찾는 손님들은 자유롭게 시럽을 골라 설빙 위에 첨가할 수 있어요.”
“베스트 시럽 31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거군요. 꼭 놀이 같네요.”
“물론 서른한 개나 되는 시럽을 대중화, 계량화하려면 헤라클레스가 고생을 좀 해야겠지만.”
“디저트는 우리 중에 브레이브 경이 전문가니 미안해도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겠네요. 북부 출신 보조를 한 명 물색해 볼까요?”
“하긴 헤라클레스도 이제 명장의 경지에 올랐으니 슬슬 후진 양성도 해야겠네. 대신 밤비 경도 해 줄 일이 있어요.”
“뭡니까?”
“헤라클레스 이름으로 빵집을 낼 건데, 문장을 좀 만들어 줄래요?”
“기꺼이요.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될까요?”
“난 팔뚝이랑 롤링핀이 들어가면 어떨까 했는데, 헤라클레스는 토끼를 넣고 싶다네요.”
“도끼요?”
“토끼.”
“둘 사이의 거리가 좀 멀지만 한번 조합해 볼게요.”
“아, 더불어 메르세데스령의 상징물도 함께 생각해 줘요. 시각적인 미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밤비 경이 더 잘 알죠?”
알레스와 밤비는 아닌 밤중에 열띤 회의를 했다.
그걸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바라만 보던 마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또 일 얘기였던 겁니까?”
“마사, 미안. 얘기하다 보니 길어져 버렸네.”
“술 마시다 일이라니, 정말 너무하신 거 아녜요?”
“좀 봐줘. 술 마시다 일에 빠지는 게 죄는 아니잖아?”
“죄죠! 비싼 술을 세 병이나 따면서 제가 기껏 분위기를 돋웠는데. 그렇게 무시하시고….”
“무시는 무슨. 여기서, 아니 제국을 통틀어 마사를 무시할 수 있는 간 큰 인간은 없을 걸?”
그 술 세 병도 내가 황제한테 요구해서 받아낸 내 술이고.
“그럼 저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로 공작님 얘기 좀 해 주세요오.”
마사가 이상한 주사를 가지고 있었네.
알레스는 난처한 얼굴로 밤비 경을 쳐다보았다.
특급 주정뱅이 좀 말려 보라는 뜻으로.
그런데 밤비우스 너마저….
왜 눈을 반짝거리면서 기대에 찬 표정을 하는 건데!
“정말 저희가요,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마사가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말했다.
“공작님도 아가씨를 좋아하시고, 아가씨도 공작님을 좋아하시고, 두 분이 서로 좋아하시는데 왜 말을 못 하시냐고요!”
또 시작이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밤비마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사의 주정을 거들었다.
“누가 말을 못 한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알레스도 결국 소리를 꽥 질렀다.
보자보자 하니까. 남의 속도 모르면서!
“우리 친해, 친하다고! 공작님이 나 힘들 때 안아도 주고 신체 일부도 빌려 주셨어!”
“…….”
“어두운 데서 넘어질 뻔했을 때도 목덜미 안 잡고 허리 잡아 주시고. 얼마 전에는 들판에서부터 집까지 업어서 데려다 줬다고!”
알레스의 포효에 마사와 밤비는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모두 하고 계셨군요….’
“그런데… 왜 도무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거지요? 두 분 사이가 여전히 퍼석퍼석해 보이는 걸요?”
술이 확 깬 마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뭐하냐고! 내가 꼭 친여동생 같대. 그래서 챙겨 준 거래!”
“…….”
마사와 밤비가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아이참, 아가씨두. 항상 말의 진의를 헤아리셔야죠.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
씩씩거리는 알레스에게 마사가 달래듯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면? 친오빠, 친여동생에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라도 생겼나?”
“공작 전하께서만 홀로 다른 뜻으로 쓰실 수 있죠. 마음의 암호 같은 거랄까.”
“푸푸푸.”
알레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자, 밤비가 얼른 칼자루를 바닥에 꽂으며 무릎을 굽혔다.
“공작 전하가 그런 쪽으로 표현이 서투십니다. 기사 된 자로서 주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걸 사죄드립니다.”
“허허허.”
밤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웃음을 흘리던 알레스가 선포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연애 이야기 금지야.”
* * *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다 남작님이 기사를 잘 써 주신 덕분이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야말로 레이디 덕분에 특종 쓰는 기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 할 거 같군요.”
“후후, 그럼 서로 득이 되는 사이라고 해 둘까요.”
“영광입니다.”
알레스는 오전 일찍부터 <엠파이어 타임스> 신문사를 찾았다.
공유 마차 사업과 관련해 중간 점검도 하고 후속 일정도 논의할 겸 거래처를 한 바퀴 순회할 계획이었다.
안팎으로 연애 잡소리 단속령도 내렸겠다, 알레스는 이참에 일에 더욱 매진하자고 마음먹었다.
요즘 들어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진 마음도 다시 콱 조여 매고, 어느 틈에 술술 빠져나가 버린 독기도 바짝 올리고.
‘알레스, 사업이 조금 굴러간다 싶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지? 정신 차려! 넌 여전히 귀족 사회의 미운털이고 사교계 왕따란 말이다!’
스스로 빨간 모자 조교가 되어 물렁해진 자신을 꾸짖었다.
‘연애라니! 존잘 공작 오빠라니! 이성이 많이 따르는 타입이라니! 도톰하고 요망한 입술이라니!’
불쾌와 혐오의 아이콘인 주제에 언감생심 로맨스를 꿈꾸다니!
몰캉몰캉해진 심장이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나 버럭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리석은 착각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으 왠지 열받아….’
현실 감각을 되찾기 위해 자본주의가 낳은 장인들과 만나 기를 받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비열하고 얍삽하기로 따를 자가 없다는 비양심 기자 스토커 남작이었던 것.
돈이 되면 무엇이든 교묘히 날조하고 퍼뜨린다는 그.
솔직히 그의 태도로 보나 기사 내용으로 보나 어디가 그런 악명에 어울리는지 알레스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 수 없다는 게 그가 특출한 이유인지도.
“마정석 연료를 마법식으로 교체하는 게 앞으로 가장 큰 이슈가 되겠군요?”
지금만 해도 그의 눈은 꼭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