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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8화 (48/120)

48화

사고 좀 치라고 제발

“헤라클레스가 왜?”

“소로 사 형제에겐 염문설이 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셨다면서요. 똑같은 상황 아닙니까?”

굿즈 판매가 성황을 이루자 마사는 마차 예약과 고객 서비스 업무를 보면서 동시에 상품 진열대까지 지키고 앉아 있어야 했다.

바로 옆 카페에서 레이디들이 탄성을 터뜨릴 때마다 마사는 뱁새눈이 되어 흘겨보았다.

‘흥, 귀족 아가씨들이 우리 평민들보다 더 체통이 없구만.’

저런 반응을 은근히 즐기며 좋아라 하고 있을 헤라클레스도 왠지 얄밉게 느껴졌다.

허영과 거만은 초장에 싹을 밟아 줘야 한다.

“브레이브 경이 요즘 외모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마, 마, 마사 경. 제, 제, 제가 언제요!”

자는 건지 웃는 건지 늘 실눈이던 헤라클레스의 눈이 쟁반만 하게 커졌다.

“입에 들어가야 할 꿀이나 기름을 얼굴에 슬쩍슬쩍 바르지 않나, 틈만 나면 은쟁반을 들고 얼굴을 이리저리 비쳐 보지 않나.”

“그, 그건… 그런 게 아니고요….”

헤라클레스가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로 항변했다.

그 당황한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마사가 그를 더욱 몰아갔다.

“괜히 헛바람 들어서 사고 치지 않도록 엄하게….”

그러나 알레스의 생각은 좀 달랐다.

“헤라클레스는 사고 좀 쳐도 돼.”

“예에?”

“헤라클레스도 연애든 결혼이든 해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고 노예 생활만 할 순 없다고 말한 건 마사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많이 들고나는 곳에 있어야 연분도 만나는 거라며? 그것도 마사가 한 소리고.”

“그건 아가씨께 드린 말씀이지요.”

“헛바람이라도 많이 들어와야 그중에 찐바람이 얻어걸릴 확률도 높아지는 거 아니겠어?”

“소로 청년들 때와는 많이 다르시네요, 아가씨?”

“당연히 사람 따라 다르게 접근해야지. 그게 매니지먼트의 기본 아니겠어?”

“그 매니지먼트라는 거, 이제 브레이브 경한테도 하시려고요?”

“왜 불만 있어? 그럼 마사가 헤라클레스 책임질래?”

“아, 아니, 제가 왜요….”

“거 봐.”

꽃미남 마부들과는 사뭇 다른 잣대를 갖다 대는 알레스였다.

“참, 헤라클레스, 매니지먼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실은 나도 강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예, 마님.”

“무조건 말을 아끼세요. 말은 적게 하면 할수록 좋다는 뜻이에요. 가능한 한 웃음으로 얼버무려요.”

“…예.”

“그리고 웃을 때 손으로 입 가리고 웃는 버릇은 꼭 고쳤으면 해요. 차라리 호탕하게 소리 내 웃든가, 아니면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리는 걸로 마무리하면 좋겠어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참, 아까 얘기하다 만 빵집 말인데요.”

“예, 예.”

“어떤 이름으로 내든 중요한 건 이거예요. 드라이브 스루보다 빵 가격을 두 배 높게. 하루에 딱 백 개만.”

“예? 그럼 사람들이 사 먹을까요?”

“헤라클레스, 생각해 봐요. 황실 연회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했는데도 진가를 몰라본 막입들이에요.”

“그렇긴 하지요…. 마님이 황궁 음식 나눔장을 건의하신 것도 멀쩡한 빵들이 버려지는 걸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이지요.”

“귀족들은 그저 쪼는 맛이 있어야 귀한 줄 안다니까. 무조건 한정판이어야 해.”

알레스가 허무하게 버려진 빵들을 애도하며 이를 까득 갈았다.

“아, 말 나온 김에 밤비 경에게 베이커리 헤라클레스의 문장을 부탁해 놔야겠네. 어떤 게 좋을까?”

“예? 문, 문장까지!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흐음… 근육질 팔이랑 밀대 같은 걸로 하면 어떨까? 암 앤 롤링핀 어때요?”

“예에…. 저는 토끼 모양 같은 게 좋은데….”

알레스의 제안에 헤라클레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토끼? 그럼 근육질 팔로 토끼 귀를 움켜쥔 모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는 의미도 괜찮긴 하겠네.”

“아아, 귀여운 토끼를 어떻게… 마님 말씀대로 암 앤 롤링핀이 좋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눈시울을 붉히며 물러났다.

알레스는 ‘제국 최초 줄 서서 먹는 빵집’에 대한 기대로 들떠서 헤라클레스의 시무룩함 따위는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귀족들이 직접 줄을 서는 게 아니라 그 집 고용인들이 대신 서겠지만.

맛있는 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바람직한 식문화를 제국에 뿌리 내려 보리라.

알레스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마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 아가씨, 브레이브 경은 팔뚝 문장이 영 싫은가 본데요?”

“왜? 마사가 어떻게 알아?”

“방금 표정이 영 시무룩해 보였잖아요.”

알레스는 마사를 수상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그래도 헤라클레스 생각해 주는 건 마사밖에 없네.”

“예? 잡아먹다니요. 다 브레이브 경이 잘못된 길로 갈까 봐 걱정돼서 한 소리죠.”

“그으래? 다행이네. 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잠시 걱정했잖아.”

“저희야 뭐 소랑 닭 같은 사이인데 문제는 무슨 문제요.”

“어쨌든 둘은 나한테 무척 중요한 사람이니까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연애 금지는 소로 형제한테만 해당되는 사항이라는 걸 다시 한번 분명히 할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연애해도 좋다는 얘기지. 사내 연애도 환영이고….”

“아니, 거기서 소로 형제를 빼면 사내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마사가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아가씨, 혹시 지금 복수하시는 건가요?”

마사는 느긋한 척했지만 입가가 살짝 떨렸다.

“제가 아가씨한테 연애, 연애 하니까 아가씨도 되돌려 주시려는 건가요?”

“그게 복수 받을 만한 일이었단 걸 인정하는 거야?”

“저는 아가씨의 행복을 바라서 그런 거예요. 정말 서운합니다.”

“아아니, 둘이 잘 지내라고 한 소린데 뭐가 서운해? 헤라클레스야말로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전 남자 좋아합니다.”

“어머, 팔뚝남 요즘 인기 최고거든?”

“아가씨, 지금 남의 연애 훈수 두실 때가 아닙니다. 좋은 분을 만나시고도 왜 통 진도를 못 나가세요?”

훅 들어온 마사의 공격에 알레스가 주춤했다.

“마사… 왜 갑자기 얘기가 엉뚱한 데로 튀지? 이건 설마 복수의 복수인 거야?”

“전혀요. 비록 저를 놀리실 생각으로 꺼낸 말씀이라 해도, 아가씨가 연애 이야기로 농담을 다 하시다니! 정말 놀라운 변화예요.”

“내가 무지 재미없는 사람이었던가 보네.”

“재미없는 거도 없는 거지만, 저는 아가씨가 영영 마음을 닫으시는 게 아닌가 너무나 걱정이 됐거든요.”

마사가 울컥하며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대 백작님과 마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들이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고… 남기신 핏줄이라곤 아가씨밖에 없는데 이렇게 홀로 쓸쓸히 계신 걸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왜 갑자기 울먹여? 그리고 내가 왜 혼자야? 마사가 있잖아. 헤라클레스랑 밤비 경도 있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거랑 그게 같나요? 게다가 쓸 만한 영식이 없다면 몰라. 무려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가 있는데 왜 하질 못하세요, 연애를!”

마사의 생떼에 알레스는 기가 막혔다.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내가 마사랑 헤라클레스를 억지로 묶으면 좋겠어?”

“아니, 아가씨! 어째서 억지로예요? 공작 전하가 밤새 그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오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거야… 오지랖? 아, 정의감인가? 인류애?”

“정말 이러실 거예요!”

마사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듯한 기세로 호소했다.

“아니면 은혜를 갚으려는 걸지도! 우리 가문에 큰 빚을 졌다고 했어.”

나도 자존심이 있지.

차마 친오빠 마음으로 여동생 단속하러 온 거라고는 말 못 한다.

“아가씨… 아시잖아요.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오신 거잖아요.”

“…….”

“거기서 여기가 어딘가요. 그것도 전장에서 달려오시는 거잖아요. 그거 보통 마음은 아니잖아요.”

보통 마음은 아니지. 무려 친오빠 마음이라니까!

“설마 공작 전하가 별로세요? 아가씨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마사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하긴 좀 특이한 면이 있으시지요.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닌 거 같던데요. 외모도 수려하시고. 그래도 영 아가씨 취향이 아니세요?”

알레스는 뜨악한 얼굴로 아가씨 바보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너무 대단한 분이라 안 되지.”

“아가씨….”

“에이, 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영세한 가문의 이혼녀가….”

“아가씨!”

마사가 알레스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보세요, 여기 누가 있죠?”

신비한 별처럼 보이는 녹안에 사랑스럽게 넘실거리는 장밋빛 머리칼.

턱과 목은 야윈 편이지만 아직 볼록한 젖살이 남아 있는, 여인보다는 소녀 느낌이 더 나는….

“생기 넘치고 영리한 열아홉의 레이디가 있죠?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다웠다.

아직도 적응이 안 돼서 가끔 거울이나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지만.

하지만 거죽이 바뀌면 뭐 하나.

속에 든 건 여전히 자격지심으로 위축된 과거의 나인걸.

사내 킹카도 양자강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네가 좋아.’

하지만 자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마음을 부정했다.

그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왜냐하면 나는….

“마사, 실은 나 불치병이 있어.”

알레스의 폭탄 발언에 마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가씨… 핑계를 대시려거든 조금은 그럴듯한 걸 대세요. 아이쿠 깜짝이야. 불치병이라니 세상에.”

“정말이야.”

“제가 유모예요. 아가씨 건강에 대해선 아가씨보다 더 잘 안다고요.”

이 아가씨가 그 아가씨가 아니니까 문제지!

“연애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실 일이지. 하필 둘러대셔도 불치병이라니. 퉤퉤퉤, 얼른 취소하세요. 말이 씨 된다고요.”

취소한다고 없어지는 거면 얼마나 좋겠어.

“아가씨는 멋진 영식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실 거니 괜한 걱정 마세요!”

그래, 난 살아.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에이, 액땜으로 와인 한잔 해야겠어요.”

“갑자기? 마사야말로 핑계가 좋네. 술이 아직 남았어?”

“그럼요. 황궁에서 섭섭지 않게 챙겨 나왔잖아요.”

“하긴 공유 마차 때문에 다들 고생했는데 회식 한번 못 했네. 다른 사람들도 부를까?”

“회식은 다음에 날 잡아서 정식으로 하시고요, 오늘은 밤비 경만 불러서 여자들끼리 어때요?”

“여자들끼리 좋지!”

“참, 아가씨 술은 언제 배우신 거예요? 황궁에서 주류 제공 요구하실 때 깜짝 놀랐잖아요. 꼭 주당처럼 말씀하셔서.”

엉? 생각해 보니 이 아가씨 술도 제대로 못 마셔 봤을 거 같긴 한데.

“그냥 몰래몰래 조금씩 익혔어.”

“아아, 제가 알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죠?”

“가긴 어딜 가? 마사가 그동안 나를 제대로 못 본 거지. 내가 좀 신비주의야.”

“하긴 이상한 게 어디 한두 가진가요. 그 일 겪고 아가씨 너무 많이 변하셨어요.”

“그런가? 큰일을 겪으면 나도 모르는 내가 막 튀어나온다잖아, 하하.”

“그런데 더 좋아요.”

“응?”

“변하신 모습이 저는 훨씬 더 좋습니다.”

마사가 알레스에게 배운 쌍따봉을 바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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