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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5화 (45/120)

45화

말편자를 요리하는 법

‘지니? 누구지? 게다가 예쁜 지니라니…. 혹시 창가에 고양이라도 있나?’

홀린 듯 그 말을 중얼거린 알레스는 또 미동도 없이 침대맡에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가위눌린 것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흘렀다.

“아가씨, 이제 그만….”

누군가 방문을 열고 알레스를 조심스레 불렀다.

공작은 이때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

“벌써 동이 트는군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공작을 보고 알레스는 깜짝 놀랐다.

“엇, 일어나셨어요?”

“그럼요. 이제 슬슬 가 봐야죠.”

“숙면하시나 봐요. 어쩜 그렇게 벌떡 일어나세요?”

“수련의 효과인가 봅니다.”

“아, 늘 검술을 연마하시지요.”

공작은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후 방을 나서려다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한두 발짝 뒤에서 걸어오던 알레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알레스.”

주변이 어스름해서인지, 공작의 표정과 목소리가 엄숙하게 느껴졌다.

알레스는 흠칫했다.

설마 어제 그렇게 뭐라 하고선 아직도 훈계할 게 남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또 뭘요!

어떻게 눈 뜨자마자 따질 수가 있지?

저렇게 조각상같이 생긴 남자들은 결국 얼굴값 하느라 성격이 까칠한 걸까?

“왜 아직도 나를 공작 전하라고 부르는 거죠?”

“예? 공작 전하를 공작 전하라 부르지 않으면…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카이트.”

“…….”

“난 꼬박꼬박 알레스라고 부르는데…. 둘이 있을 땐 편하게 부르자고 했잖아요.”

“전하야 편하게 부르셔도 되지만 저는 좀….”

“둘이 있을 때든 언제든 가능한 한 카이트라고 불러 줘요.”

그게, 일어나자마자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 사안입니까?

“아니면 로잘린처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괜찮고요.”

“카이트! 간단한 식사라도 하시려면 서두르시지요, 카이트!”

알레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공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재빨리 둘러보았지만 고양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 *

“이마도 눈썹도 눈매도 콧날도 턱선도 전부 반듯하고 단정한데 유독 입술만 너무 육감적이란 말이지.”

알레스는 펜을 손에 쥔 채 중얼거렸다.

“눈사람 얼굴에 그렇게 공을 들이시는 겁니까?”

마사가 목을 죽 빼고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를 들여다봤다.

알레스는 그제야 자신이 눈사람을 그리다 말고 헛소리를 중얼거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엄. 관심을 끌려면 눈사람조차도 예뻐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눈매도 콧날도 턱선도 둥글둥글하기만 한데요? 육감적인 입술은 어디 있다는 거예요?”

마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머릿속에. 곧 도톰하게 붙일 예정이야.”

“흠, 그런 느끼한 얼음 조각상보다는 지금 이 그림 그대로가 저는 더 귀엽고 복스러운데요?”

“그런가? 푸근한 아저씨 상이 나으려나?”

“아무래도 눈사람 하면 동심의 상징이잖아요? 아이들이 좋아하고요. 이렇게 푸근한 인상이 어울리죠.”

“하긴, 눈사람이 치명적인 매력을 풍겨도 좀 으스스하겠다.”

알레스는 눈사람을 그리던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는 물었다.

“두 번째 예약 마차가 방금 출발했지?”

“예, 카르티에 공작저를 출발해서 웨지우드 백작저, 에트로 백작저, 페라가모 후작저를 거처 맥켈란 승마장으로 간대요.”

“음, 여긴 언제쯤 들르려나?”

“삼십 분 후쯤이면 도착할 듯한데요?”

“아까 첫 번째 손님들 반응은 어땠어? 빵이랑 커피에 대한 평가는 아직이지?”

“네, 사실 손님들 전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거 같았어요. 아마 그분들 빵이고 커피고 아예 맛을 못 느꼈을걸요?”

“왜? 간이 카페 반응이 별로란 거야?”

“아니요, 분위기야 엄청 좋았지요. 하나같이 홍조 띤 얼굴에 입이 귀에 걸려 있더라고요. 일종의 환각 상태였달까요.”

마사가 아까 본 상황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하, 우리의 꽃미남 마부들이 일을 제대로 했나 보네?”

“당연하죠. 원래도 흐뭇한 청년들인데 그동안 얼마나 갈고 닦았습니까.”

“앞으로 더 크고 중요한 일에 쓸 인재들이니까.”

“어? 계속 마부로 고용하실 게 아니고요?”

“그럼! 아무리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지만 조금씩 자기 성장을 해야 보람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야 오래 할 수 있고. 직원이 행복해야 상단도 성장하는 거고.”

“아가씨, 아니 보스….”

“꽃미남 형제뿐만이 아니야. 마사도, 헤라클레스도, 밤비 경도 모두 앞으로 더 큰 일을 해야 해.”

노력하는 인간에게 한계란 없어!

다들 얼마든지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부려먹을 수가 있지.

그러다 본인도 몰랐던 재능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럼 또 새로운 사업 하나를 팔 수 있지.

“마사, 사람이 온다는 건 엄청난 일이야.”

알레스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경험과 재주와 아이디어와 재운 그리고 대박 아이템이 함께 오는 거거든.

짜고 짜서 더는 나올 게 없을 거 같은 그때!

포기하지 않고 독하게 한 번 더 쥐어짜면 비로소 진국이 우러나오는 이치랄까, 후후후.

알레스는 자신이 얻은 인재들을 어떻게 하면 더 착즙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보스는 정말이지… 저희를 얼마나 더 부려먹으시게요?”

역시 특급 유모 마사. 눈치도 빨라.

주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잖아.

“싫음 말고. 나는 싫다는 사람 억지로 안 붙잡아. 헤라클레스를 봐봐. 조건이 열악해도 자기가 있고 싶다잖아.”

“그거야 안 할 수 없게 만드시니까요.”

“근데 마사는 안 속네?”

“저도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어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쳇, 음식 나눔장에 새로 뽑은 사람들은 잘하고 있어?”

“페레티가에서 일했던 고용인들 중에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 부탁했어요. 다들 선대 백작님과 마님을 생각해서 나선 거구요.”

음식 나눔장 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마사와 헤라클레스를 공유 마차 사업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위해 새로 사람을 뽑았다.

이제 마사와 헤라클레스는 일주일에 한 번쯤 가서 전반적인 걸 살펴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도 둘은 여전히 매일 새벽 핑크 스쿠터를 타고 나눔장에 다녀오고 있었다.

참으로 수상한 애정이었다.

공유 마차 사업을 시작하며 예약과 고객 서비스는 마사가, 천타빵 만들기와 간이 카페 운영은 헤라클레스가 맡았다.

그리고 밤비가 맡은 건 그 이름도 거창한 아트 디렉터.

마차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부터 마차와 간이 카페에서 쓰이는 모든 물건, 꽃미남 마부들의 헤메코까지.

밤비 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검집 튜닝이나 비즈 공예 쪽이 블링블링 라인이라면 마차 쪽은 심플하고 세련된 엘레강스 라인이랄까.”

“밤비 경은 말편자를 좋아하나 봐요. 온갖 장식과 문양이 다 말편자 모양이에요.”

알레스와 마사가 저마다 감상평을 쏟아낼 때였다.

“북부 기사들 사이에선 말편자가 행운을 상징하거든요.”

밤비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밤비 경. 볼일이 있다더니 일찍 왔네요.”

“예. 호위 기사로서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지요.”

“경의 예술적 감각이 훌륭하다는 얘기를 나누던 참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실은 장제소에서 편자공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장제소라면 편자를 만들어서 말발굽에 붙이는 곳 말이에요?”

“예. 북부 기사들 사이에선 편자를 새 걸로 갈 때 발굽에서 떼어낸 낡은 편자를 부적처럼 지니는 게 유행이랍니다.”

“아하, 그래서 밤비 경이 말편자 모양을 좋아하는구나.”

“아이그너 경이라는 뛰어난 기사가 있었습니다. 메르세데스의 기사단장을 지냈고 주변국의 침략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황금 방패 훈장도 받은 인물이에요.”

옛날이야기 한 토막?

“아이그너 경은 눈 골짜기 전투에서 가슴에 창을 맞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요. 그런데 품에 지니고 있던 말편자 덕분에 목숨을 구하죠.”

흠, 어째 나폴레옹의 네잎클로버랑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스토리텔링이 중요해.

알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행운의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사실 전 편자의 모양 자체가 예쁘다고 생각해요. 말편자 모양 액세서리를 만들어 보려고 장제소에 다녀온 겁니다.”

“편자 모양이라면 공유 마차 굿즈로도 어울릴 거 같은데?”

유니크한 디자인에 주술적인 의미까지 담긴 액세서리라면 분명 인기가 좋을 거 같았다.

부와 명예, 건강, 아름다움, 애정 등을 갈구하는 건 동서고금이 한마음 아니겠는가.

“아가씨가 말씀하신 그 스탬프 찍기요. 스탬프 모양을 말편자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골드카드에도 말편자 문양을 넣고요.”

공유 마차 편도 1회 이용에 스탬프 한 개, 왕복 1회 이용에 스탬프 두 개를 찍어 주기로 했다.

스템프 열 개, 스무 개마다 시즌 한정 사은품을 주고, 연간 백 개를 찍으면 으리으리한 선물과 함께 골드카드를 발급.

단, 골드회원 자격은 실적에 따라 매년 갱신하는 걸로.

뭐가 됐든 VIP 자격을 상실한다는 건 귀족 사회에선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므로 한번 시스템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영원히 골드카드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마사는 알레스의 아이디어에 밤비의 아이디어를 비비자는 아이디어를 낸 셈이었다.

역시 사람이건 물건이건 얼렁뚱땅 엮어 버리는 변통의 달인 마사.

“좋아. 골드회원 선물도 순금 말편자가 어때? 아주 커다란 걸로.”

알레스의 눈이 황홀하게 빛났다.

“스토커 남작더러 말편자에 대한 기사를 쓰라고 해야겠다. 말편자가 행운을 불러온다는 밑밥을 사교계에 쫙 깔아 놔야지.”

왕년에 자본주의 물깨나 먹어 본 주작의 달인 알레스.

“말편자 모양 액세서리를 공유 마차 홍보모델이자 종신 골드회원인 카르티에 공작과 로잘린 황녀에게 협찬하는 건 어떨까요?”

차분한 얼굴로 야무지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실리주의 검사 밤비.

사교계의 별인 두 사람이 그 액세서리들을 걸고 다니면 브랜드 인지도도 올라가고 금세 유행이 될 터였다.

페레티가 타짜 3인조는 말편자로 귀족들을 등쳐먹겠다는 열의로 불타올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열기대로라면 공유 마차가 아니라 말편자 사업을 벌여야 할 판이었다.

하긴 안 될 것도 없지.

행운을 불러온다는 말편자가 더 큰돈을 벌어들일지도.

솟아라, 일확천금의 기운이여!

“저, 저도 말편자 모양 빵이나 구움과자를 만들어 볼까요?”

“…….”

언제 왔는지 헤벌쭉 웃으며 끼어드는 빵머리 헤라클레스.

그저 마님께 칭찬받고 싶단 마음밖에 없는 해맑은 영혼이지만, 황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천타빵의 진가도 모르는 막입들에겐 말편자 빵에 금가루를 뿌려서 파는 게 더 먹힐지도 모르겠군.

적당히 ‘만수무강’이니 ‘자손번창’이니 ‘운수대통’이니 하는 번지르르한 이름을 붙여서 황제한테 진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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