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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4화 (44/120)

44화

저 안에서 뭐 하시는?

공작과 쌍둥이처럼 닮은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냉정하게 그 말을 내뱉었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였지만 눈빛도 목소리도 빙하처럼 차가웠다.

반면 공작은 그 한마디를 차마 꺼내지 못해 주저하고 또 주저하며 밤이 깊도록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은 거겠지.

하긴, 얼마나 불안하고 엉성해 보일까.

유독 공작 앞에서 미덥지 못한 모습을 가지가지로 보여 줬으니까.

저혈당증에 고소공포증 그리고 승마 공포증까지….

실신이 취미도 아니고.

다방면으로 부실한 레이디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사업을 벌인다고 기사까지 났으니.

사기꾼들한테 걸려서 가문의 남은 재산마저 몽땅 털리고 정신줄이라도 놓을까 봐 걱정이 돼서 달려온 게 분명했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지만 외주 업체가 휘청하면 클라이언트도 손실이 적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기껏 그 먼 북부에서 여기까지 달려오고선 왜 엉뚱한 소리만 하냐고요.

왜 말을 못 해, 멍청이라고!

“귀엽잖아….”

알레스는 베개를 껴안고 마구 흔들었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공유 마차 사업을 보란 듯이 성공시켜서 실력을 증명하는 수밖에.’

공작 고객님이자 오빠에게 괜한 걱정을 사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알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 케이크 모양 저택 위로 눈썹 모양 달이 걸렸다.

알레스와 공작이 그처럼 사방팔방으로 헛다리를 짚는 가운데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저, 아가씨….”

야밤에 히죽히죽 웃다 깜빡 얕은 잠에 들었던 알레스는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응, 마사? 무슨 일?”

“깨워서 죄송해요. 하지만 공작 전하를 배웅하고 싶어 하실 거 같아서요.”

“응? 그렇지, 그래야지. 배웅해야지.”

알레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지금 출발하신대?”

“그게….”

마사가 머뭇거렸다.

“아가씨가 좀 깨워 보실래요?”

“……?”

“고단하신지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대단한 공작이라도 몸이 무쇠가 아닐 테니.

하지만 저택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내가?

알레스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읽었는지 마사가 얼른 바람을 잡았다.

“귀한 손님이시니 가주가 직접 깨워 드리는 게 예가 아닐까요?”

그런 예가 있었나?

귀족의 예법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게 한참 많다고 느끼며 알레스는 얼른 침대에서 튀어나왔다.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옷을 걸쳤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서두르는 아가씨를 보며 마사는 음흉하게 웃었다.

행여 눈치 없는 누군가가 공작을 깨울까 봐 밤비 경이 손님방 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원조 친정오빠 헤라클레스가 반항하며 잠시 소란을 피웠지만 밤비 경의 차가운 검 앞에 맥없이 찌그러졌다.

“레이디, 들어가십시오.”

알레스가 헐레벌떡 달려오자 밤비 경은 그제야 막아선 문 앞에서 물러났다.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리가. 곧 날이 밝을 텐데!”

“잠든 사람을 갑자기 깨우면 놀라서 심장이 상한다고 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밤비 경이 침착한 얼굴로 알레스를 진정시켰다.

“그, 그래요? 그럼 놀라지 않게 조심조심.”

알레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공작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알레스가 방 안으로 사라지자 마사와 밤비 경이 얼른 문에 등을 대고 섰다.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도록.

“제발….”

“이렇게까지 했는데 두 분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는데. 뭐 붙어 있을 시간이 있어야 정이 들든지 말든지 하죠.”

“잠시라도 함께 계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요?”

“그럼요. 남녀가 확 가까워지는 덴 이만 한 게 없다니까. 기왕이면 좁고 어두운 곳에 가둘수록 좋은데.”

“새벽녘이라 어둡긴 하겠지만 방이 너무 널찍한 게 흠이로군요.”

“어쩔 수 없죠. 여하튼 부딪쳐야 불이 붙는 법이니.”

“설마 들어가자마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깨우시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아가씨가 그 방면으론 좀 둔하셔서….”

“그래도 저희 공작님이 좀 출중하신 게 아니라서요. 지금 무방비 상태로 주무시고 계시니 꽤나 도발적일….”

“아가씨의 현명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군요.”

“미남을 차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했습니다. 육중하고 투박한 갑옷 안에 절세미남이 들어 있지요.”

“어머, 저희 아가씨는 어떻구요. 총기가 조금 부족하시던 때에도 미색만큼은 어디 견주어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고요.”

“에이, 그래도 레이디의 최대 매력은 외모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공작 전하의 최대 매력은 미모랍니까?”

마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밤비 경의 밤색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 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지요. 불꽃은 두 분이 튀어야 하는데, 괜히 우리끼리.”

“맞는 말이에요. 이 새벽에 대체 뭐하는 짓인지.”

“두 분과 두 가문을 위한 일입니다.”

“잉? 그렇게 거창한 이유로요? 난 그저 우리 아가씨가 로맨틱한 연애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렇게 일만 하다 좋은 시절 다 가지.”

“네? 겨우 그런 소박한 이유로요? 로맨틱한 연애가 꿈이시면 부인이 직접 하시지 그러세요?”

“어머, 오호호호, 밤비 경두 참. 이 나이에 연애는 무슨. 나야말로 일이나 해야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야, 아야. 왜 때리시고…. 그 나이가 어때서요? 지금도 고우신데요?”

“어머 그러는 자기는? 그렇게 단아하고 곱게 생겨서는. 맨날 검만 휘두르지 말고 쉬는 날 밖에 나가서 남자도 좀 만나고 그래요.”

“전 검과 결혼했습니다.”

“검 잘 다루는 남자 소개해 줘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단호하기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한데 안에서 뭐 하고 계시려나?”

“짧지만 알찬 시간 보내시길 빌어야지요. 그런데 간밤에도 두 분이 응접실에서 한참 담소를 나누지 않으셨어요?”

“에휴.”

밤비의 질문에 마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엿들었는데, 이건 뭐 재미도 없고 분위기도 없고. 로맨스가 왔다가 얼어 죽었겠더라고요.”

“그래요? 이상하네요. 전하가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레이디를 무척 아끼신다는 건데.”

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가씨도 살짝 둔하시지만, 공작 전하도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왜요?”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셔서요.”

“어휴,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째 물어보는 투가 밤비 경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뜬금없이 나이 자랑을 하시더라고요.”

“네?”

“본인이 아가씨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강조하시던데. 그러니까 잔말 말고 내 말 들어라, 뭐 그런 느낌이었어요. 원래 좀 권위적인 분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나이는커녕 신분이나 출신, 성별도 가리지 않는 분인 걸요. 그런 면에선 드물게 소탈하신 분이에요.”

“그래요? 그럼 아가씨껜 왜 그러셨대?”

“저만 해도 다른 성에 기사 지원을 안 넣어 본 줄 아세요? 아무리 검술과 대련 시험에서 1등을 해도 최종 단계에서 번번이 물을 먹었죠. 오직 전하만이 솜씨로만 저를 평가하셨어요.”

“흐음…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여하튼 그거 말고도 삭막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고요.”

“삭막한 얘기요?”

“나라 걱정, 백성 걱정, 불의한 자들을 향한 분노 같은 거요. 평소 화가 많으신가 봐요?”

“대쪽 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약자에겐 또 한없이 너그러운 분인데…. 여하튼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있네요.”

밤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참, 아까 자는 사람을 갑자기 깨우면 심장이 상한다고 한 말, 정말이에요?”

“저도 잘 모릅니다. 레이디가 너무 단호박으로 나가실까 봐 나름 손을 쓴 거죠.”

“역시 그렇죠? 얌전하게 생겨서는 어쩜 그리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경도 앙큼하다니까.”

마사가 밤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밤비 경이 옆구리를 문지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게요. 안에서 뭐 하시는 거야?”

마사가 문에다 귀를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혹시 아가씨 잠드신 건 아니겠지?”

“설마요. 잠들면 어디서 잠드시겠어요!”

“그, 그렇긴 하죠. 너무 조용해서 그냥.”

두 사람은 문에 귀를 딱 붙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방으로 들어온 알레스는 밤비 경이 당부한 대로, 공작이 놀라서 심장이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로 다가갔다.

‘가만? 생각해 보니 공작의 얼굴을 양껏 찬찬히 뜯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흥분한 나머지 마음의 준비운동을 소홀히 한 탓일까.

잠든 공작을 향해 홀린 듯 다가간 알레스는 결국 심장에 무리가 오고 말았다.

“예쁘다, 진이….”

이런 헛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자신의 입이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깨달은 알레스는 충격으로 또다시 심정지가 올 뻔했다.

영주의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평온하게 잠든 공작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저쪽 세상 그와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의 외양이 아무리 닮았어도 뼛속부터 다른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시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수줍은 배려가 담긴 다정한 눈빛이나 호기심 어린 소년의 시선 같은 것.

그런 건 공작에게만 있고 차갑고 까칠하고 고독한 그에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작이 그림 같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운 채 눈을 감고 있기에, 그 따스한 눈빛을 눈꺼풀 아래 숨기고 있기에 두 사람이 더욱 닮아 보이는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 경건한 순간에 그 인간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경고. 무방비 상태로 미남을 훔쳐보는 일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경고를 가벼이 여긴 죄로 알레스는 얼어붙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한편 공작은 속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 낼 거 같다.’

예민한 전사의 감각을 지닌 그는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미 깨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뜻밖에 고용인이 아닌 알레스가 들어오자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는 척을 해 버렸다.

갑자기 당황해서 그랬던 거 같다.

그래도 알레스가 깨우면 그제야 잠에서 깬 척하며 일어나려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참다못해 실눈을 뜨고 슬쩍 봤더니 알레스가 침대 앞에 오똑 서 있는 게 아닌가.

‘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지?’

혹시 간밤에 나눈 이야기 때문에 화가 난 걸까?

밤새 곱씹어 보니 내 참견이 기분 나빴던 걸까?

공작이 혼자 고민하는데 알레스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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